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혐오감 수행은 청정도론 제 6장 부정에 대한 명상 주제, 대념처경, 염처경에서 묘지에서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9단계로 나누어 관찰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법구경 이야기⌋, 옛길, P238)
이번 주에도 저희은 법구경을 읽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저로선 함께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야사와 54명의 친구의 과거생'에 대한 이야기였답니다. 그것이 야사의 직업인지 아니면 단순히 54명의이 서로 친구가 되어 공덕을 쌓기 위해 가난하고 의지할 때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 죽으면 그 장사를 지내주고 화장하는 일을 했는지에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 화장하는 과정에서 야사는 몸에 대한 혐오감을 사로잡혀 친구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야사 왈 "벗이여, 이 시체를 보게나, 피부가 여기저기 부풀어 올라 터지는 것이 마치 얼룩 암소의 피부와 전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불결하고 더럽고 혐오스럽지 않은가."(⌈법구경 이야기⌋, 옛길, P238)
네 명의 친구들은 야사의 말을 듣고 야사와 마찬가지로 몸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또 그 친구들과 야사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자신의 지인과 가족들에게 가서 전합니다. 자신이 깨닫을 것을 자신만이 간직하는 것이 아닌 남에게도 전하므로써 말로써 또 공덕을 짓게 된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과거생에 이와 같은 공덕을 지은 젊은이들은 다음 생에서도 그와 같은 깨달음이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야사는 다음 생에 무희와 시녀들이 많은 부잣집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렇게나 누워자는 모습을 보고 몸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 출가를 합니다. 이는 과거생에 깨달음을 성취한 바가 있어 이번 생에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생의 깨달음이 이번 생에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줄곧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마음 자리에서 깨달은 것이 '결국 우리는 죽어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무용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다음 생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통해, 혹은 이러저러한 노력은 통해 부단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타인에 대해 공덕을 쌓으려는 것이 무용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사람들의 깨달음들이 다음 생에 이어진다면 그런 깨달음이 이어진 사람들의 만들어가는 세상이라니! 결국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냐가 다음에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를 결정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
또 재미있는 것이 몸에 대한 혐오감 명상인데요. 저는 명상이라면 한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하는 명상만이 명상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하는 행위 들 속에서도 명상이 가능하겠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까요. 야사는 명상을 하려고 죽은 사람의 장사를 지내주었던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에 대한 혐오감 명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까운 가족이나 나의 몸의 늙어감, 간혹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 보게 되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나이 드신 분들의 힘들어함 속에서도 한 인간의 취약함 혹은 결국 늙어서 혐오스럼게 변할 몸에 집착하는 등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명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행위들속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명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