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년 깜짝 특강 6강 후기(박규창, "팬데믹, 예속적 주체의 생산 vs. 대항 품행의 발명")
만두 만들기와 글쓰기 사이를 오가며
* 팬데믹에 팔 걷어붙인 국가
코로나가 사스와 메르스를 뒤로 제치고 바이러스 공포를 몰고 왔다. 근래에 겪어보지 못한 질병의 빠른 확산으로 사람들은 움츠러들었다. 모든 이의 일상은 혼란으로 뒤죽박죽되었다. 재택근무의 일상화, 자영업자의 줄도산, 사회적 약자들의 고립, 정서불안 및 자살 등등. 위기와 비상 상황에서 국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감염으로부터 자국민 보호라는 대의명분과 더불어 들어보지도 못한 각종 대책이 쏟아졌다. ‘재난지원금’, ‘사회적 거리 두기’, ‘동선 감시’. 등 지원과 옥죔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위축된 경제 활동의 활성화를 이유로 대기업 활동의 규제는 풀리고, 백신 개발은 적극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마치 위기 구원자로서 국가의 실체가 피부로 실감 되는 것 같았다. ‘방역’을 무기로 삼은 국가의 지도를 따라. 푸코는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사법 메커니즘, 규율 메커니즘, 안전 메커니즘’으로 구분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세 가지 메커니즘은 교차해 작동했다. 방역법을 어긴 신천지교회 교주와 관계자를 구속, 고발했듯이 금지와 처벌의 장치인 ‘사법 메커니즘’은 작동했다. 이어 국민들의 동선을 늘 감시, 통제, 관리했던 ‘규율 메커니즘’, 그리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일정 수준으로 조절하기 위한 백신 접종 등의 조치를 담은 ‘안전 메커니즘’이 동원되었다. 국가의 권력이 일상 전체에 깊게 스며든 것이다.
* 국가, 너 거기 홀로 있었니?
국가의 실체가 몇 명의 집권자와 막연한 국민이란 이름만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국가의 권력은 알게 모르게 작동하다가 큰일이 벌어지면 관계를 통해 민낯을 분명하게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모든 관계가 권력을 매개로 이루어지듯이 국가의 권력도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일방적인 억압과 금지의 형태만으로 권력 행사는 불가능하고, 때에 따라서는 지배를 받는 자가 지배하는 자에게 오히려 영향을 끼치는 ‘관계 맺음’ 가운데 권력은 작동한다. ‘관계 맺음’ 자체도 권력의 희망대로 되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이다. 권력의 불안정한 낌새 가운데 저항하고 대항하는 힘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구에서 정치권력은 군림도 하고 다스리는 권력, 군림하되 다스리지 않는 권력, 그리고 군림하지 않지만, 다스리는 권력의 순으로 변신했다. 절대군주, 입헌군주 시대를 거쳐 근현대 자유주의에 이른 과정이다. 각 권력은 권력을 작동시키고 통치하기 위해 어떤 기술과 장치들을 동원해 구성원의 행동을 끌어내는 것일까. 일방적이고 적대적인 적나라한 사법과 규율 메커니즘의 권력 행사에서 벗어나 안전 메커니즘을 토대로 한 새로운 통치방식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시장의 변화와 ‘인구’라는 새로운 통치 대상의 등장으로 나타난 결과인데, 이제는 규제와 금지보다 ‘현상 스스로가 부정적인 부분을 제거해’ 나가도록 부분적으로 방임하고 방치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관리하며 통치가 이루어진다. 국가는 더 이상 고정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유동적 장치’들을 통해 관계를 맺고 행사되는 ‘효과나 양상으로서의 현상’이 된다. 팬데믹은 국가가 접종, 방역 등 ‘안전장치’의 통치성을 익히고 실천했던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통치당하기도 하며, 혹은 살짝 비틀어 튕겨 나가기도 했던 것인가.
