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쌤께서 진행해주신 4주차 주제, <쾌락과 무기력의 악순환>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의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게 된 OTT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여 그 콘텐츠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예속화했는지, 그 징후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친숙한 주제인만큼 막간에 공감을 표해주신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던 거 같습니다. 저 또한 이번 강의가 참 와닿아서 후기를 작성하기로 하였는데요. ^^
얼마 전 중학생 동생이 스마트폰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시나(?) 릴스, 숏츠, 틱톡을 비롯한 갖가지 숏폼 콘텐츠들을 옮겨 다니며 짧은 영상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는데요.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동생이 30초 남짓의 짧은 영상들도 끝까지 시청하지 않고 3초만 보고, 저장하고, 넘기고, 저장하고 넘기고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10초 남짓의 짧은 영상을 볼 거면 다 보고, 말 거면 말지. 왜 3초만 보고 저장하는 거야?” 묻고 싶었으나, 규문 세미나서 나눠 주시는 ‘그 짧은 텍스트’조차 다 못 읽고 나중을 위해 챙겨두는 저의 모습이 떠올라서 질문을 삼킨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행동의 이유가 '필요는 한 거 같은데 다 보기에는 지루함을 느껴서'라면, OTT를 자주 접하게 된만큼 신체 감각이 더 산만하고 빨라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인데요.
이제는 숏 영상이 주목을 받으려면 3초 안에 시선을 끌어야 한다고 하니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체감이 됩니다. 중장년 세대 또한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방대한 정보량을 마주해야하니 변화에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도 오갔습니다. 점점 자극이 없는 영화는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생각을 나누거나 대화를 하는 행위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영상을 ‘본다’, ‘생각한다’, ‘나눈다’는 인상보다는 강의에서도 언급해주신 표현처럼, “자극을 씹다 버리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는 팬데믹 이후 더욱 가속화된 현상이지만 우리는 이상한 낌새조차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영상에 시선을 잡히던 때를 상상해봅니다. 막상 생각해보면 그렇게 웃기지도 않았던 영상들인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챈 순간 공허함이 몰려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를 했더라면!’ 후회와 자책을 곁들이기도 하죠. 눈치 채지 못하는 새에 무뎌지는 것은 저희의 해석의 역량일 것입니다. 좋아요를 달고, ‘ㅋㅋㅋ’를 누르면서 더는 ‘정말로 이게 좋았고 웃겼나? 그렇다면 어디가 얼만큼, 어떻게?’ 라고 반추해보는 일은 드물고 이상한 일이 된 것일 테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지금의 영상 콘텐츠들을 항진과 진통이 돌고 도는 어떤 틀처럼도 느껴졌습니다. 뭘 느꼈는지 고민할 새도 없이 곧바로 다음 콘텐츠로 나의 균열을 잊게 되는(잊어야 하는) 고리 같습니다. 우리는 자극으로부터 더욱더 민감해지고, 사고의 회로는 단순해집니다. 결과적으로 수잔 손택이 말한 것처럼 타자들의 고통에 대해, 그 이미지가 웬만큼 강렬하지 않은 이상에야 시시하게 느껴져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자극으로 소비자를 끝없이 유혹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 (<논어> 옹야 17장)
혜원 쌤은 그 방법으로 <논어>에서의 직(直)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곧 직면을 뜻하는데요. 자신이 처한 상황, 고통, 인식한 문제를 정직히 보도록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여기서 ‘고통을 직면한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이는 자기의 모든 문제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자기가 그 일부이기도 한 원인을 사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이란 자기로만 환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을 자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놓고 이제는 콘텐츠에 의존하는 개인에게 죄책감까지도 심는 저 말이 어떤 면에서는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혜원 쌤께서 '중독'이라는 표현을 지양하자고 말씀하신 이유기도 합니다. 병리적인 시선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치료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열고 재미를 못 느끼는 콘텐츠도 계속해서 돌리고 손을 놓지 않는 그 상황도 자기의 욕망으로부터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감당할 수 없다.’하며 ‘그 행위를 감당 중인’ 자기를 원인에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직면이란 원인을 가능한 한 구체화해보자는 노력으로도 들렸습니다. 어떤 사건에서 ‘모든 것은 구조 잘못이야’, ‘모든 것은 내 탓이야.’로 뭉개버리는 것은 원인을 규명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반성처럼도 보이지만 실은 ‘구조’와 ‘나’라는 큰 단어들 뒤로 숨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에 대해서 문제를 삼을 때에는 내가 ‘이 행위란 정말 문제구나!’ 