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입법자 수다
저희가 읽고 있는 부분은 제2장 불방일장 입니다. 주석을 보니, 방일하다는 것은 나쁜 행위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 욕망을 일으키는 오감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나쁜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행위를 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네요. 방일은 옳고 그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대상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 부주의한 것을 말하는 것이네요. 불방일은 방일의 반대이므로 대상에 주의 깊게 깨어있고, 항상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겠지요. 알아차림이란 마음을 오직 지금 순간에 집중시켜 몸과 마음의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으로, 수행의 핵심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배운 명상에서도 알아차림은 누누이 강조되었던 기억이 있네요.
이번에 읽은 법구경의 인연담은 사마와띠 왕비의 죽음 편입니다. 지난 시간 읽은 대목에서 마간디야는 우데나 왕의 세 번째 왕비가 되기 전에 부처님께 청혼했다 퇴짜(?)를 맞았지요. 이에 부처님께 증오심을 품고 있었는데, 사마와띠 왕비가 부처님께 공경의 예를 올리는 것을 보고 사마와띠에게 질투심이 일어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마간디야는 사마와띠가 부처님을 좋아하고 있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는 등의 음모를 꾸며 죽이려 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결국 기름 묻은 천을 기둥에 감고, 궁에 불을 질러 500명의 궁녀들과 함께 사마와띠를 죽게 만듭니다. 사마와띠와 궁녀들은 궁이 불에 타는 동안에도 당황하지 않고 명상을 하며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간디아의 음모는 결국 발각되었고, 대노한 왕은 마간디아를 처참히 죽이도록 명령하였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후 부처님께서 게송을 설하셨지요.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은
불사에 이르는 길이고
게으르고 방일하게 지내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네.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이는 죽지 않고
게으르고 방일하게 지내는 자는 죽은 자와 같네.(게송 21)
지혜로운 이는
이와 같이 분명히 알아
주의깊게 알아차리는 성인의 왕국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게송 22)
지혜로운 이는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늘 노력하며 항상 최선을 다해
얽매임의 위험이 사라진
으뜸가는 열반을 만나리라.(게송 23)
부처님께서는 ‘마음 챙김을 하지 않으면 백년을 살더라도 죽은 자들이다, 마간디아는 살아 있을 때조차 죽은 자였다, 마음 챙김을 확립한 이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사마와띠 왕비는 자애심이 가장 뛰어난 여신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에서 이토록 공덕을 쌓은 사마와띠와 시녀들은 왜 불에 타 죽은 것일까요? 늘 그렇듯 ‘전생의 과보’ 때문인데요, 전생에 물놀이를 나온 처녀들이 어느 벽지불이 풀더미 안에서 멸정에 들어 있는 것을 모른 채 풀더미에 불을 붙여 몸을 녹였지요. 뒤늦게 벽지불이 풀더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들은 벽지불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장작을 모아 다시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처음 행동은 나쁜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두 번째 행동은 나쁜 의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과보를 형성한 것이죠. 다행히 벽지불이 멸정에 들어 있었기에 불에 의한 손상은 없었다고 합니다.
과거생은 이야기로는 흥미롭지만 매우 어려운 대목인 것 같아요. 저희끼리는 이해해보려고 이숙과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보고, 귀동냥한 불교 지식을 모두 패치워크 하고 있습니다만. 이숙(異熟)이라는 것이 선(善)을 행한 업이 선 그대로, 악행(惡行)을 한 업이 악행 그대로 오는 게 아니라 즐거움과 고통으로 다르게 온다고 했는데, 전생담을 읽다 보면 사마와띠 경우처럼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설왕설래 하다 잘 모르겠다로 끝나네요.
‘전생의 과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도 비슷한 것 같은데, 또 다른 것 같죠? 이번 주엔 이 얘기를 좀 나눴어요.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것. 내가 지금 고통스러운 것은 과거의 내가 지었던 어떤 악업의 과보이니까 이걸 속죄하고 갚아야 한다는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에게 온 것은 받는다는 자세가 있는 것 같아요. 전생의 업은 지금 태어난 것으로 청산하고, 그걸 갚기 위한 가책이나 죄의식을 가지지는 않는 것이죠. 대신 지금부터 한 걸음씩 자기 삶을 살아 깨달음에 다가가면 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자기 깨달음을 통한 자기구원에 이르는 길, 이것이 강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는 데는 지위와 빈천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도요. 사마와띠 왕비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왕비의 하녀인 쿠줏따라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먼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대로 전해주는 스승이 되어, 왕비와 500명의 하녀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운 것이죠. 방일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알아차리며 사는 것이 누구든 자기 존재를 넘을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 공부를 하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귀동냥 불교지식 패치워크...정말 맞는 표현입니다 ㅎㅎ 온갖 것을 동원해도 부처님의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에 대항할 수 없는 입법자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