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입법자 수다
이번 주 입법자는 <늙음> 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이 장에는 아름다움의 무상함, 노쇠하고 병든 몸의 추함, 늙음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난 인연담들이 있었죠. 사실 우리가 읽은 부분이 좀 이분법적이고 교훈적이라 법구경에서 읽을 수 있는, 맥락을 놓아버린 전개가 주는 재미는 덜했지요. 문자 그대로 보면 늙음이 아름다움과 대치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들게 했구요. 손석희는 나이가 들수록 멋있어지는 정우성의 외모를 극찬하며 “인간의 내면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라고 언급했다는데 말이죠...ㅋㅋ 저도 늘 마음은 청춘이지, 아직 늙음을 사유할 때는 아니지, 하며 젊음에 대한 막연한 긍정과 늙음에 대한 회피와 두려움이 있지만, 사실 늙음은 저의 관심 주제입니다. 어떻게 나이들 것인지, 남은 삶을 어떻게 조형할 것인지 이런 문제는 늘 고민하는 지점이죠. 나이가 들 때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이 장에서 배워야겠습니다. 각설하고, 나누고 싶은 인연담을 먼저 소개해 볼께요.
미모로는 최고였던 루빠난다의 이야기입니다. 자나빠다 깔랴니 난다는 미모가 뛰어나서 ‘아름답다’라는 의미의 수식어 ‘루빠가 붙어서 ‘루빠난다’라고 불렸습니다. 루빠난다는 자신의 용모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고 이를 넘어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해요. 그런 루빠난다에게 붓다께서는 특급 처방을 하십니다.
붓다는 신통력으로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열여섯 살의 처녀를 만들어 당신에게 부채를 부치게 했지요. 루빠난다는 처녀를 보고 그만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고. 자신도 그런 미모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때 여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20대의 성숙한 여인처럼 변하더니, 중년 여인으로, 다시 살이 빠지고 허리가 기역자가 돼 지팡이 없이는 설 수 없는 할머니가 됐습니다. 루빠난다가 변해가는 여인의 모습에 깊이 상심하고 있을 때, 붓다는 그 여인을 병들게 했습니다. 쓰러진 몸에서 똥오줌이 흘러나왔고. 그녀가 죽음에 이르자 몸이 부패하기 시작하더니, 아홉 구멍에서 누런 고름이 흘러나오고, 까마귀가 몰려들고, 동네 개들이 몰려와 시체를 뜯어먹었습니다. ‘저 아름답던 여인이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렀듯이, 나의 몸도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가고 마는 것을 왜 이리 집착했던가.’ 루빠난다는 자신의 몸도 무상(無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루빠난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린 붓다께서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난다여, 그대의 몸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몸은 삼백 개의 뼈들의 무더기일 뿐이다. 시간이 되면 뼈들의 무더기는 흩어져 사라진다.”
이어서 게송을 읊었습니다.
뼈로 엮여져 있고
살과 피로 덮여저 있는
이 몸속에
늙음과 죽음
자만과 비방이 머무르고 있네. (150)
붓다께서는 왜 이렇게 직접 가상의 여인까지 등장시켜 가르침을 주려고 하셨을까요? 동양에서 몸은 수신을 위해 잘 보존해야 하는 대상이죠. 신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늙음을 문제 삼기보다 젊음의 혈기로 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오히려 염려하고 있죠.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우리 신체를 업의 소산으로 보는 것 같아요. 마음의 욕망이 몸으로 드러난다고 보는 걸까요? 이렇게 신체와 욕망을 등치시키기에, 자신의 몸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깨달음이라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이 앞서 이 자명한 이치를 알지 못하죠.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자명하다고 느껴야만 그제서야 믿고 이해하는 것이죠. 보여줘야 이치와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잘 아시기에 붓다께서도 루빠난다에게 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거겠지요.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무명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