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강독 일곱 번째 시간에는 3장을 거의 마무리했습니다. 역시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았는데요. 이번 시간에 무엇보다 놀라웠던 부분은 질서와 무질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베르그손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질서의 부재'로 이해된 무질서
우리는 질서와 무질서라는 관념을 떠올리면 당연히 질서가 없는 상태에서 질서가 있는 상태로 가는 그림을 떠올립니다. 무질서를 ‘질서의 부재’로 생각하죠. 베르그손은 우리가 ‘부재’로 이해하는 것이 실은 뭔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와 산문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우리는 서고에서 시집을 기대하고 책을 뽑아들었다가 산문집일 경우 이렇게 말하면서 책을 도로 꽂아넣습니다. ‘이건 시집이 아니네.’ 이때 우리는 ‘시의 부재’를 본 게 아니라 ‘산문’을 본 것인데 그걸 ‘시의 부재’로 표현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부재나 부정의 표현이 실제로 부재나 부정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어긋났음을 표현하는 말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무질서’의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는 질서가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질서를 발견할 때, 즉 당장은 필요하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질서를 발견할 때의 정신의 실망을 언어의 편의를 위해 객관화하는 것”(334쪽)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질서를 발견한 것이지, 뭐가 없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정도가 다른 질서가 있는 게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른 두 질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질서란 어떤 질서를 말하는 걸까요?
베르그손은 우리 정신이 대립되는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한편으로는 자연적 방향으로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방향을 역전(중단)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자연적 방향이란 생명 자체의 근원으로 가는 방향, “잇따르는 창조를 향하는 불가분의 전진”(327쪽)으로 향하는 방향을 말합니다. 두 번째 방향은 이러한 불가분한 흐름으로서의 전체를 중단하는 방향으로, 지성성과 물질성이 동시에 생겨나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 흐름이 중단되는 곳에서 ‘물질적 요소들의 복잡화’와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수학적 질서’가 자동으로 생겨납니다. 이러한 질서와 복잡화는 지성과 같은 방향에 속하므로 지성에게는 긍정적인 실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것이 정교하게 조화를 이룬 것을 보면 감탄하고 찬미하게 되는 거고요. 이처럼 자연적(생명적) 방향에는 생명적 질서, 또는 의지된 질서가 있고, 이와 대립하는 물질적 방향에는 타성적, 자동적 질서가 있습니다.
무질서라는 관념은 환원불가능한 두 종류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샘께서는 무질서뿐 아니라 모든 부재와 부정의 관념이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짚어주셨지요. 전체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요. 어떤 사물이나 상태에 대해 ‘~가 없다’ ‘~이 아니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요. 우리에게 굳어진 이 습관이 실제로는 어떤 기대에 대한 표현이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지 못하게 하는지 한번 잘 따져봐야겠습니다.
물질과 생명의 운동
위에서 언급한 두 방향은 생명과 물질이 운동하는 두 방향이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긴장과 이완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상승운동과 하강운동, 생성하는 운동과 해체하는 운동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명은 “물질이 내려온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367쪽)처럼 보이며, 물질은 이러한 노력이 점차 소진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생명은 운동이며 물질성은 그 반대의 운동이다. 그리고 이 두 운동 각각은 단순하다.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불가분의 흐름이며, 물질을 관통하면서 생명체들을 절단해 내는 생명 역시 그러하다. 이 두 흐름에서 물질은 생명과 모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물질로부터 무언가를 얻고 있다. 거기서 두 흐름 사이의 타협안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유기조직이다. 이 유기조직은 우리 감각과 지성에 대해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부분들의 완전한 상호 외재적인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세대를 관통하면서 개체들을 개체들에 종들을 종들에 연결해주고 생명체들 전체의 계열로부터 물질 위를 흐르는 단 하나의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내는 약동의 단일성에 눈을 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개체들 자체도 우리에게는 분자들의 집합이나 사실들의 집합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 지성의 구조 안에 있을 것이다. 지성은 밖에서 물질에 대해 행동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실재의 흐름 속에서 순간적 절단을 행함으로써만 거기에 이를 수 있다.” (373~374쪽)
하지만 지성의 눈만이 아니라 정신(esprit)으로 보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시 운동하게 되고 모든 것이 운동으로 용해될 거라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이번 부분에도 멋진 비유가 많았는데 조금 어렵네요. 계속 읽어봐야겠습니다.
질서와 무질서에 대한 기존 관념을 해체하는 베르그손의 해석 역량에 저도 놀라고 말았습니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해 가는 과정이 바로 진화라고 이해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이 ‘본성적으로 다른 두 질서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현실에서 일어나는 무질서를 본성적인 차이로 이해하고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무질서를 여전히 부정하는 마음입니다. 분명 저한테도 두 가지의 질서가 작동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무질서를 배척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질서를 대립이 아닌 공존의 방식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