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도 재밌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수카 사미의 과거생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카 사미는 과거에 밧따바띠까라는 이름의 시골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장터에 물건을 팔러 왔다가 재정관이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재정관처럼 살아보고 싶다!’라는 마음에 밧따바띠까는 재정관의 집에서 3년 간 일해주는 대가로 재정관의 한 끼 식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3년째 되는 바로 그날 밧따바띠까의 식사를 구경하러 온 인파 가운데에는 일주일간의 멸진정에서 나와 공양을 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벽지불이 있었죠. 놀랍게도, 벽지불을 발견한 밧따바띠까는 3년 간 뼈빠지게 일해서 얻어낸 식사를 한 술도 뜨지 않고 벽지불에게 공양 올립니다.
『법구경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런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뭐랄까 개연성이 부족한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깨닫고 아라한이 된다거나, 탐욕스런 사람이 갑자기 모든 걸 내려놓고 출가를 하거나 전재산을 보시하기도 합니다. 밧따바띠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정관의 식사’에 꽂혀서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방치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어떻게 일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낼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어떻게 이전과 다른 마음을 낼 수 있는 걸까요? 사람은 결국 생긴 대로 살던 대로 살게 되는 걸까요? 아니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인 걸까요? 사람은 점차적으로 변화하는 걸까요? 마법처럼 한 번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까요? 아니면 외부적 조건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걸까요? 이번에도 역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하는 법구경 강독이었습니다.
“마음의 성취는 지혜와 기쁨이 함께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마음은 공양을 올리기 전의 마음과 공양을 올리는 동안의 마음과 공양 올린 후의 마음이다. 신통력의 성취란 삼매에서 나온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밧따바띠까는 가장 공양받을 가치가 있는 훌륭한 벽지불에게 공양을 올렸다. 시주물은 그가 3년간 정당하게 일을 해서 얻은 음식이었다. 그리고 공양을 올리기 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공양을 올리기 전·중·후 모두 청정한 마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벽지불께서 멸진정에서 나와서 신통력의 성취를 갖추었다. 밧따바띠까는 네 가지 성취를 완벽하게 갖춘 공양을 올린 것이다.”(『법구경 이야기 2』, 413~414쪽)
밧따바띠까 이야기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보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결과 『법구경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은 부처님이 들려주시는 전생담이고, 그 전생담의 상당 부분을 보시에 관한 일화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보시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세속적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훌륭한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몇 배로 보답받는다! 좀 사이비처럼 들리기도 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에서 분명해진 것은 보시라는 게 말처럼 간단치 않다는 것이었어요. 공양은 공양물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공양을 올리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도 ‘기쁘고 청정한 마음’이 핵심입니다. 다른 이에게 기쁘고 청정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행위, 그 순간의 마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죠. 어쩌면 보시를 행한 자에게 돌아오는 보상도 그러한 마음의 작용이 만들어내는 파급효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