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비인간 존재들의 팬데믹 겪기
COVID-19는 ‘인수공통감염병’입니다. 동물들끼리 걸리고 죽는 바이러스였다면,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요란을 떨 일이나 되었을까요?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 관심거리(이슈)가 된 이유는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외에 어떤 특정 동물군들이 피해를 겪는 비극은 인간의 연구 과제가 될지언정 인간이 팬데믹으로 선포할 가치는 없었겠지요. 따라서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 외 다른 동물들이 이를 어떻게 겪었는가에 관해서는 인간 누구도 관심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죽어 나가는 원인을 찾다 보니 박쥐에 가서 닿았지만, 여기서 박쥐는 동물의 한 종류로 취급되기보다 시초에 바이러스를 퍼뜨린 특별히 나쁜 무엇이기에 주목되었을 뿐입니다. 저조차도 이번 이인샘의 ‘비인간 존재들의 팬데믹 겪기’를 이리저리 알려주는 세미나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팬데믹이란 커다랗고 짧지 않은 영향에서 저와 가까운 사람들 또는 확장해도 같은 인간종으로서 인류의 피해와 피해 이후의 삶 정도의 범위에서 이 이슈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팬데믹 시국에 동물들의 겪음을 떠올릴 수 없는 이유는 ‘팬데믹’이란 용어 자체가 인간의 피해 특히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피해를 막겠다는 의도에서 등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등 동물들 간의 전염이나 이 전염으로 죽은 가축이나 조류들의 수가 끔찍한 사태처럼 선포된 팬데믹에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을 테지만, 우린 그 사건을 팬데믹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물들의 서식지를 자기 이익에 따라 콘크리트로 덮어서 거기서 살아가던 동물들의 삶을 강탈합니다. 동물의 권리는 인간 삶 다음에 고려되지요. 다시 말해 ‘팬데믹’ 선포는 인간중심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이처럼 ‘팬데믹’이란 용어 자체에 인간 외 다른 생명체의 소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팬데믹 동안 인간이 바이러스를 피해 집에 머물면서 야생 동물이 도시 거리에 나타났다거나 인간이 쓴 마스크에 동물들이 묶이고, 잘려 죽었습니다.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강하고 잦은 소독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보이지 않는 미세 동물들을 박멸했지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심었던 꽃들은 방역 정책의 일환인 여행금지에 의해 통째로 갈아엎어졌습니다. 다양한 생명체들의 삶이 인간의 방역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 되었지요. 인간의 COVID-19 겪음에 인간 외 생명체들의 아우성들이 함께 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신 이인샘은 팬데믹을 돌아보면서 자신(인간)과 다른 모든 것들이 함께 겪었으며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인간과 인간외 존재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살펴볼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동물을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어류 등 형태학적으로 분류하여 다룹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학술적 분류는 동물학자에게 또는 교과서에서는 필요하지만, 대부분 인간에게 실제적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인샘은 ‘인간을 위한’ 동물의 분류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가는 쓰임에 따라 동물은 야생 동물, 동물원의 동물, 먹기 위한 가축, 반려동물로 나누었습니다. 우린 주로 전자보다 이인샘이 나눈 동물로 접하는 것 같습니다. 야생 동물은 세 가지 동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동물을 의미하겠지요. 후자의 분류는 인간의 쓰임에 따른 동물의 분류이자 인간에 의한 폭력을 보여주는 분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비인간 존재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보조하려고 사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팬데믹’이란 용어는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비롯한 폭력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팬데믹 선포로 인간이 점유한 공간이 비었고, 이 공간에 야생 동물들이 출몰했습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폭력에 의해 야생 동물은 좁은 영역으로 내몰렸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야생’의 공간은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야생 동물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동물을 볼 수 있는 곳은 동물원에서입니다. 인간은 야생 동물을 인간의 영역과 분리하면서도 인간의 볼거리를 위해 동물원을 만들었습니다. 팬데믹은 동물원에 가는 걸 막았지요. 동물원의 동물들은 인간들의 필요가 축소되자 생명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관람객 없는 동물원은 유지 비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동물들 즉 가축은 어떨까요?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가축들을 직접 볼 수 없는 환경에 삽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손질되어 위생적으로 포장된 먹음직스러운 고기 상품이지요.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안 보이는 곳에서 가축도 찍어냅니다. 공장식 축산에서 찍어내는 상품은 고기뿐 아니라 인간 의류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가죽이나 털도 있습니다. 상품이 되기 위해 가축인 동물은 효율적이고 비슷하게 개조됩니다. 항생제로 관리되는 가축들은 축사의 한 마리 소가 감염되면, 전체 소의 감염을 막을 수 없기에 다른 축사로 전파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전체를 살처분합니다. 게다가 코로나는 인수공통감염병이기에, 인간의 피해를 일으키는 싹이 되는 가축은 가차 없이 살처분합니다. 인간종에게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외 존재의 생사는 부차적인 일이지요. 팬데믹 기간에 인간의 집에서 함께 사는 반려동물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그나마 인간 대접을 받았을까요? 엔데믹이 되자 필요가 줄어든 반려동물들이 유기되었고, 다른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안락사당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이인샘이 살펴본 팬데믹 동안 동물들의 겪음의 사례들만으로도 동물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인샘의 ‘비인간 존재들의 팬데믹 겪기’ 강의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비명뿐 아니라 동물들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인샘은 비인간 존재들의 비명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를 질문했습니다.
