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쌀쌀하지만, 그래도 황사도 오고 꽃도 피는 걸 보니 정말 봄입니다!
에픽테토스 낭송은 쭉쭉 나아가고 있는데요. 한 달이 지난 지금, 2권 중반에까지 다다랐습니다.
이번주에는 특히 스토아적 세계시민주의가 눈에 띄었는데요.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스토아 철학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말할 때 유기체적인 모델을 가져오곤 합니다.
우리 사지의 부위들이 각기 다른 특성과 용도를 구현하듯 우리 역시 우주의 개체로서 필멸의 삶을 삽니다.
저의 궁금증은, 이러한 자기 인식이 어떻게 긍정과 맞닿을 수 있는가였습니다.
"
너는 세계의 시민이자, 세계의 부분이며, 게다가 종속되는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니라 네가 세계의 신적 통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또 그것에서 뒤따르는 모든 것에 관해 반성할 수 있는 한, 너는 주도적인 부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이런 가르침은 '반성' 혹은 '인상 능력'을 통해 부분인 자신을 전체와 통일체로 느끼고 사유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외적인 정념들 혹은 질료적인 것들에 대한 끌림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죽음을 가져온다고 해도요.
문은 열려 있고, 이 삶이 품위 없고 예속적일 뿐이라면 언제든 문 밖으로 나갈 수 있다(자살)는 구절들은 곰곰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다만, 윤리에 있어서 주사위 놀이를 예로 든 부분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무엇(어떤 수)이 떨어질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떨어지는 것을 조심스럽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그것은 이제 내 임무인 것이네.
끝까지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질문을 품고 음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픽테토스 강의 2권
1장 대담함은 신중함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나쁨이 의지의 나쁜 발휘에 있다면, 신중함이 발휘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지 의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에 관련해서이고, 그리고 의지의 영역 밖에 있으며 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대담함을 발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에 관련해서이기 때문이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동시에 신중하고 대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며, 제우스에 맹세코, 신중함 때문에 대담하게 될 것이네. 또 참으로 나쁜 것들에 관련해서 신중함을 발휘함으로써,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들에 관련해서 우리는 대담하게 행동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266쪽)
우리는 본래적 대담함을 뻔뻔함, 무모함, 경솔함, 몰염치로 간주하고, 우리의 본래적 신중함과 자존심을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찬 비겁함과 비열함으로 간주한다네. 왜냐하면 누군가가 신중함을 의지의 영역으로, 다시 말해 의지의 행위의 영역으로 옮기게 되면, 곧장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바람과 더불어, 그와 동시에 무언가 회피하고자 원하는 것을 회피하는 자신의 능력 안에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 반면, 우리가 이 신중함을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로 옮긴다면, 회피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들로 향하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 불안정, 동요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 즉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고통이 아니라, 죽음이나 고통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인 것이네. 그렇기에 우리는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명예스럽게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을 찬양하는 것이네.
그러므로 우리의 대담함은 죽음을 향해야 하고, 신중함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네. 다시 말해 죽음에 관한 판단을 형성하는 데에서 부주의, 무시, 무관심을 보이면서, 죽음에 직면해서 도피하고 있는 것이네.(267~268쪽)
그러면 이 가르침의 열매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적합해야만 하는 바로 그것은, 평정심(마음의 평화), 두려움 없음, 자유라고 할 수 있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자유인만이 교육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다중이 아니라, 오히려 교육받은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철학자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네.(270쪽)
이 가르침들을 훈련하고 항상 가까이에 놔두어서, 무엇에 대해 대담하게 마주해야만 하고 또 무엇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네. 다시 말해 의지(프로하이레시스)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관련해서는 대담해야만 하고, 의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에 관련해서는 신중하게 행해야만 하는 것이네.(272쪽)
누가 소크라테스만큼이나 많이 썼는가?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자신의 판단을 검토하거나, 번갈아 가며 자신과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직접 캐묻고 또 자신을 검토하곤 했으며, 항상 어떤 하나의 특정한 선개념을 실천적인 방으로 적용해 보고자 시도했던 것이네.(273쪽)
네가 자랑스럽게 떠벌려야 할 것은, 오히려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네. ‘내가 어떻게 욕구하는 것을 얻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지를 보세요. 내가 어떻게 회피하고 싶은 것에 결코 빠져들지 않는지를 보세요. 내 앞에 죽음을 가져오세요.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가져오고, 투옥을 가져오고, 치욕을 가져오고, 단죄를 가져오세요.’ 이것이 젊은이가 학교를 떠날 때 내놓는 적절한 과시이어야 하네.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라.(274쪽)
즉 우리는 동시에 대담하고 신중해져야만 하며, 의지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관련해서는 대담해져야 하고, 또 의지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에서는 신중해져야 하는 것이네.(275쪽)
