<창조적 진화> 강독 여섯 번째 시간에는 3장을 반 정도 읽었습니다. 3장 마지막 부분에 3장의 전체의 주제를 정리한 부분을 먼저 읽기도 했고, 샘께서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주셔서 다음 시간에는 몇 가지만 더 짚어보면 3장은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 2장에서 언급된 ‘의식’에 관해 샘께서 좀더 설명해주셨는데요. 식물과 동물이 분기하면서 동물의 운동성과 더불어 발달하게 된 것이 의식이지요. 베르그손은 의식을 매우 특별하게 규정합니다.
베르그손의 의식과 무의식
샘께서는 먼저 ‘의식’이 <창조적 진화>에서는 ‘생명’과,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는 ‘지속’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짚어주셨습니다. 베르그손은 신체와 의식의 관계뿐 아니라 의식 자체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도 시간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시간, 지속, 기억, 생명이 같은 걸 다르게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불가분하다는 것, 흐름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의식과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무의식이지만 말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무의식은 돌덩이처럼 의식이 부재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샘께서는 ‘의식 자체가 의식되지 않은 상태’, ‘표상적인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표현하셨는데요. 몽유병자의 상태와도 비슷하고, 예술가도 어떤 면에서는 그런 무의식의 상태에서 작품을 창조해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베르그손이 말하는 무의식과 비슷합니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의식은 인간의 특권이 아닙니다. 본능에 내재한 것처럼 보이는 앎, 이를테면 장수말벌의 마비시키는 능력 같은 앎도 의식에 속합니다. 다만 깨어나지 못한 의식일 뿐이죠. 베르그손은 ‘의식의 깨어남’이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직관의 방향과 지성의 방향인데, 의식이 깨어나게 되는 것은 지성의 방향입니다. 직관의 방향에서는 동물의 경우처럼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고 “껍질 속의 본능으로 축소”(275쪽)되어버립니다. 반면 지성의 방향에서 의식은 모든 걸 고체화하고 대상화하는 지성의 특성으로 인해 대상들에 적응하고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기에 이르죠. 그렇게 해방된 의식은 또한 “내부로 굽어져서 그 안에 아직 잠자고 있는 직관의 잠재성을 일깨울 수 있”(275쪽)게 됩니다. 직관이 지성의 도움으로 지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철학, ‘전체 속에 다시 한 번 용해되기 위한 노력’
이번 시간에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부분은 베르그손이 요구하는 철학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자비로운 흐름 하나가 있어서 우리를 적셔 주며 거기서 우리는 일하고 살아갈 힘 자체를 길어낸다. 우리는 이 생명의 대양에 잠겨서 그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열망하고, 우리의 존재 또는 적어도 그것을 안내하는 지성이 거기서 일종의 국부적 응고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느낀다. 철학은 전체 속에 다시 한 번 용해되기 위한 노력일 수밖에 없다. 지성은 그 원리 속에 흡수되면서 자신의 본래 기원을 거슬러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이고 점진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수한 인상들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며, 이 인상들은 서로 교정되고 또한 서로 위에 겹치면서 결국 우리 안에서 인간성을 확장하고 인간성 자체를 초월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289~290쪽)
하지만 이런 노력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정신의 뿌리깊은 습관들이라고 베르그손은 지적합니다. 우리를 ‘주어진 것의 순환 속에 가두어 놓는 추론들’이 그것인데요. 그런 추론들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습관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관념의 악순환을 깨뜨리는 것이 '행동'임을 베르그손은 강조합니다. 누군가 수영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지성을 총동원해도 수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일단 물로 몸을 던져보아야 수영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물 위에서 그럭저럭 지탱하게 되고, 조금씩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위험을 받아들이고 ‘행동’할 때 “추론이 매어 놓고 풀지는 못할 매듭”(291쪽)이 풀리게 된다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사유의 도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도약을 해야 합니다. 원래의 사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샘께서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지요. 저도 여러 번 들은 이야기여서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조언도 합니다. “사물을 거칠게 다루어야 하고, 의지 행위에 의해 지성을 그 처소 밖으로 밀어 내야 한다.”(292쪽) 그게 무슨 의미일지 곰곰 생각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지만, 생각만하는 것으로는 그 의미를 결코 알 수 없겠지요. 그 의미일 거라 짐작되는 행위들을 해보지 않고는요.
3장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고 중요한 부분도 많은 것 같은데 정리하려고 하니 어렵네요. 반복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일단 도약을 하라!
타산적이고 조심성 많은 지성의 경고를 넘어서서 전체에 녹아지기 위한 시도로서의 철학!
멋있네요!! 철학의 비전은 결코 지성적 확장과 축적이 아닌 자유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에게서 그러한 바다 같은 지속=자유라는 어려운 길로 나아가는 절차적 방법론이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었는데요.
그래도 비전을 분명히 잡았으니,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해보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