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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강독 강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매시간 빠지는 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 속에 마지막까지 이어졌는데요. 니체의 핵심 사상이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영원회귀’, 그리고 다른 저작들에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던 ‘힘’과 ‘힘의지(권력에의 의지)’에 관해 좀더 깊게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이미 한 주가 훌쩍 지나버렸지만(후기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강의에서 마음에 남은 부분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힘의지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영원회귀
“모든 것은 생성되고 영원히 회귀한다. 빠져나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힘(그리고 야만!!)에 봉사하는 선택의 원리로서의 회귀 사상.”(851쪽)
“모든 가치의 전도. 더는 확실성에 대한 쾌감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쾌감. 더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창조하는 것, 더는 보존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 더는 ‘모든 것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다.’라고 겸허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우리의 작품이다! 우리는 이 점을 자랑스러워하자!’라고 말하는 것.” (851쪽)
강의를 시작하며 샘께서는 힘의지와 영원회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짚어주셨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개념으로, 하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른 하나를 이해할 수 없지요. 영원회귀는 힘과 힘의지의 세계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입니다. 이때 회귀하는 것은, 우선 ‘동일자’입니다. 어제 떠올랐던 해가 오늘 아침 다시 떠오르고, 어제의 내가 오늘 아침 다시 눈을 뜹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 올해 다시 돌아오고, 나무에 다시 잎이 돋고 꽃이 핍니다. 하지만 이런 동일자가 기반하고 있는 것은 사실 비동일자의 세계입니다. 니체처럼 ‘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그렇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차이’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힘의 본질은 어떤 것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고, 자신을 확장하고, 우월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들은 언제나 자기 힘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 속에 있습니다. 그런 세계는 안정이나 균형과는 거리가 멀고, 관계 속에서 일시적으로만 균형을 이룰 뿐입니다. 동일자는 이 힘들의 관계, 힘들의 투쟁의 일시적인 산물일 뿐입니다. 니체 철학에서 영감을 얻은 들뢰즈는 동일자(주체)를 ‘환영’이고 ‘효과’일 뿐이라고 표현합니다. 지난 강의에서 샘께서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존재는 존재인 것처럼만 존재한다’고 정리해주셨지요. 이처럼 ‘힘으로서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불균형하며, 비대칭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어떤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허물어져가고 무(無)로 돌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극도의 허무감을 극복하기 위해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이상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를 추동하는 것 역시 힘의지죠. 샘께서 여러 번 강조하신 것처럼, 힘의지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 강하고 약한 것이 없습니다. 방향만 있을 뿐입니다.
세계의 이런 본질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이상으로 추구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내세 등이 그것인데요. 니체가 보기에 그런 것들은 거대한 기만이었습니다. 불안정과 불균형을 본질로 하는 우주 속에서 영원과 안정, 균형,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과 같지요. 여기서 영원회귀의 두 번째 문제, 가치 전환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어떻게 이런 세계의 본질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목표를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극도의 허무감에 빠지거나 기만적인 이상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더는 확실성에 대한 쾌감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쾌감’을 느끼고,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창조’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가는 세계에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영원회귀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샘은 짚어주셨습니다.
모든 사건이 잠재되어 있는 세계와 주사위 놀이
“세계를 일정 크기의 힘으로서 그리고 일정 수의 힘 중심들로 생각해도 된다면 - 그리고 다른 모든 표상은 규정되지 않아서 쓸모없다면 -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세계가 그 실존의 거대한 주사위 놀이 속에서 산정 가능한 결합의 수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가능한 결합이 언젠가 한 번은 달성되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결합은 무한하게 달성되었을 것이다. (...) 이미 무한히 자주 반복되었고 자신의 놀이를 무한히 즐기는 순환 운동으로서의 세계.” (857쪽)
니체의 힘과 힘의지 개념은 19세기 과학적 발견이 담겨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과학적 성과들로 세계는 이해 가능한 것이 되었지요. 니체는 과학서를 탐독하며 과학적 성과들을 철학에 이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습니다. 과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유를 더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실험을 멈추지 않았지요. 이를테면 니체는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다른 사유를 끌어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립된 계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보존된다’는 이 법칙에서 일정한 우주, 균형 잡힌 우주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 일정함이 끊임없는 운동의 결과라는 점을 보았죠. 에너지들이 원래 일정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승과 하강 운동의 결과로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일 뿐이라고요.
마찬가지로 세계는 ‘이미 무한히 자주 반복되었고 자신의 놀이를 무한히 즐기는 순환 운동으로서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우연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연들이 현실화되는 것은 매번 다르죠. 들뢰즈는 이것을 ‘사건’ 개념으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이 우주에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이 잠재되어 있고, 그것이 개별적으로 현실화되는 방법만 다를 뿐이라고요. 이런 세계는 주사위 놀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주사위를 던지면 나오는 눈은 언제나 1에서 6중에 하나죠. 하지만 주사위가 던져지는 방식, 떨어지는 방식, 굴러서 그 눈이 나오는 방식은 매번 다릅니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을 겪지만, 그 일을 구현해내는 방식은 매번 다릅니다. 샘께서는 윤리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하셨지요. 여섯 숫자 중 하나가 나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주사위를 던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던져야 할까요?
매시간 주옥같은 니체의 문장들과 채운샘의 해석으로, 각자 다양한 지점에서 니체와 찐하게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에 만난 니체는 이전의 니체와는 또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아리송하기만 하던 개념들이 좀더 분명하게 다가오기도 했고요. 다음에 만날 니체는 또 어떤 니체일지 궁금해지네요.^^ 지난 6주간 북적북적 함께 니체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또 다른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길 고대하겠습니다~!
이 순간, 이 주사위의 눈은 언젠가 한번 일어났을 가능한 결합이다.
뿐만 아니라 무한하게 달성되었으며, 무한하게 달성되어갈 결합이다.
이 문장들이 주는 무시무시한 허무를 먼저 이해하고, 그것을 건너가는 전환적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 제게 남은 과제 같습니다!
'무한한 반복'이 저주에서 놀이가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순간 어떤 깨우침일까.
차이, 즐김, 유희, 사건, 던지는 마음...
아직도 진행 중인 문제이자 고민거리이지만, 이전처럼 오리무중은 아닌 듯합니다.
선각자들이 남겨 놓은 수수께끼 같은 말들(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파편들)에 살을 붙이고 씹고 소화해서 몸으로 만드는 일은 저희 각자의 몫임을 되새겨 봅니다!
북적북적 6주 간의 <권력에의 의지> 강독 너무나 유익했습니다!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