* 갈라치기, 덮어쓰기: 이주노동자
K–방역에 대한 호평은 국가가 팬데믹 관리를 잘해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낮추어서가 아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개방성을 잃지 않고’ 외국인의 유입을 차단하지 않은 점이다. 제한되고 복잡한 방역 절차가 따르긴 했지만, 결정적인 lock down 조치는 없었다. 밖으로 넉넉해 보였던 정부가 안으로는 어떠했을까. 이주민 가운데서도 이주노동자는 K-방역에서 ‘터진 꽈리’였다. ‘마스크 구매’, ‘재난지원금 지급’, ‘백신 접종’, ‘코로나 치료’ 과정에서 외면당했다. 치료를 위한 의사소통 지원 같은 섬세한 돌봄은 물론 생필품 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국민’을 진짜 ‘비국민’으로 대접했다. 21년 들어 이주민 확진자 비율이 늘자, 방역 대책의 범주에 집어넣게 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에 공장을 돌리고 일터를 지켰던 이들은 누구였는가. 국민들이 비운 자리를 비국민인 그들이 메꾸었다. 기본적인 노동 조건이 보장되지 못했던 그들은 아프면 제 몸으로 버티고, 일하게 되면 ‘노동 강도 증대와 임금 체불 증가’로 악화한 여건에서 살아냈다. K-방역의 ‘경제 정상화를 위한 대외적 개방성’은 대내적 폐쇄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팬데믹 기간의 경제 성장 실적을 K-방역이라 자찬하는 정부는 성과의 많은 부분이 이주노동자의 희생 위에 이룬 결과임을 외면한다. 팬데믹 이전 ‘경제 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그들이 팬데믹 기간에는 ‘재난의 원인’으로 취급당한 셈이다. ‘꽈리’의 쓸모는 부풀어 올라 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다. 터져 소리 나지 않으면 뱉어버린다.
* 지켜보기, 은근히 옥죄기: 감시체계와 안전장치
K-방역의 장치의 많은 부분은 ‘규율 메커니즘’이었다. 정부는 국민들이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의 지침을 정해준다. 규칙을 정해 의무적으로 지키라 한다. 규율의 준수 여부가 정상,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날그날의 ‘방역지침’,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 두기’, ‘방역 패스’, ‘접종 안내’, ‘재난 문자’ 등등. 모든 것이 깨알 같은 지시 사항들이다. 초기에 감염자의 일상 동선을 공개해 경계토록 하고 당사자에게는 큰 모욕감을 안겼던 정부의 조치는 방역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던 ‘감시 기술’들은 방역의 이름 아래 각광받는 이변도 생겼다. 개인들의 온갖 일상이 ‘국가 관리의 정보’로 여겨졌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국민에게 ‘안전’을 담보한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 하의 현대 국가의 통치방식은 이름 그대로 국가가 개인과 시장을 움켜쥐지 않고, 모르는 척 내버려 두는 방식을 구사하기도 한다. 팬데믹의 경우에도 감염자 하나하나를 치료해 완치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인구 전체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한다는 면에서 상당 정도의 총체적 피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수준의 사망자는 용인한다. 이와 더불어 예방 접종을 지속해서 권하고, 항체 보균자의 숫자 발표를 통해 집단 면역을 일깨우며 접종을 옥죈다. 문제 상황을 자연 현상의 일환으로 여기며, 상황을 조절, 관리하려는 조치를 할 뿐이다. 문제 상황을 남기고 이의 해소를 위해 국가가 존재함을 국민들이 알도록 한다. 알게 모르게 국가 안전 장치의 홈으로 말려들기에 십상이다.
* 의심하고 질문하며 몸으로 옮기기
통치는 품행의 인도를 자부한다. 이리 따라오라고! 많은 이들이 정말로 좇아가도 되는지 의문을 품기보다 정부의 일이니 잘 따라가고 협조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며 순응한다. 착한 국민이 탄생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국가의 통치 기술들이 만들어내는 불이익을 개인이 감수하며 따라야만 하는가. 어떤 경우에는 목숨까지 내놓으며. 국가는 권하기만 하고 발생하는 문제에 뒷감당은 하지 않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신자유주의의 권력이 개인들에게 권하는 ‘자기 계발’의 논리는 ‘
자발적으로
기꺼이
계속해서 자본 앞에
발가벗겠다.’라는 다짐이다. 이처럼 국가 통치의 내용들이 거의 다 자본의 물을 먹고 늘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팬데믹은 국가 통치의 장치만을 고분고분 따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팬데믹이 인간, 비인간의 얽힘과 나눔의 고리가 훼손되고, 자연이 어쩔 수 없이 지르는 비명임을 안다면 통치에 자발적으로 관리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삶의 방식을 발명하지 않고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든 지경에 자기 스스로 통치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권력의 틈새와 경계와 주변을 훑으며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지 찾아보기.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이들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깊게 궁리하기. 저항과 대항은 늘 질문에서 출발한다. 지금, 이 삶이 온전한 삶인지 묻는 것에서 자기 통치의 발걸음은 시작한다. ‘맹자의 不忍之心!’ ‘타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마음’이다. 차마 못 본 척할 수 없는 마음 내기는 함께 다른 길을 만들어낸다.
