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도 낭송은 계속되고, 어느새 <에세>는 한 달 분량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낭송의 기쁨과 슬픔, 수고와 보람을 을 이어갈 다음 텍스트를 물색중인데요. 마침 에픽테토스 강의가 번역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몽테뉴는 주옥 같이 귀중한 문장들을 전해주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우리의 옹졸한 심리와 정념을 콕콕 뽑아내는지... 자기해부에 있어서의 기원을 보는 듯합니다.
가령, 샘들께서 필사해주신, 이런 문장들은 혼자 간직하기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앎을 관철시키고 전하고자 하는 이 습성은 얼마나 뿌리깊은지요...(니체는 인식 역시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습니다만)
"사람들은 보통, 자기 견해가 세상에 통용되게 하려는 일에 가장 단호하다. 일반적 방법으로 안 되면 우리는 명령과 강제, 칼과 불을 동원한다."
"
진실과 허위는 얼굴도 비슷하고, 태도나 맛, 거동도 닮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게 되면 그것을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자선 행위라 생각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 이야기를 받아들이려 할 때 있을 만하다 싶은 저항을 다독거리고 결함을 보완하려 하면서, 필요하다 싶은 만큼은 스스로를 지어낸 말을 덧붙이는 것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예리함의 원천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진솔한 실험/시험인 '에세'의 훈련 덕분이겠죠.
그 렌즈가 얼마나 치밀한지를 잘 보여주는 문장이 있습니다.
"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보다 더 명백한 괴물과 기적을 본 적이 없다."
그럼 필사를 보시겠습니다.
11장 절름발이에 관하여
포도주는 그 일급 품질을 아는 이에게 더 맛좋은 것은 아니다.(440쪽)
사람들은 사실 여부는 스쳐 가고 애를 쓰며 결과를 추론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그러나 그들이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 정말 일어났는가?”여야 하리라. 우리의 이성은 다른 세계들을 100개라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원리와 구성을 찾아낼 능력까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슨 소재도 토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해 보라고 그냥 둬 보라. 그것은 충만한 곳만큼 텅 빈 곳에도, 질료 위에만큼 허무 위에도 곧잘 건축을 하니,
연기도 육중하게 만들 수 있다.
_페르시우스(441쪽)
진실과 허위는 얼굴도 비슷하고, 태도나 맛, 거동도 닮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 생각에 우리는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데 느슨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 칼에 찔리게 하려고 부러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허공에 섞여 들기를 좋아하니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공과 닮아 있는 탓이다.(442쪽)
무에서 극미한 것까지의 거리는 극미한 것에서 극대한 것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다.(442쪽)
처음에는 개인적 오류가 공중의 오류를 만들지만 나중에는 공중의 오류가 제 차례가 되어 개인의 오류를 만들어 낸다. 이런 식으로 손에서 손을 거치며 재료가 더해지고 꼴이 갖춰지면서 전체가 완성된다. 그래서 가장 멀리 있는 증인이 가장 가까이 있는 증인보다 더 잘 알게 되고, 소문을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이 처음 듣는 사람보다 더 잘 설득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진행과정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게 되면 그것을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자선 행위라 생각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 이야기를 받아들이려 할 때 있을 만하다 싶은 저항을 다독거리고 결함을 보완하려 하면서, 필요하다 싶은 만큼은 스스로를 지어낸 말을 덧붙이는 것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442~443쪽)
사람들은 보통, 자기 견해가 세상에 통용되게 하려는 일에 가장 단호하다. 일반적 방법으로 안 되면 우리는 명령과 강제, 칼과 불을 동원한다. 진실을 판별하는 최상의 시금석이 다수가 무엇을 믿느냐가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다중의 무리 가운데 얼간이가 현자들보다 그 수가 훨씬 많은 판에 말이다.(443쪽)
그렇게 널리 알려진 경이로운 일들이 그 출발이 얼마나 공허하며 그 동기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알고 나면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문제의 탐색을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거창한 이름에 마땅한, 강력하고 무게 있는 원인과 동기를 찾으려 하는 동안에 진짜 원인과 동기는 눈앞에서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소하기 때문에 우리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런 작업에는 정말이지 아주 신중하고 주의 깊으며 섬세한 탐구자, 불편부당하고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이 모든 기적과 기이한 사건들이 내 앞에서는 모습을 감춘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보다 더 명백한 괴물과 기적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시간이 가고 익숙해지면 그 어떤 낯선 것도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더 찾게 되고 더 알아 갈수록 나의 기형성은 더 나를 놀라게 하며 나는 내 속을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444~445쪽)
