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역시 대담하게 나아가네요. <권력에의 의지> 강독 강좌가 벌써 마지막 한 회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10회로 했어야 한다고 안타까워하셨는데, 저 또한 매우 동감하는 바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아쉽게 헤어져야 다시 만나기도 쉽다니, 이 귀한 책을 다시 꼼꼼히 소화해갈 기회가 곧 오리라고 기대해봅니다. 사실 이런 정도의 깊은 경의와 애정은 3권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를 읽어나가면서 생겼습니다. 아포리즘으로 이뤄진 사유의 편린들은 주체, 사물, 의지, 의도 등에 매달리며 세계를 실체화하는 우리의 인식 및 지각의 기원을 낱낱이 파헤치며 해체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치밀하고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이! 급하게 밑줄을 그으며 따라갔습니다만, 새삼 이 기록이 장인적 수행이자 위태로운 실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유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극한의 체험을 어떻게든 문장화하고 있는 모습에서 자비심까지도 느껴졌습니다. 왜 후대의 수많은 지성들이 니체의 삶과 철학에 감응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고요. 이번 시간에는 ‘반(反)실체론’으로서의 니체 철학과 ‘인과성’ 개념의 해부, 그리고 ‘영원회귀’로 표현되는 ‘순간의 윤리성’을 배웠습니다. 머릿속에 남은 흔적을 얼렁뚱땅 끄적여보겠습니다!
반(反)실체론을 위한 힘-계보학
“니체철학은 반-실체론이다!” 채운샘은 이렇게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곧 철두철미한 생성 철학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단어 자체는 어려울 게 없지만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투쟁과 효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 비상식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유기체적 습속을 붕괴시켜버릴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였던 니체는 인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그 위태로운 우상 파괴와 전도 작업을 해냈던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초월성의 종언을 표현합니다. 이는 니체의 말이지만 니체가 신의 살해자는 아닙니다. 신을 죽인 건 말하자면 중세적 사고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근대라는 시대의 인간들이죠.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영역’ 앞에서 신을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과학이 들어서죠. 분석하고 체계화하고 예측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근대 학문(Science)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서,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지의 것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알려질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됩니다. 인과의 세계가 도래합니다. 신은 죽었지만 신의 자리에는 과학(물리학, 역사, 화학, 경제학)으로 무장한 인간이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는 그 모든 과학 역시 믿음의 체계일 뿐입니다. 물리학이 채택한 가장 작은 실체인 ‘원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신’과 같이 총체적인 실체는 아니지만, 원자는 모든 현상의 최종적인 단위이자 가장 작은 실체‘들’로서 고안된 개념입니다. 니체는 물리학에서의 이런 원자조차 우리 인식에서의 습속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칸트의 물자체로까지 이어져온 현상과 본질, 결과와 원인, 대상과 주체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산물입니다. 가장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알 수 있든 알 수 없든, 모든 ‘실체적인 것’은 그 자신의 관계들과 동떨어져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다른 조건 없이도 성립되는 것, 주어진 것이자 불멸하는 것으로 전제됩니다. 그런 한에서 생성과 변화를 부정하고, 나아가 삶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니체는 거듭 말하죠. 그 어느 구석에도 독자적인 무언가는 없다. 모든 것은 상호인 침투, 지배, 영향, 섞임, 얽힘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수 있다. 존재(being)는 없고, 되어감 즉 생성(becoming)만이 있다. “어떤 사물의 속성은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들이다. (...) 즉, 다른 사물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473쪽)