cf) 奎飛御天歌
대항 품행을 몸으로 실천하는 이들, 규문 사람들. 흔치 않은 길을 가겠다 마음 낸 이들. 나를 모든 것의 중심에 놓으려 하거나,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뻐기려 하지 않는 이들. 그래서 얼굴에 권력의 기미가 없는 이들. 아직은 눈썹 사이에 내 川 자를 그리지 않은 이들. 홀로 獨舞를 추다, 때가 되면 모여 손잡고 즐겁게 同舞를 추는 동무들. ‘기쁘게 살기를 고민하는’ 이들!
* 주고받기 통해 강의는 더 두툼해지고: 키워드 중심으로
<신우 샘>
통치되고 싶은 않은 마음. 국가로부터 도주하고 싶은 마음에 공감. 권력에는 선악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분석, 비판이 필요. “저항은 순응과 대립하지 않는다”에 대한 규창 샘의 보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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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창 샘: 저항은 명령에 대해 거부, 번복하기를 통해 다른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일. 이는 다른 식으로 욕망을 따르는 일이며, 자기를 조형하고 변형하는 길이라는 면에서 또 다른 순응이 아닌가. 주체적 선택이란 면에서 통치에의 수동적 복종과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따라서 저항이 다른 방식으로 순응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음. 좀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즐거움을 따를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통치성으로 빨려들어갈 가능성.
<주영 샘>
백신 휴가! 감염과 접종 여부에 관한 지속적인 감시 체계 실감. 감염이 아니라 감시당하는 사실이 더 두려움. 백신 맞지 않으려는 이들의 권리를 못 지켜주는 사회. 방역 준수 철저라는 K-방역의 통치성 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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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창 샘: 접종률로 이루어지는 통치. 모두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백신 접종에 아무런 생각 없이 몸 내주기는 권력 통치 강화에 기여하는 셈. 백신 맞지 않는 이 존중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접종 캠페인.
<해민 샘>
약물 알레르기가 심한 친구의 예. 권력은 개개인의 행동으로 작동. 대항 품행이 즐거움만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인가. 나를 지탱할 버팀목 찾기의 어려움. 나를 정말 기쁘게 해 본 경험. 즐거운 방식으로 이끄는 삶의 태도. (나머지 부분은 딴생각하느라 챙기지 못함. 해민 샘, 미안합니다.)
<윤순 샘>
권력 행사를 국가와 국민의 대립, 내국인과 이민자 대립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통치성의 권력관계. 행위 양식 발명. K-방역은 국가의 정책에 따른다기보다 사람들이 규제에 대한 욕망의 결과 측면은 없는가. 방역에 의한 보호감, 안정감을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닌가. 복종, 대립의 구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측면.
<채운 샘>
- 통치성이 욕망은 아님.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은 권력은 일방적이지 않음을 드러냄. 학창 시절 교사에게 맞는 학생의 표정에 따라 교사 매의 강도가 차이가 있듯이 권력은 관계 속에서 작동. 일방적 구조 속에서도 권력은 일방적이지 못함.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거꾸로 영향을 줄 수도 있음.
- K-방역은 국가가 주도한 자부심의 상징인가. 국가가 일방적으로 작동했던 힘인가. 국가의 방역을 통해 국민들은 정말 보호받은 것인가. 도산한 소상공인의 예 등. 방역의 주체는 국가인가, 개인인가. 국가 보호의 대가가 개인의 희생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매일 확진자 보도로 두려움을 주며 통치의 방식에 따르길 인도.
- 대항 품행의 출발은 질문하기. 도처에 관계에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와 통치방식에 관해 묻기. 국가는 팬데믹 상황에서 정말 무엇을 했지. 국가 이데올로기를 파고들기. 자기 모든 행위에 자기 스스로 논리를 갖추기. 지배당하지 않게 되기 위한 스스로 노력. 능동적 행위 구성의 기쁨과 즐거움 누리기!
<선주 샘>
친구의 백신 부작용 경험. 백신의 불안정성. 국가의 강압적 방역 조치에 대한 반감. 맹자의 不忍之心이 마음에 크게 다가옴. 이번 특강을 통해 모르고 있던 부분도 많이 알게 되었고, 특히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울 수 있었음. 길 위의 죽은 비둘기 초등학생과 함께 묻어주기.
