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을 원한으로 되갚는다고
맺힌 한이 풀어지랴?
원한을 품지 않아야만
원한이 풀어지리라.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네.”
(『법구경 이야기 1』, 옛길, 168쪽)
이번 주에도 저희는 법구경을 읽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제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다섯 번째 이야기 “꼬삼비 비구들의 불화”였습니다. 저희를 매번 박장대소하게 하는 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겠다고 나선 스님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들입니다. 질투하고 원한을 품고 편을 갈라 다투는 모습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러한 정념의 파노라마가 일으킨 사건의 스케일이 역대급이었습니다.
꼬삼비의 고시따라마에는 계율을 가르치는 율사 스님과 교학을 가르치는 강사 스님이 각각 5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강사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는 뒷물 그릇에 쓰고 남은 물을 버리지 않고 그냥 나온 겁니다. 그리고 그걸 하필 율사 스님이 보고만 거죠. 율사 스님은 점잖게 강사 스님의 행동이 계율에 어긋난다는 것을 지적했고, 강사 스님은 계율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습니다.
율사 스님도 의도적으로 한 일이 아니니 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예의바르게 응답하며 일이 마무리 되는 듯했으나, 율사 스님은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강사 스님은 계율을 어기고도 계율을 어긴 줄을 모른다”라고 말을 했고, 이에 그 제자들이 강사 스님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을 비하하는 말을 해댔고, 이에 강사 스님의 제자들이 똑같이 모욕적인 말로 응수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율사 스님이 계율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사 스님을 축출하자는 결의를 하면서 다툼은 극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자 음식, 약, 가사, 거처를 후원하는 신도들도 두 파벌로 갈라졌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구니들, 스님들을 보호하는 신들, 하늘에 거주하는 신들, 지상에서 하늘의 범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범부도 두 파벌로 갈라졌”고, “이 다툼은 욕계 사천왕부터 색계 색구경천까지 알려졌다”(173쪽)고 합니다. 즉 변소물에서 시작된 갈등이 세상 사람들과 천상의 신들까지 두 파벌로 나뉘어 반목하도록 한 것이죠.
결국 이 문제도 부처님이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부처님들은 편을 갈라 싸우는 스님들을 훈계하며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려주십니다. 꼬살라 왕국의 왕자 디가우의 이야기입니다. 요는 디가우가 복수심을 내려놓자 두 왕국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요. 꼬살라 왕국은 까시의 왕 브라흐마닷따에게 점령당하고 그 과정에서 디가우의 아버지인 꼬살라 왕 디기타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던 디기타 왕은 아들에게 ‘너는 절대 원한을 품지도 말고 복수를 하려고도 하지 마라, 원한은 원한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다. 자애와 연민에 의해 원한은 사라진다’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나중에 디가우 왕자는 나중에 브라흐마닷따 왕의 측근이 되어 함께 사슴 사냥에 나섰는데, 사냥에 지친 브라흐마닷따는 디가우의 무릎을 베고 잠에 듭니다. 복수를 실행할 절호의 기회. 그러나 디가우는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여 빼들었던 칼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자애의 마음으로 복수심을 물리친 디가우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브라흐마닷따는 꼬살라 왕국을 디가우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킵니다. 한 순간의 복수심을 참아낸 디가우는 결국 두 왕국을 손에 넣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
디가우에게는 복수를 해야 할 모든 이유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은 그에게 브라흐마닷따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그가 원한을 표출한다고 한들 사람들은 그것을 지극히 정당한 행위로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당한’ ‘자연스러운’ 행동이 수많은 폭력과 전쟁을 낳고, 사람들을 자발적 예속의 상태로 내모는 게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너무나 ‘정당하다’라고 믿고 있는 분노도 결국엔 율사 스님파와 강사 스님파의 다툼을 유발한 ‘변소물 사건’처럼 넓은 견지에서 보면 참으로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어진 상황이 규정하는 바에 지배당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