사실 해방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정답을 듣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류를 발생시키는 배치를 이해하고 점검하는 일입니다. 하여 우리의 담론과 사고 속의 ‘실체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차이에 주목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나타남과 반복이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생성이지만 왜 여전히 실체적인 것처럼 나타나는가? 이는 불교에서도 거듭된 물음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게 없고(무아) 존재라는 게 없는데(무상), 우리는 왜 계속해서 나를 느끼고 존재의 상을 포착하게 되는가? 여기서 니체는 도덕도, 심리학도, 물리학도, 아닌 힘의 차원에서 대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체를 부정한 한 마음 작용의 주체도 물질 작용의 주체도 더 이상 소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행위에서 행위자를 찾고, 사건에서 원인을 추론하고, 현상에서 본질을 집작해내는 이 경향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그 힌트는 권력에의 의지에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사태를 장악하고자 하고 자기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힘들의 벡터입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충동들의 복합체인 한 자신을 관철시키고자 하고 지배하고자 합니다. 이런 경향은 유기체에 이르러서는 마주치는 사건들을 동화시키고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지각하고 인식하는 사고 역시도 이런 기원을 갖지요. “우리의 사고에서 본질적인 것은 새로운 재료를 낡은 도식들(=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정돈하는 작업이며, 새로운 것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다.”(427쪽) 또한 니체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식의 모든 장치는 추상화와 단순화의 장치이며, 인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강제적 점유를 지향한다. (...) ‘목적’과 ‘수단’을 가지고 사람들은 과정을 장악한다.”(428쪽) 정리하면, 우리는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들로 정돈하고 구획화하는 방식에서 힘에의 의지를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이해’이자 ‘인식’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공포의 문제가 함께한다고 니체는 덧붙입니다. 만약 사건들 속에서 이미 아는 그 무엇도 덧입힐 수 없다면, 즉 날것의 생성, 즉 무궁한 변화와 나타남-소멸함을 맨 몸으로 맞이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붙들 수 있는 것 없음은 공포를 유발합니다. 하여 어떻게든 그것을 상쇄시켜야 합니다. 즉 허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죠. 변화하는 현상들을 재빨리 가짜로 간주하기. 거기서 배후, 원인, 본질을 소환하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태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하는 것이죠. 이는 권력에의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생성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게 먼저일까, 존재와 이상과 실체를 추구하는 게 먼저일까? 아마도 이는 동시적이며 한쪽이 다른 한쪽과 비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모든 실체주의는 생성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입니다. 생성과 변화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뿌리 깊은 두려움의 기제로 굳어진 실체적 사고 틀을 집요하고 세심하게 부숴가야만 할 것입니다.
인과론과의 싸움 : 상호-발생
“우리는 무언가가 무엇 때문에 변화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물을 찾는다. (...) 언어적으로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원인은 결과를 가져오는 능력이지만, 사건에 덧붙여 날조된 것이다. 인과성 해석은 하나의 착각이다.”(464쪽)
“소위 인과성의 본능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일 뿐이며, 그 익숙하지 않은 것 속에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원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알려진 것에 대한 탐구이다.”(465쪽)
실체를 전제하는 모든 사고는 인과론을 내세웁니다. 선형적 시간을 전제하고, 결과에는 결과를 포함한 원인이 선행한다는 이 사고는 천변만화하는 세계를 이해(지배)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기작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위에서 말한 공포를 제거하려는 의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는 결코 원인을 체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인에 관해서는 단연코 어떤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다.”(463쪽) 우리는 따지자면 결과인 세계를 살아갑니다. 아니, 원인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과조차도 아닌, 사건들의 세계를 살아갈 뿐입니다. 그 세계는 결코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 시간으로 추려질 수 없는 복합적 시간선들로 짜여 있습니다. 그 선들을 이리저리 잇고 주름 접었다 펼쳤다 하는 과정은 이 순간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영원회귀 개념은 이러한 과정을 함축하지요. 요컨대 인과성 개념과 싸우는 일은, 첫째로 실체론적인 ‘원인’ 개념과 맞서는 것이고, 둘째로는 선형적인 시간성에 맞서는 일이 됩니다.