만두 속 만들고, 반죽해서 만두 빚으며 후기 쓰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낯선 일이었지만, 묘한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후기 쓰라 권하신 정아 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생각거리를 건네준 규창 샘, 고맙습니다. 悟讀(깨달음의 읽기 쓰기) 하려 했으나 誤讀이 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와우! 횡설수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됐습니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됐군요. 다소 초점이 분명치 않았던 부분들이 어떤 관점 속에서 문제화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정리된 후기네요! 특히 푸코의 권력 개념을 통해 어떻게 저항의 지점을 사유해야 할지 더 힌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국가 권력 싫어요'에서 그칠 게 아니라 내 몸을 관통하는 권력의 작동을 질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패닉도 겪어낼 수 없다는 것. 팬데믹이 선사한 패닉은 위험한 감염병 이전에 감염병 앞에서 혼비백산하는 우리 자신의 역량을 바라보게 한 계기였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네요. 읽으면서 저도 다시 우리가 어떤 문제들을 어떻게 겪었는지, 또 어떤 문제들은 어떻게 문제화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킬링 포인트. '제목'과 '규비어천가' ㅋㅋㅋ 감동과 웃음 감사합니다!
읽으시고 소감을 전해주신 규창 샘,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내 몸을 관통하는 권력의 작동을 질문하지 않"고는 모든 상황에서 나로서 온전히 살아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일했던 중고등학교 현장에는 위에서 내려주는 '승진'이라는 유혹의 권력 동아줄이 있습니다. 보통 세 갈래의 줄이 내려옵니다. 삭은 것, 기름칠한 것, 아니면 진짜 동아줄. 많은 교사는 이 줄을 잡고자 애를 쓰다 떨어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운 좋게 올라가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 부류 모두 끝내는 교사로서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지요. 학교는 학생을 가르치며 배우는 성장의 공간입니다.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 대부분은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 공간을 싫어합니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아이들의 성장에 즐거움을 느끼기보다 뭔가 폼나는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교사가 가르침과 배움으로부터 스스로 왕따를 놓으며 소외에 빠져드는 셈이지요. 미끄러지고 떨어진 이들은 자책하며 냉소와 비아냥으로 나머지 교사 생활을 이어가지요. 왜? 연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다 하다 안되면 주판알 굴리며 명퇴합니다.
학교 안에도 다른 길을 가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승진이라는 위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아니라 옆의 동료 교사들과 튼실하게 동아줄을 엮어내려는 교사들이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아이들과 부대끼며 아이들의 꼼지락거리는 성장 모습에 넋을 잃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수업과 활동을 통해 변해가는 학생의 모습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려는 동료들이지요. 이들은 대개 혼자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옆의 동료들에게 마음과 손을 내밉니다. 그래서 공부 모임이 만들어지지요. 자신의 수업 고민과 속내를 드러내며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아 함께 수업을 계속 고쳐나가는 뼈 깎는 수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요. 중고등학교에서 교사의 자기 수업 공개는 장기 기증보다 어렵습니다. 교과 칸막이 감옥에 갇혀 각자 왕국을 세우고 있으니까요. 이를 허물고 내 장기를 드러내 동료들의 진단을 받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자기 개방을 통해 자유로운 딴 세상이 펼쳐지는 공부의 재미를 만끽하는 교사들은 의외로 적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좀 다른 교사 삶의 방식을 발명하려는 교사들은 얼굴이 밝습니다. 왜? 권력의 낌새에 기미가 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권력의 내 몸속 통과는 권력 감수성을 일깨우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지요.