채운샘은 ‘우리’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물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인간종 유지를 위해서도 비인간 존재들의 공존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우주가 마치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지만, 비인간 존재들이 없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인 우주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인간의 실존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긋는 ‘우리’ 범위는 한없이 협소하지요. 가족이나 친구들 조금 확장되면 내가 사랑하고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나 동물들 정도가 ‘우리’의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나눈 동물들은 당연히 ‘우리’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한 도구나 수단일 뿐임을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기에 그들(비인간 존재들)의 비명은 더욱 듣기 어렵습니다.
알고자(듣고자) 하는 욕망조차 배치의 문제 아닐까요? 우리는 자본주의에 살며 거의 모든 존재를 상품으로 소비합니다. 인간조차도 예외가 아니지요. 동물들 역시 그냥은 나의 소비에 얼마나 유용한가 이상으로 관심 갖기는 어렵지요. 이 정도 관심이 그들을 알고자 하는 현재 우리의 욕망입니다. 이 맥락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인간의 피해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으로는 동물권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다른 의미 생성도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과 그 필요에 따른 동물의 삶 즉 인간 삶과 동물 삶의 분리를 전제하고 던지는 질문에서는 (우리가 동물들의 단독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 던지는 질문에서는) ‘동물들의 겪기’는 항상 우리의 시급성에서 뒤처져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반려종임을 증명하는 결과가 아닐까요? 우리의 팬데믹 겪음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생명과 연결됨을 체험을 통해 각인되게 하는 기회였으니까요. 비인간 존재들과 상호공존을 위해 찾아낸 도덕으로서 육식금지, 생태파괴 금지 등 ‘금지들’이 우리 욕망의 방향에 얼마만큼 영향력이 있을까요? 주변만을 보아도 각종 금지들은 거의 영향력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정 도덕적 실천이 지속적으로 동물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팬데믹이 된 COVID-19와 같은 바이러스의 원인이 우리(인간)가 아닌 박쥐(특정된 단독 존재)라고 단정하면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되는 것 같지만, 박쥐를 원인으로 규정했다고 무엇이 해결되었나요? 이런 접근으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비명들이 줄어들까요? 박쥐의 비명은 비명이 아닐까요? 팬데믹은 인간과 박쥐 사이의 관계일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얽힌 세계를 알도록 강제했습니다. 그런데 존재는 변형하면서 실존하기에 현재 마련된 해결책(백신이나 예방대책 등)을 믿으며 다음의 팬데믹을 대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인샘의 이번 강의 제목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허투루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범위를 확장하는 작업과 ‘우리는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작업이 끊임없이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의 세미나 같은 작업 말입니다.
백신 연구에 필요해 짜낸 병에 담긴 ‘투구게’의 파란색 피가 뇌리에 깊숙이 남는 강의였습니다. 또한 강의를 준비해 주신 이인샘과 강의를 듣고 자신의 위치에서 활발하면서도 진지하게 참여해 주신 선생님들을 따라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사유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요. 감사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중대한 신호였던 것 같습니다. 이 세계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인간들만이 살고 있지 않고, 인간들만이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신호...
인수공통이라는 것이 말해주는 것 자체가 격리되고 밀집되고 개량되고 이동되고 학살되고 매립되는, 관계에서의 비대칭성 즉 '예의 없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팬데믹을 통과한 방식은 그 신호를 철저히 묵살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제기가 담긴 강의와 후기를 잘 읽었습니다!!
정말 팬데믹이라는 말 자체도 비인간 존재에 대한 소외와 폭력을 담고 있네요. 샘의 후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는 작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적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성찰하는 작업도 그 중 하나일 거 같고요.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