실체론, 인과성, 선형적 시간관 같은 사고의 전제를 총체적으로 뒤집는 니체의 투쟁은 사실 불교에서 이뤄져온 작업이기도 합니다. ‘공(空)’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과업은 상주론과 단멸론이라는 두 극을 쳐내는 것이었습니다. 상주론이란, 낱낱의 현상적 개체는 몰라도 전체상으로서의 실체(브라흐만, 아트만)를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근본에 가닿고 합일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실체론이자 이상주의에 가깝지요. 단멸론은 반대로 모든 것의 소멸에 초점을 맞춥니다. 모든 것은 무에서 무로 되돌아갈 뿐이지요. 그렇기에 한세상 살다가 떠나면 된다는 태도를 풍깁니다. 일종의 온전한 허무주의로서 윤리랄 게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공’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을 때 이르게 되는 사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무에 방점을 찍지 않으십니다. ‘공’의 다른 표현인 ‘연기(緣起)’가 중요한 건 그 때문입니다. 연기란 곧 ‘서로 연하여서만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연기를 상호-의존으로 번역하지만, 채운샘께서는 상호-발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자는 여전히 이미 존재하는 항들을 설정하는 듯한 뉘앙스이기 때문입니다. 항 자체의 자립 불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발생 자체가 의존적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언어의 틀이 오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있음과 없음, 이것과 저것, 하나와 여럿이라는 용어들이 부적절한 것이죠. 사실 언어를 사용하는 한 실체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언어는 상호 외재적인 존재 항들을 전제하고 언제나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론의 사유는 부정어법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어떤 동사도 명사도 형용사도 논리적 정합성을 요구합니다. 모순을 막고 체계를 부여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언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호-발생하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연기의 차원에서 보면 사실 모순은 없습니다. 논리학의 틀만 벗어난다면, ‘나는 여성이다’ 역시 사실이며 ‘나는 여성이 아니다’ 역시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없는 것이 맞지만, 나는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상호-발생의 관점에서 실체성이 녹아내리면, 언어 역시 헐렁한 허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나는 ‘없다’는 말을 어떻게 체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렇게 차근히 풀어나가면, 또한 명상 같은 경험을 하다보면, 혹은 문득 멍 때리다보면, ‘그래 실체적인 고정 불변의 나는 없지’라는 감각에 닿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아’라는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사유와 행동들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라는 중심이 실체처럼 작동합니다. 무아의 질문은 여기서 심화됩니다. 나는 없는데 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가? 나인 듯한 무언가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어떻게 ‘내가’를 지우고, ‘주체의’, ‘나의’, ‘사물의’를 출발점에 두지 않고 사유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영원회귀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영원회귀 : 파도여, 너와 나는 같은 종족이로구나!
상호-발생의 차원에서 보면 ‘나’는 없습니다. 실체라 여겨질 무엇도 없지요. 하지만 어떤 일관성이 나타납니다. 비슷한 운동, 유사한 결, 반복되는 형태가 나타납니다. 완벽하게 무로 돌아가는 것은 없지요. 그렇기에 단멸론의 허무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리듬이 매번 조합되고 생산되며, 매번 ‘나’인 듯한 어떤 존재가 돌아옵니다. 이 반복의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니체는 파도-바다의 비유를 많이 사용합니다. 이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영향 아래 사용했던 비유와는 다릅니다. 그때 니체는 파도(표면)는 여러 현상으로 그리고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근원으로서 바다(심연)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언제나 존재론적 위계가 설정되고, 이 현상적 표면을 벗어나는 방식의 결론이 도출되고 맙니다. 하지만 실스마리아의 무아 체험 이후 니체는 이 구도를 벗어납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존재가 파도와 같음을 선언합니다. 바다는 파도들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과정으로서만 바다입니다. 파도는 매번 다른 파고, 다른 파형, 다른 파장의 특이적 상들로 지나가고 또 지나갑니다. 우리가 포착하는 ‘파도’라는 볼록한 웨이브는, 그 모든 파동이 스쳐간 자리에서 도출해내는 경향성입니다. 그것은 사실 뚜렷한 윤곽도 없고 본질적 형상도 없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의 같은 파도인 것처럼 매번 나타납니다. 그런 파도는 결코 바다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체는 전체의 부속물도 아니요, 주체도 아니지요.
여기서부터 시간 개념이 변형되고 인과론이 부서지고 재조합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니체에게 ‘순간’은 결코 얇은 판 같은 단위가 이 아니라 깊이 있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파도는 바다와의 관계 속에서만 출현합니다. 바다는 파도들에 의해서만 바다일 수 있으며, 이미 지나간 모든 파도와 앞으로 지나갈 모든 파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한 번의 파동은 그 이전의 모든 파동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파동과 떨어져 있지 않은 채, 그것들의 진동들과 더불어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번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듯 보이는 이 파도는 그 모든 바다와 함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순간도 마찬가지이지요.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순간이라는 성문’은 지나간 모든 것들과 지나온 모든 것들을 포함한 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즉 이곳, 이 순간에는 전 우주와 영원이 함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무엇이 회귀하는가? 생성 전체가 회귀합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절 중 하나인 ‘341. 최대의 중량’의 질문은 영원회귀의 질문이 끌어당기는 파괴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윤리적 시험으로 주어집니다. “영원한 모래시계가 거듭해서 뒤집혀 세워지고” 모든 것이 수없이-영원히 되돌아올 거라는 악령의 발언은 하나의 시금석입니다. 한편으로 이 거대한 반복은 우리를 두렵고 질식하게 만듭니다. 단지 지겹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 실존과 이 세계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긍정할 수 없는 한 영원한 반복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이자 형벌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존 전체를 거듭거듭 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무한 반복적 감옥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 구절에서 저희는 이 회귀되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을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반복은 가성적인 사고실험만이 아니라, 힘들의 세계에서는, 파도의 운동에서는 매번 실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니체에게 ‘순간’은 힘들의 모든 진동들과 더불어 도래하고, 파도는 모든 바다의 역사와 함께 도래합니다.