강의 내용과 샘의 생각이 어우러진 후기 넘나 감동입니다! 그날의 강의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네요. "대항 품행의 출발은 질문하기. 도처에 관계에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와 통치방식에 관해 묻기" "자기 모든 행위에 자기 스스로 논리를 갖추기. 지배당하지 않게 되기 위한 스스로 노력. 능동적 행위 구성의 기쁨과 즐거움 누리기!"도 다시 마음에 잘 담아봅니다. 만두 빚으며 정성스레 함께 빚어주신 후기 감사해요!^^
정아 샘, 특강 운영하시고 매끄럽게 마무리하시는 솜씨에 박수를 보냅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서울시 50플러스에서 채운 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수강생 중 몇몇이 모여, 공부 모임 "고통나"를 만들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햇수로 4년째로 들어갑니다. 나이 든 이들이 뭣 때문에 책 읽고 글 쓰겠다고 달려들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것일까요. 계획하고 작성해서가 아니라 나이 먹어가며 세상살이에 쫄다보니 그리 가서는 안 되겠다 싶은 절박한 마음에 모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처럼 공부하기 싫어하는 분위기에서 뭔가 읽고 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지요. 사회의 관습은 늙은 사람들에게 역할을 정해주지요. 군말 말고 조용히 쉬었다 가라고! 쇠심줄보다 질긴 이러한 관습과 인습의 올가미를 끊고 다른 그물망 짓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고통나' 친구들은 관습의 납덩이 중력에 짓눌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들이지요. 느리지만 그치지 않고 자신을 돌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던져보겠다는 사람들이지요. 고통나 움직임의 동력 중 큰 힘은 채운 샘과 규문이지요. 공부하다 막히면 여쭈면 되니까요. 이런 막강한 삶의 빽을 지닌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나를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란 마음으로 즐겁게 삶을 꾸려가려 합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질문을 품어가며 살아가려 합니다.
아, "고통나"는 "'고'전을 '통'한 '나'쓰기"로 채운 샘이 붙이신 강의 제목에서 뽑은 이름이지요.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나를 살려보겠다는' 마음 내기의 뜻도 담겨 있고요.
와~~ 꼼꼼하게 적어주신 후기 못지않게 만두또한 근사하게 빚으셨을 것 같아요~ㅎㅎ 덕분에 저역시 그날의 강의가 다시 떠오릅니다!!
"길 위의 죽은 비둘기 초등학생과 함께 묻어주기" 까지 적어주실줄이야~ㅋ 감개무량합니다.^^ 화요일 저녁 이시간 다시 줌으로 들어가 샘들과 만나고 싶어지네요~ㅎㅎ 6번의 감동적인 강의에 이어 마지막까지 이어진 감동적인 후기 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주 샘, 죽은 비둘기 묻어주신 고운 마음을 지닌 샘!
저도 비둘기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의 제목은 "비둘기는 (호) 박씨를 물고 오지 않는다!"입니다.
칠팔 년 전입니다. 퇴근길에, 동네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진 채 날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며 길 위에 널브러져 있는 비둘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쯧쯧거리고 살짝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
2) 아파트 동산 나무 밑에다 옮겨놓기,
3) 경비 아저씨한테 어찌해보라고 떠넘기기,
4) 동물보호단체에 전화해 어찌해야 할지 문의하기,
5) 직접 근처 동물병원으로 데려가기.
이 상황에서 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위의 선택지들은 빠르게 제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방법들이었습니다. 저는 눈을 껌뻑거리는 비둘기가 자기를 좀 어떻게 해달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5번의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원래 착한 사람은 아닌데 비둘기의 눈을 외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애원하는 눈길 같아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지나가는 초등학생이 없어서 제가 맨손에 비둘기를 들고 동물병원으로 갔습니다. 대신 옆에는 비둘기가 염려되어 같이 따라온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병원 의사 선생님과 저희와의 대화입니다.
- 저: 비둘기가 많이 다쳤습니다. 치료가 가능할지요?
- 의사 샘: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비둘기 치료는 처음인데, 치료하려면 X레이 찍고 깁스를 해서 삼사일 병원에 입원시켜야 합니다.
- 저: 아, 사람과 똑같네요? 비용은 어떻게 될까요?
- 의사 샘: 이것저것 검사와 처지 비용, 입원 비용 포함 25만 원 정도입니다.
- 저: (속으로 환장하네!를 외치고 망설이며) 그렇군요!
- 같이 따라온 동네 분: 그럼 저와 같이 반반씩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어떨까요?
- 저: (와, 이 사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아닌가 하며) 그럼 감사하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해주세요.
제가 2번의 선택, 즉 '아파트 동산 나무 밑에 옮겨놓기'는 못 하겠더라고요. 갖다 놓으면 날지 못하니 고양이 밥이 될 테니까요. 그 일을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은 비둘기 관리는 구청 공원관리과에서 하고 보호 조류가 아니기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저는 지역주민으로서(유권자로서) 구청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병원에 입원한 비둘기를 찾아다 자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니 그렇게 하겠다는 구청 직원의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비용을 같이 부담한 동네 분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그 남자분 얼굴은 권력의 기미가 없는 분이셨는데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셨습니다. 결국 죽어가는 비둘기는 두 선생이 살려낸 셈이지요. 저도 그랬습니다만 아마 학생들에게 비둘기 이야기를 자신의 무용담(?)으로 길게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됩니다.
