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이야기』 1권을 어느덧 절반 정도 읽었는데요. 다른 듯 닮아 있는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제게 인상 깊은 주제 중 하나는 지식과 수행에 관한 것입니다. 열네 번째 이야기인 ‘강사 비구와 수행자 비구’에는 우정 돈독한 두 친구가 등장합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에 계실 때 우연히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두 친구는 세속적 즐거움을 포기하고 비구가 됩니다.
동시에 출가를 한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요. 나이가 많은 한 친구는 교학을 배울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 곧바로 수행에 돌입합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아라한까지 성취할 수 있는 수행 주제를 받은 그는 열심히 정진해 신통력을 갖춘 아라한이 됩니다. 한편 보다 젊은 다른 친구는 교학의 의무를 이행하여 삼장에 통달하고 여기저기 삼장을 가르치고 돌아다니며 500명의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행자 비구의 제자들이 사원에 찾아와 강사 비구에게 친구의 안부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몇 번 안부를 전해 듣자 반갑던 마음은 사라지고 강사 비구는 점차 언짢은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혼자 생각합니다. “내 친구는 네 구절로 된 사구게송 하나도 외우지 못한다. 그는 비구가 되자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치고 곧바로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숲속에서 많은 제자를 불러 모은 모양이다. 그가 돌아오면 뭘 알고 제자를 가르치는지 질문해야겠다.”
드디어 강사 비구는 부처님을 뵈러 온 수행자 비구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기회를 포착한 그는 친구의 무지를 일깨우고 자신의 학식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천안으로 살펴보고 계시던 부처님께서는 강사 비구가 수행자 비구에게 못된 짓을 하여 지옥에 태어나게 될 것을 우려하시어 사원을 산책하는 체하며 두 사람에게 가서 붓다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친구에게 질문을 퍼부으려던 강사 비구는 되레 부처님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쏟아지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강사 비구는 문자를 통해서는 알 수 없고 수행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수다원도’에 관한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반면 수행자 비구는 즉시 정확하게 대답했고,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가지 도에 대한 질문에도 정확히 답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자 비구를 칭찬하며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경전을 가르칠지라도
제멋대로 지내며
실천하지 않는 자는
남의 소를 세는 목동처럼
깨달음의 열매를 맛볼 수 없네.
경전을 적게 암송할지라도
가르침을 실천하여
탐욕,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고
가르침을 여실히 알아 해탈한 이는
이 삶과 저 삶을 붙잡지 않고
깨달음의 열매를 맛보리라.”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교학의 의무’와 ‘수행의 의무’를 말씀하셔놓고, 어찌하여 마치 학문의 길에 비해서 수행의 길을 이토록 특권화하시는 걸까요? 그럴 거면 만나는 사람마다 수행 주제를 주고 숲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될 텐데요. 또 공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어느 수준에서 읽어야 할까요? 우리도 책은 던져버리고 명상을 시작하는 편이 나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지식이 단순한 지식에 국한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자신의 학식을 무기로 남을 공격하려 하고 지식을 척도로 자신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를 멸시했던 강사 비구. 그의 오만을 꼬집으려 하신 게 아닐까 싶네요. 수행에 치중하는 길에도 그 나름의 장해가 있겠지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삶에는 뚜렷한 위험이 있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어버리게 될 위험이 그것이지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