“힘들의 세계는 결코 균형에 이르는 법이 없고, 한시도 휴식하는 법이 없으며, 그 힘과 운동은 매 시마다 똑같이 크다. 이 세계가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든지 간에, 거기에 이미 도달했음에 틀림없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수히 그랬을 것이다. 이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 이미 한 번 있었고, 여러 번 있었으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493쪽)
이 힘들의 상호-발생적 본질에 주목한다면 매번 찾아드는 ‘순간’은 위대한 시간입니다. 창조의 시간입니다. 모래시계는 매번 다시 세워지지만,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다시 세워짐들을 포함한 채 세워집니다. 그렇기에 니체는 말하죠. 돌아오는 순간 속에서 우주는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악령의 질문을 고결한 것으로 느끼고 환영하게 되는 상황(그러한 위대한 건강)에 대해서도 적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와 함께 되돌아오는 순간의 파도 앞에서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그동안 불행, 고통, 병으로 간주되어온 과거를 기꺼이 원했다고 말함으로써, 그 의미와 색채와 질감을 바꿔버립니다. 마치 끔찍했던 어떤 사건이 지금은 하나의 시련이자 디딤돌이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듯, 벌어진 모든 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톤의 ‘원인’으로 재배치되고, 그 의미도 가치도 재해석됩니다. 여기서 인과론은 꺾이고 혹은 접힙니다. 마지막 1000번째 살해의 원인으로만 여겨졌던 999번의 살해는, 지금의 살해를 그칠 수 있는 계기이자 힘으로, 앞으로 전혀 다른 나날을 살아갈 동력으로 재해석됩니다. 과거가 존재하는 차원과 지평이 바뀌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또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악령이 전하는 영원회귀의 시금석을 긍정하는 자에게 매번의 현재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채색되게 됩니다.
요컨대 영원회귀의 윤리적 요청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순간을 과거와 미래를 변형시키는 순간으로 원하라. 그 한 번의 원함을, 그랬었고, 그럴 것임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원하라. 지나간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의 관계를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현재를 원하고, 그런 실험으로 만들어라. 채운샘은 이것이 세상에 없던 낙관주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소위 카르페디엠과는 다르다. 그것은 탕진으로 이어지는 사춘기의 치기어린 순간적 쾌락주의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영원회귀는 윤리적 차원에서 숙명론과의 싸움을 포함합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한 과거 해석의 문제, 즉 회환의 감정 및 무기력과의 싸움입니다. 결과이자 원인인 이 현재를 그 자체로 바다와 하나인 파도로 이해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순간들을 제련하고 창조해가는 장인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에게 영원회귀의 가르침은 여전히 물음표와 느낌표가 빼곡이 덮인 개념인 듯합니다. 그렇기에 해석하고 접속시키고 싶은 강한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불교와도, 현대과학과도, 문학과도 마구 연결시키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문제는, 인과-주체-시간 등의 우리의 깊은 사고습관을 헐겁게 만들면서 전체이자 순간인 오늘을 남김없이 긍정하는 윤리일 것입니다. 마지막 챕터의 영원회귀 장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할지, 설렘과 담담함을 함께 안고 읽어가보아야겠습니다!
영원회귀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라는 설명에서,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베르그손도 세계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며, 매순간 그 전체(과거 전체)가 되돌아오며 눈덩이처럼 부풀어간다고 묘사하지요. 이번 강의에서 '인과'를 '상호발생'으로 설명해주신 점도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과를 상호발생으로 볼 때 중요해지는 건, 지금 이 순간의 '결단'인 것 같아요. "이 순간을 과거와 미래를 변형시키는 순간으로 원"한다는 것, 이 순간을 그런 실험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