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읽은 <법구경>에는 부처님의 고향 방문이 나옵니다. 부왕의 간청으로 부처님은 오랜만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고향방문...심상치 않습니다. 그 전조는 이미 부처님을 초대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대왕은 천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열 번이나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절단의 입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만 아라한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이지요. 다행히(?) 열 번째 사절단으로 온 부처님의 소꿉친구 깔루다이는 깨달아 아라한이 되는 와중에도 자신이 온 이유를 기억해내고, 부왕의 초대장을 건넵니다. 드디어! 부처님은 이만 명의 비구를 이끌고 고향을 방문합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했던가요...부처님은 누가 환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고향에 방문하신 뒤로도 거침없이 탁발을 하며 수행자로서의 삶을 이어나가시지요. 당황한 부왕이 따라오며 "우리 왕족 혈통에서는 걸식을 한 자가 한 명도 없다"며 뜯어말립니다. 하지만 이분이 누구십니까. 게송 한번 읊어주시자마자 숫도다나 대왕은 수다원과를 얻습니다. 뿐만아니라 양어머니이자 이모도, 왕비도 수다원과를 얻으셨죠. 고구마 줄기처럼 일가친척들을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부처님의 마지막 수확(?)은 이복동생인 난다 왕자였습니다. 그날 결혼할 예정이었던 그는 부처님의 발우를 들고 시중들다가 그만(?) 경국지색의 신부를 내버리고 비구가 되고 맙니다.
이런 연쇄적인 깨달음 행렬을 보고 있자니, 한 세대에 부처님이 나신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은 현생의 상식에 좌우되지 않으시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모두 전생담으로 풀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내 발목잡는 문제들은 사실 전생에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선을 그으며 "가르침을 닦는 이는 금생과 내생에서 행복하리라"라고 수행을 권하시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묻따' 수행권유... 그런데 이렇게 내 행동의 인과를 설명해주고 그걸 끊어내는 지혜를 말해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상식에 준해서 행동할 것을 권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부처님의 출현은 사유의 방향을 트는, 우주적 혁명이 아닐까 합니다.
악행을 저지른 자는
금생에서 슬퍼하고
내생에서 슬퍼하고
두 생에서 슬퍼한다
자기가 지은 악행을 떠올리고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