원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상황과 언어가 동시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채운 쌤은 변용을 원한다면 더 큰 변용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따라서 ‘변화는 자기가 만든다.’는 맥락의 사고로 끝을 맺기보다는 자기가 어떤 배치 속에 놓여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요구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조건 속에서 스마트폰을 만지고, 어떤 상황에 끄고 싶은 마음이 드는 지를 관찰하고, 누군가가 지켜보는 환경, 자기를 가만두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연결 안에 본인을 두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독 치료’의 접근보다 개인을 덜 무력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OTT에 기대하는 것은 ‘예측불가능성’에서 비롯한 도파민 분비입니다. 서사 구조는 기대를 반하는 크고 작은 반전들이 발생하고 짜릿함을 만들어내는데요. 주영 쌤의 “이제는 상업콘텐츠의 이야기가 시시하게 느껴진다.” 말씀에 저도 공감이 되었고 다른 도파민 수단을 찾았던 거 같습니다. 간혹 규문에서 읽는 어떤 책들과 세미나도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고,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할까.’ 기대를 하고, 예상이 깨짐과 동시에 찾아오는 흥미들이 있었는데요. 분명 규문의 어떤 상황들은 저의 도파민을 잔뜩 분비해줍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제 안에서 ‘도파민 분비 수단’의 단편으로만 머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강의를 듣고 저 또한 어떤 문제 의식을 ‘숏폼’처럼 소비하는 감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즉 저 또한 세미나를 ‘씹고 뱉으려’ 하지는 않았는가 싶은 생각이 좀 들어서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괴로우면서도 지나치면 어쩐지 안 될 것 같은 소식들을 끝내 지나쳐버리는 나의 죄책감을 상쇄할 만큼 중요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괴롭게 하지는 않는’ 이야기들이다. (...) 그때 안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가만히 있으며, 또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걸. (...) 집중적인 관심과 당혹감이 있어야 행동이 일어날 수 있는데, 우리의 관심은 너무나 많은 이미지에 의해 분산되어 있다. ‘당혹’ 하기보다는 관심의 파편화가 이루어지면서 아무리 끔찍한 영상을 눈앞에 두더라도 금세 다른 것으로 관심을 옮겨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의록, 8)
혜원 쌤은 직면의 반대가 상황의 표면으로 도피하는 태도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한다는 생각이나 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마음이 나의 마음에서 안도감을 만들어내던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진통제로 작동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미나에서는 분명 OTT를 볼 때와는 다른 질감의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가령 어떤 공부의 시간은 ‘순식간에 잊도록 만드는’ 숏폼 영상과 광고의 시간보다 느리지마는 풍부하게 흐르는 거 같습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날에도 이 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설명하고, 맥락을 만들어서 나누고, 각자가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지요. 형식적 만남들과, SNS의 자극에서는 ‘좋아요’의 가식을 주고받는다면 세미나에서는 반발심을 다듬어보기도 하고, 좋았더라도 어디가 얼마나 좋았는지 기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생각을 마주하는 과정들의 즐거움은 OTT의 재미와는 차이가 있었는데요. 하나의 공부도 내가 어떻게 접근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직면이 되기도 하고 도피가 되기도 하는 거 같습니다.
민호 쌤이 말씀하신 것처럼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이 OTT와 쾌락-무기력의 문제는 어느 특정 세대, 특정 소속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문제의식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저도 남은 크크랩에서의 공부가 'OTT에 혀를 차면서 예술 영화를 정주행하는 모임'으로만 남지 않게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해보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고 그 뒤에 영화에 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사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을 볼 수 있을지, 저를 가만두지 않는 배치 속에서 더욱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강의 잘 들었습니다 🙂
샘이 적은 것처럼, 우리는 OTT뿐 아니라 많은 것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미나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하며, 저의 공부도 돌아보게 되네요. 이번 강의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통'이 아닌 '직면'으로 나아가는 길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샘 얘기를 듣지 못해 궁금했는데, 후기 자원해주셔서 반가웠어요.^^ 진솔한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