이 세상의 수많은 속임수는 아니 더 과감하게 표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속임수는 우리의 무지에 대해 고백하기를 우리가 두려워하도록 세상이 가르치기 때문에,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강제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446쪽)
나는 우리 견해의 무모함을 부드럽게 하고 완화시키는 말들, 즉 ‘어쩌면’, ‘어느 정도는’, ‘어딘가’, ‘사람들 말로는’, ‘내 생각에는’ 등등의, 그리고 그 비슷한 표현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만일 어린애들을 키워야 했다면, 단언하기보다는 캐묻는 이 같은 방식의 대꾸를 그 애들이 입에 올리게 했으리라. ‘그게 무슨 말인데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그럴 수 있겠네요.’ ‘그게 사실인가요?’하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들 하듯이 열 살 되는 애들이 박사 행세 하는 것보다는 예순이 되어도 견습생의 말투를 간직하게끔 말이다.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무지를 고백해야 한다. 이리스는 타우만티스의 딸이다. 놀람은 모든 철학의 기초이며, 탐구는 그 과정이며, 무지는 그 결말이다. 그러나 참으로 명예나 용기에 있어서 조금도 지식에 뒤지지 않는 강력하고 담대한 어떤 무지가 있으니, 그 무지를 얻기 위해서는 지식을 얻는 것 못지않은 지식이 필요하다.(447쪽)
내가 사는 지역의 마녀들은 새로운 저자가 그네들의 망상의 실체에 대해 논할 때마다 목숨이 위험해진다(448쪽)
우리의 생명이란 이 초자연적이고 공상적인 사건들을 확증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쓰이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다.(450쪽)
우리 인간 중 한 사람이 살과 뼈를 가진 몸 그대로, 저승에서 온 혼령에 의해 빗자루를 타고 벽난로 굴뚝을 따라 날아갔다고 하는 것보다는, 살짝 이상해진 우리 정신의 회오리바람 때문에 우리의 이해력이 제자리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더 자연스러운가? 내면에서 생겨나는 우리 자신의 미망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이니 외부에서 오는 알지 못할 미망까지 찾아 나서지는 말자.(450~451쪽)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 나는 그것이 바로 당시에 내게 떠오른 생각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 생각이란 변덕스럽고 동요하는 것이라는 점 말고는 어떤 보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에 대해서고 한담하듯 이야기하며,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고로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들과 달리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 고백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키케로)(453쪽)
우리의 이성은 때로 사실을 앞서가며, 그것이 누리는 심판의 영역은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어 허공 자체나 비실체에 대해서까지 판단을 내리곤 한다는 것 말이다. 온갖 종류의 몽상에 이유를 만들어 내는 우리 창의력의 유연성 말고도, 우리의 상상력은 몹시 하찮은 겉모양에서 비롯한 잘못된 인상들도 마찬가지로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455쪽)
견유파 철학자 한 사람이 안티고누스 왕에게 말했다. “내게 은화 한 드라크마를 주시오.” 그가 답하기를 “그것은 왕이 내릴 만한 선물이 아닐세.” 했다. “그렇다면 한 탤런트의 금을 주시오.”라고 하자 왕은 “그것은 견유파 철학자가 받을 만한 선물이 아닐세.”라고 답했다.(456쪽)
인간 정신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적개심에서건 경쟁심에서건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 정신이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견해를 갖게 했다. 한쪽에서 앎에 대해 극단으로 갈 때, 다른 쪽에서는 무지에 대해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사에 절제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아니면 멈추기를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게끔 말이다.(457~458쪽)
12장 외모에 관하여
우리는 인위에 의해 날카롭게 되고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 말고는 우아함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연스러움과 단순함 아래 흐르는 우아함을 우리네 거친 시선은 쉬 놓치고 만다. 그러나 거기에는 섬세하고 숨겨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이 은밀한 빛을 찾아낼 수 있으려면 잘 씻겨진 맑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네 식으로 하자면 자연스러움은 어리석음의 사촌이요, 비난받을 자질이 아니던가? 소크라테스는 자기 영혼을 자연스럽고 평범한 흐름 속에서 움직이게 한다. 농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여자들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 그가 입에 올리는 것은 마부, 목수, 신기료 장수, 석공들 말고는 없다.(459쪽)
우리는 학문이 추켜올리지 않는 생각들을 무엇이나 진부하고 저급하다 여기며, 전시하고 장엄을 보여야만 풍요롭다고 여긴다. 우리의 세상은 오직 과시만을 평가헤게 만들어졌다.(460쪽)
