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모어 니체 /데리다- 니체 니체-데리다 /2024.04.22.(월)
제 4장 니체-데리다
- 데리다의 ‘니체의 문체들’(1972년 강연 제목)의 강연 제목이 보여주는 데리다의 니체 독법의 특징은 “일체의 현전적 진리가 없는 기호, 능동적 암호 풀기, 세계를 놀이로서 긍정하기,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양식 내지 문체”이다. 이 강연에서 데리다가 중점을 두는 것은 니체의 문체를 그의 저술에 나타난 여성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키는 것으로 진리, 문체, 여성이라는 주제들을 서로 결합해, 자신의 니체상을 보여주었다.
1. 니체의 여성
- 일반적으로 수수께끼 같고 알레고리적인 형상으로, 니체에게 진리는 여성이지만,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성은 단지 진리의 비진리를 위한 이름일 뿐이다. 데리다는 진리와 여성을 유희적으로 동일시(예시: p172)하고, 그렇게 하여 니체와 그의 문체들과 텍스트들과 진리들에 관한 관념들을 표현하여, 이러한 연상들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다.
2. 니체 텍스트의 해석의 문제
- “니체 텍스트의 해석” 문제는 “해석의 해석”- “해석 자체“라는 문제이다.
- 니체에게 ’하나의 여성‘, ’여성 자체에 대한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에게는 “니체의 진리 또는 니체의 텍스트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았고, 니체도 자기 자신을 말할 때조차 그에게 진리는 “다수”이며 그는 “나의 진리들”이라 말한다. 모든 존재론은 “검토와 전유와 동일화의 효과“에 불과하여 전제의 ”동일성을 확증하는 효과“에 불과하기에 니체는 존재론적 효과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고, ”텍스트의 이질성(재치있는 패러디, 에크리튀르의 전략, 펜놀림의 변별화 내지 특수화, 문체)“을 이용해, 의미나 약호가 통제하지 못하는 곳에서 여백을 서술하였다. 니체와 데리다는 존재론의 물음에 ”고유한“ 해답을 가질 수 없으며, 아예 물음 자체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데,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변하는 관계인 소유의 과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나는 우산을 잊어버렸다.“라는 니체 단편의 구절을 보면, 우리는 ’우산‘에 관한 단편이 해석하기에 대해 갖는 잠재성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비밀이 전혀 없으면서 그 주름 안에 진리를 숨기고 있는 듯 가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텍스트의 구조가 놀이를 통해서 해석자를 자극하고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니체 텍스트와 관련한 ”니체가 무엇인가를 진술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바로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의 그러한 한계, 즉 필연적으로 변별적이어서 언제나 나뉘고 접히고 증가하는 힘에의 의지의 효과인 한계가 아닐까“가 뜻하는 것은 ”니체 텍스트의 전체성’이라는 것은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 역시 단편적이고 잠언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3. 데리다의 1976년 니체 관련 세미나
- 서명과 텍스트가 분리되지 않은 채로 결합된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명은 어떤 텍스트의 끝에 있는 하나의 단어나 이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작동인 것이다.
- “니체의 오토비오그라피(부제-고유명사의 정치학)”에 ‘귀’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려 했던 것은 자아(아우토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귀라는 사실일 것이며, 니체를 넘어서는 번역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서명은 수용자 측에서 생겨난다.
4. ‘작품’, ‘삶’, 체계와 체계의 주체 사이에 있는 여백
- 이 여백은 힘과 세력, 잠재적임과 동시에 가동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태로 불렀다. “여백”은 텍스트의 몸통과 저자라는 개인 사이에서 생겨나야 하므로, 데리다는 “<이 사람을 보라>의 장면에서 니체를” 읽으라고 제안하는데, 이 텍스트에서 니체는 “자신의 몸과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유명사 없이 가면을 쓰거나 익명으로 등장한다.” 가면이나 다수의 이름은, “보호 이익”과 “잉여 가치”에 속하는데, “삶은 위장”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볼 때, 이 모든 것은 ”독특한 방식으로 고유명사와 동음이의어적 가면을 복수화하고 이름의 모든 실날을 미로- 귀의 미로- 안으로 얽혀 넣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 ‘생의 정오’의 사상은 “장소나 자리”가 아니라 “즉시 사라지는 경계”이며, 니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모순 원리”, 자신의 실존의 “이중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인데, 니체 자신은 ”죽음과 삶,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이중적 혈통”의 결과를 “삶 전체의 문제”와 관련 시켜 보았으며 “나는 양편 모두를 알고 있고, 나 자신이 양편 모두이다”라며 자신의 본성을 끌어내었다. “정신의 완벽한 명철과 명랑, 풍부함”을 “극도의 심적인 약함”, 심지어 “과도한 고통과도“ 화합시켰기에, 니체는 삶에 대한 관점적 광학을 이중적 본성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 보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관점을 전환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럴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오직 내게만 ’가치의 전환‘이 가능한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라 표현한다.
5. 데리다의 1981년 니체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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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와 해석‘이라는 주제로한 강연인데, 주요 내용으로 ’니체라는 이름‘, ’전체성이라는 개념‘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데리다에 따르면 니체를 그 이름으로부터 해석하고 그 이름을 그의 사상으로부터 해석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가지 방식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그 이름이 “가면과 시뮬라크르로 조각나고 다면화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이름의 문제를 새롭게 탐구하는 것. 이 이름은 결코 완료된 것이 아니라 “ 이 사상가의 삶의 저편 멀리서 비로소”, 즉 “세계의 미래로”부터 비로소 구성된다는 길이다. 다른 방식은 “이름의 본질성을 ‘사상의 사안’으로부터 규정하는 것, “특정한 고유명사는 개인적 ‘전기’나 ‘심리학’의 색인에 속하게 될 하이데거가 택한 길이다.
- 하이데거는 니체라는 이름을 지나가거나 종결된 사건, 확정되고 정의되고 분류될 수 있으며 결말지어진 일에 결부시키는 반면에, 데리다는 그 이름을 예견될 수 없고 결코 종결되지 않을 미래에 연결시키고 있다.
https://docs.google.com/file/d/1-Ns1G6juANoK8R0H4y5LC9JRaZN4ikKA/edit?usp=docslist_api&filetype=m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