집 식구들에게 이 사연을 얘기하니 딸아이와 아내의 응답: "아빠, 비둘기가 호박씨 물어다 주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입니다. 살짝 오버한 아비의 행동이 걱정되어서 하는 얘기였겠지요.
구청 직원의 도움으로 공원에 풀어준 비둘기가 제 삶을 이어가길 바랐습니다.
역시 딸아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비둘기는 호박씨를 물어다 주지 않았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지금 생각하면 좀 착잡합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지은 업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자연에 못된 짓을 할 대로 하고 마치 비인간들에게 선심 쓰는 듯한 인간의 몰골이 아주 초라해 보이니까요.
만두 속을 만들면서 내용을 생각하시고, 만두를 빚으면서 글을 다듬으셨군요!
샘의 후기를 읽으니 마지막 강의에서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잘 정리가 되고 이해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그 만두를 넣은 떡국을 먹으면 웬지 대항 품행의 태도가 절로 생겨날 것 같습니다!
저도 한 그릇 먹고 싶군요~ ^^
신우 샘, 만두 만들기와 글쓰기는 똑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두 속 만들기 위해 먼저 묵은김치와 삶은 양배추를 송송 썰고, 두부와 잘게 썬 양파를 망사 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제거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물기를 너무 빼서도 안 되고 덜 빼서도 안 되는 meden agan의 묘미를 발휘해야지요. 돼지고기 다진 것(저희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주 조금의 양)과 갖은양념과 함께 버무립니다. 이때 역시 간을 봐가며 섞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반죽입니다. 하, 차진 반죽은 어떻게 나올까요? 이 또한 물기와 치대기가 절묘하게 배합되어야 가능합니다. 반죽하며 언제 멈춰야 할까요. 밀가루가 ‘그만’이라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 손바닥의 촉감으로 결정합니다. 갓난아기 궁둥이 살이 느껴지면 그만입니다. 만두피를 빚고 만두 속을 적당히 넣어 동그란 만두를 얌전히 빚는 일. 모든 과정이 손의 공력으로 이루어지지요.
저는 글을 쓰려면 몸이 땡겨야 합니다.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몸에서 용트림의 소식이 들리면 쓰게 됩니다. ‘잘 쓰고 못 쓰는 글은 없다. 모든 글을 시절 인연이다. 온갖 기운들이 뒤섞여 그때 자기만큼 써지는 것이기에 자기 글이 있을 뿐이지, 어떤 다른 글과 비교되는 글은 있을 수 없다.’ 누구 말씀일까요. 채운 샘께 들은 말씀입니다. 제게는 늘 자신을 합리화하는 구실로 쓰입니다. 말씀이 제게 와 고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글 주제와 소재가 결정되면 글의 얼개를 잡기 위한 이러저런 생각을 그러모아 키워드 중심으로 글의 뼈대를 갖춥니다. 여기서 문제는 보태기가 아니라 덜어내기입니다. 만두 속 양념과 반죽이 알려주듯이 太過不及을 피하기 위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만두 속을 얼마나 넣을 것인지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너무 많이 넣으면 만두피가 터지고 너무 적게 넣으면 오그라들어 볼품없이 맛이 떨어지고. 글의 아기 궁둥이 살은 언제 나올까요. 쓴 다음 출력해 눈이 빠질 때까지 고치고 고치면서 나름 매끄러움이 느껴질 때. 모든 글은 만두와 같이 손과 엉덩이로 써지고 마감일이 마무리를 하지요. 이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제가 늘 이리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설날, 손 하나 꼼짝하지 않고 소파에 누워 TV보다 만두 상 차려지면 거드름 피우며 두말없이 만둣국 먹어 치우는 수많은 한국 아자씨들, 먹고 등 돌려 허리띠 풀러 배 두드리는 이들. 준비하고 설거지하느라 새빠지는 여성들. 한국 가정의 오래된 명절 풍경인데 남성들이 이런 특권을 쉽게 내려놓겠습니까? 설날, 만두 만들며 글쓰기를 오가는 일은 샘의 말씀대로 대항 품행의 실천인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만두 한 번 대접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