어린애의 순수한 생각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변질시키거나 늘어 빼지 않고도 거기서 출발해 우리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결과들을 빚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는 우리 영혼을 고양된 상태로도, 풍요로운 상태로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건강한 상태로, 그러나 아주 힘차고 완벽한 건강을 가진 상태로 묘사한다. 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원칙들, 이 일상적이고 범속한 생각들을 통해 그는 동요되지도 격앙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금껏 있어 본 중 가장 정연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힘찬 신념과 행동과 도덕을 확립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허송세월하는 인간의 지혜를 지상으로 끌어내려와 인간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그 가장 정산적이고 수고로우며 또한 가장 유익한 자기 역할을 하게 해 준 것도 바로 그 사람이다. 판관들 앞에서 자기를 옹호하는 그를 보라, 전쟁의 위험들 속에서 그가 어떤 이유를 들어 자기 용기를 일깨우는지, 중상모략과 폭정과 죽음에 맞서 자기 아내의 고약한 성미에 맞서, 그가 어떤 논거로 자신의 인내심을 단련하는지 보라. 거기에는 기예와 학문으로부터 빌려 온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단순한 사람들도 자기들의 수단과 자기들의 힘이 바로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본다. 더 뒤로 물러서고, 더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지를 인간 본성에 보여 줌으로써 그는 그것이 깨어나도록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요롭지만, 세상은 우리더러 남이 가진 것에서 빌려 오도록, 남의 것을 훔쳐 오도록 교육시킨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외부의 낯선 것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매사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 필요한 정도에서 멈추는 것을 하지 못한다. 쾌락도 부유함도 권력도 그는 자기가 안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팔을 벌린다. 인간의 탐욕은 절제를 모른다. 알고자 하는 호기심 역시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지식의 대상이 넓어지는 만큼 지식의 유용성도 넓어진다고 여기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도나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보다 훨씬 더 큰 일감을 스스로에게 마련해 놓는다. “우리는 배움에 있어서도 다른 무엇에서나 마찬가지로 무절제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키케로) 아그리콜라의 어머니가 지나치게 들끓는 자식의 학문 욕구를 억누른 일에 대해 타키투스가 칭송한 것은 옳다. 명철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인간의 다른 소유물과 마찬가지로 학문도 타고난 고유의 허영과 약점을 잔뜩 지녔고 값도 비싸게 드는 소유물이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음식 혹은 음료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이야 사고 난 다음 용기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며, 집에서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 양을 어느 시간에 먹고 마실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이란 처음부터 우리 정신 말고는 다른 곳에 담아 둘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사는 자리에서 동시에 삼키는 것이며, 시장에서 나오면서 이미 오염되거나 혹은 개선된 상태가 된다. 어떤 학문은 우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되레 거북하게 하고 둔하게 만들며, 다른 어떤 학문은 또 우리를 치유하는 듯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독을 주입하는 것들도 있다.
사람들이 순결과 청빈, 금욕을 맹세하듯이 어떤 곳에선가는 경건하게 무지를 서원하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뻤다. 책을 파고들게 자극하는 저 탐욕을 무디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뭘 좀 안다고 여길 때 우리를 기분 좋게 간질이는 저 자기 만족의 쾌감으로부터 영혼을 떼어 놓는 것은 우리의 무절제한 욕망을 벌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정신의 청빈을 덧붙이는 것은 청빈의 서원을 풍요롭게 완수하는 일이다.(461~463쪽)
자연이 준 앎을 넘어서는 저 모든 학문이란 다소 공허하고 군더더기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짐이 되거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셈이다. “건강한 정신은 대단한 학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세네카) 그것은 칠칠맞지 못한 하인이 공연한 흥분 상태인 듯, 우리를 섬겨야 할 정신이 과도하게 열에 들떠 있는 상태이다.(463쪽)
끔찍한 전쟁이다! (...) 그것은 반란을 치유하러 왔다 반란으로 가득해지며, 불복종을 벌하러 왔다 불복종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법을 옹호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 그 자신의 법에 맞서 반란군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의술이 질병을 나르고 있으니,
치료법이라고 내놓는 것에서
우리 병은 독을 얻는다.
_무명인
치료한답시고 병은 더 악화되고 깊어 갈 뿐.
_베르길리우스
우리네 사악한 광기가 정의와 불의를 뒤섞었으니
신들의 은총이 우리를 떠나는구나.
_카툴루스(467~468쪽)
우리 나라 군대는 이제 외국 용병이라는 시멘트 없이는 결합도 유지도 안 된다. 프랑스인들만 가지고는 더 이상 확고하고 규율 있는 군대 조직을 만들 수 없다. 이 무슨 수치란 말인가! 용병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정도의 규율 말고는 없는 것이다.(468쪽)
야심에 얼마나 많은 저열함과 소심함이 깃들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비천함과 굴종을 통해야만 야심이 그 목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는 것은 내게 즐거움이다.(468쪽)
오래 겪다 보니 습관이 되고 습관은 동의와 모방을 낳는다. 이 땅에 고약한 천품의 사람들이 많았더도 그들이 선하고 넉넉한 이들을 망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행여 운명의 여신이 우리에게 이 나라의 건강을 되돌려 주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는 그것을 맡길 만한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기 어려우리라.