2장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진리가 있는 곳과 본성이 있는 곳, 거기에 신중함이 있다네. 진리가 있는 곳, 거기에 대담함이 있고, 그곳에 자연 본성도 있는 것이네.(278쪽)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자 원하면, 기다려라. 십자가가 너희에게 찾아올 것이네. 그러나 이성이 그 소환에 순순히 따르고 [재판관에게] 설득력 있는 말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선택한다면, 항상 너 자신의 고유한 좋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네.(280쪽)
3장 철학자들을 추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지만 인생과 관련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어떤 경우에는 어떤 것을 두고 나는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다른 경우에는 같은 것을 두고 나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 내가 추론의 경우에 그랬던 것과 반대되는 것, 즉 무지와 무경험이네.(283~284쪽)
5장 관대함과 조심성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질료적인 것들(사물들 자체)은 선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사용은 결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굳건함(견고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부주의와 지각없는 행동에서 멀어질 수 있는 조심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모방할 수 있다면 충분하네. 계수기(計數器)는 선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주사위도 선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네. 무엇(어떤 수)이 떨어질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떨어지는 것을 조심스럽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그것은 이제 내 임무인 것이네. 그러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나의 주요 임무는 이런 것이다. 즉 사물들을 구별하고, 사물들 간의 분리를 확립해서, ‘외적인 것들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프로하이레시스)는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어디에서 좋음과 나쁨을 추구하는가? 나 자신 안에, 내 것 안에’라고 말하는 것이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속하는 것에 관련해서는 좋음과 나쁨, 유익과 해로움이란 말과 그와 같은 다른 어떤 말들을 결코 사용하지 말게나.(289~290쪽)
이 두 가지 마음 상태, 즉 질료적인 것들에 의해 끌림을 느끼는 사람의 조심성과 그것들에 무관심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평정심을 하나로 묶고 결합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네. 그러나 언제나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항해를 떠나야 했던 거소가 같은 것이네.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키잡이, 선원, 날짜, 시기를 선택하는 것. 그 후에 폭풍이 우리에게 몰아쳤네. 그런데 왜 그것이 나에게 관심이 되어야 하지? 내 역학은 완결되었는데. 그것은 이제 다른 누군가의 과제, 키잡이의 과제이네.
그러나 바야흐로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네.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네. 즉 태어난 것은 또한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부르짖지도 않고, 신을 원망하지도 않은 채 물로 빠져 죽는 일이네. 난 영원하지는 않지만, 한 인간이요, 한 시간이 그날의 부분인 것처럼 우주(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네.(291쪽)
공을 다루는 경험 많은 선수들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들 중 누구도 공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어떻게 던지고 잡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네. 이에 따라 이것에서 선수의 민첩성, 기술, 빠르기 및 좋은 판단력이 입증되는 것이네.(292쪽)
우리는 어떤 외적 물질들에 관련해서 자신의 기술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물질 자체에 집착하지 않은 채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대해 우리의 기술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네. 이와 마찬가지로 직물을 짜는 사람은 양털을 생산하지 않지만, 그가 받을 수 있는 양털이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네. 다른 이가 너에게 양식과 소유물을 주되, 너의 보잘것없는 몸 자체와 함께 그것들을 마찬가지로 다시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것이네.(294쪽)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역할을 완수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완수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당신입니다’(298쪽)
6장 선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에 대하여
무엇이 너 자신의 것이고 무엇이 다른 사람의 것인지를 항상 기억한다면, 너는 결코 곤경에 빠지지 않을 것이네. 그래서 크뤼시포스가 이렇게 잘 말한 것이네. ‘그 결과들이 나에게 불분명하게 남아 있는 한, 나는 항상 자연 본성에 일치하는 그런 것들을 획득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을 고수했네. 신께서 친히 나를 만드실 때 자연에 일치하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지. 그러나 실제로 내가 이 순간에 병에 걸리는 것이 운명 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것에 대한 충동마저도 가졌을 것이네. 발 또한, 이해력을 가졌다면, 진흙투성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네.’(300~301쪽)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죽지 않음은 저주임을 알아야 하네. 그것은 여물지 않는 것과 수확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말이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동일인, 수확되는 존재이면서 수확되는 것을 동시에 자각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이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우리는 말 타는 사람이 말들에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인간임이 무엇인지를 연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네.(301~302쪽)
8장 좋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조상은 도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분명하지? 그렇지 않네. 그는 ‘내 말은 돌이킬 수도 없고, 결코 속이지도 않는다’고 공포하려는 사람에게 걸맞게 흔들림 없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네.(317쪽)
10장 어떻게 여러 가지 이름에서 적합한 행동(의무)을 발견할 수 있는가?
네가 누구인지 생각하라. 첫째로 인간이다. 즉 의지(프로하이레시스)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의지에 종속되지만, 의지 자체는 예속할 수도 종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소유를 통해 네가 무엇으로부터 구별되는지를 생각하라. 너는 짐승으로부터 구별되고, 양으로부터 구별된다. 이것에 더해서, 너는 세계의 시민이자, 세계의 부분이며, 게다가 종속되는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니라 네가 세계의 신적 통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또 그것에서 뒤따르는 모든 것에 관해 반성할 수 있는 한, 너는 주도적인 부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325~326쪽)
네가 젊다면, 젊다는 것을 기억하라. 늙었다면 늙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들의 각각을 신중하게 고려해보면, 이러한 이름들 각각은 그것에 적합한 행위들을 항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떠나가서 네 형제를 욕한다면, 네가 누구며 네 이름(정체성)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잊었다고 너에게 말하겠다.(328쪽)
마일 네가 수치심과 품위, 온화와 같은 성질을 잃는다면 그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텐가?(328쪽)
11장 철학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철학의 출발점은, 최소한 마땅히 해야만 하는 방식대로 철학에 전념하고 또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인간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함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네. 실상 우리는 직각삼각형, 음악에서 4분음이나 반음에 대한 자연적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왔지만, 어떤 종류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들 각각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므로, 그런 이유로 그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네. 이와 달리,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적절함과 부적절함, 행복, 우리에게 적합한 것(의무)과 우리의 몫으로 부과된 것(책임),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만 하는 것과 우리가 행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에 대한 본유적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우리 중에 누가 세상에 들어왔는가?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는 이렇나 명사들을 사용하여, 또 우리의 그것들에 대한 ‘선개념’을 개별적인 사례들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네.(332~333쪽)
자, 그렇다면 개인적인 의견보다 더 높은 무언가로 나아가 보기로 하자. 그게 무엇일 수 있을까? 철학의 출발점을 살펴보는 것이네. 즉 그것은 사람들 서로 간에 상충하는 의견을 갖고 있음을 깨닫고, 그 상충의 기원에 대해 탐구하며, 단순히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무엇인가 판단 기준을 발견하는 것, 예를 들면 중량의 경우에는 저울을, 예를 들면 사물이 똑바른지 굽었는지를 결정하는 목수의 축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네.(335쪽)
의지의 영역과 의지의 영역밖에 있는 것, 즉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있지 않은 것의 구분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철학하는 이유라고 할 때 저는 그 선개념이 좀 헷갈립니다. 이성적인 것, 도덕적인 것이 먼저 주어져 있는 것처럼 읽히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구분도 모든 것이 연결되고 즉각적으로 비교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참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요. 에픽테토스를 읽다보면 자연의 힘의지처럼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 인간의 한계인 본질적인 무능을 깨달아 진리 자체를 '믿어라~'느낌이 확 나기도 하고요.^^ 아직 2편이니 잘 읽어가야죠. 민호샘~ 세심한 후기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