비틀거리는 한 세대를 구하러 어떤 젊은이가 오고 있으니
적어도 그를 방해하지는 말 일이로다.
_베르길리우스(468~469쪽)
플라톤에 따르면 극단적인 유형의 불의란 불의한 것이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때를 말한다.(472쪽)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나 자신과 나의 역경을 나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었으며, 설혹 운명의 여신이 어쩌다 나를 차갑게 대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매달리고 더욱 가까이 나를 향해 서면서 더욱 강하게 나를 나 자신의 호의에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두고서든 사람들은 자기 것은 아껴 두고 밖에 있는 버팀목을 찾아 몸을 던지지만, 스스로를 무장시킬 줄 아는 이에게는 자신이 가진 버팀목이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하고 유일하게 강력한 것이다.(475쪽)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나 자신을 지키고 외부의 것들로부터 나를 떼어 놓으라고 가르치고 있다.(476쪽)
곤경은 내가 더 나쁜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켰다. 운명의 여신이 돕는다면 그리고 내 성품의 됨됨이로 보아 내게는 그런 어려움이 맨 나중에나 오리라 기대했음에도 이 폭풍우에 맨 먼저 타격을 받은 쪽에 속했지만, 그래도 그 덕에 나는 일찍이 내 삶의 방식을 제한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비하는 것을 배웠다. 진정한 자유란 자기를 향한 완벽한 통제력이다. “진짜 권력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데 있다.”(476쪽)
그러니 이 붕괴라는 것은 평정 속에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기까지 하던 내 양심의 도움이 있었던 까닭에, 나를 쓰러뜨리기보다는 더 바짝 정신 차리고 있게 했으며, 또 나는 나를 자책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온전한 불행도 온전한 축복도 내리지는 않는 까닭에 내 건강은 이 시기 내내 평소보다 더 잘 유지되었다. 건강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건강을 가지고 할 수 없을 일도 거의 없었다. 건강은 내게 내 속의 지혜의 물길을 열 수 있게 해 주었고, 더 깊은 상처를 쉬 만들어 냈을 일격에 앞서 내가 먼저 손을 뻗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고통을 참는 동안 나는 내가 운명의 여신에 맞서 어딘가 꿋꿋하다는 것을, 나를 말안장에서 떨어지게 하려면 대단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운명의 여신의 화를 북돋워 그녀가 나를 더 세차게 공격하도록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의 하인이며, 그녀에게 호소하려 두 손을 내민다. 하느님이 보호하사 제발 그녀가 만족해하기를! 내가 그녀의 공격을 느끼냐고? 물론 그렇다. 슬픔에 사로잡히고 짓눌린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그들을 어루만지는 어떤 작은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미소 짓게 되듯이, 나 역시 충분히 나를 장악할 힘이 있어서 나의 일상적 상태를 평화롭게 만들고 또 고통스러운 생각들의 짐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그러나 이따금 나를 공격하는 불쾌한 생각들에 맞서 싸워 쫓아내 버리리라 채비하는 동안, 그 생각들이 나를 물고 있도록 놔두기도 한다.(478~479쪽)
우리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학문이 주는 가르침은 대부분 굳건함보다는 겉치레이며 내실이기보다는 과시용이다. 우리는 대자연을 버렸으며, 그에게 선생 노릇을 하려 드는데, 우리를 그토록 운 좋게 또 안전하게 이끌어 온 것은 대자연이 아니던가. 하지만 대자연의 가르침의 자취들이나 대자연의 모습 중 무지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것들은 저 거친 시골 사람들 무리의 삶 안에 새겨져 있으니, 학식은 자기 제자들에게 의연함과 무구함과 평정함의 모형을 제시하기 위해 매일매일 그들에게 가서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멋진 지식을 그토록 가득 지닌 사람들이 저 배운 것 없는 단순함을 모방해야 하는데 그것도 덕성의 가장 초보적인 행위들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나, 우리의 학식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크고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가장 유용한 가르침을 바로 짐승들에게서 배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우리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기를 것인가, 어떻게 정의를 지탱할 것인가를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허약성과 관련된 독특한 징후이다.(482~483쪽)
인간은 대자연을 마치 향수 제조인들이 유향유(有香油)에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수많은 논변과 외부에서 불러온 생각들을 대자연에 섞어 놓아 대자연은 이제 가변적이 되고 각자의 의향대로 이해되는 바가 되어 변함없고 보편적인 그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니, 우리는 편견도 부패도 의견의 다양함도 모르는 짐승들에게서 대자연에 대한 증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록 짐승들이 항상 자연의 길만을 정확히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길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주 미미해서 당신은 언제나 대자연의 바퀴 자국을 알아보게 된다. 손으로 끌고가는 말들이 뛰어오르기도 하고 이리저리 활보하지만 그것은 고삐 길이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렇게 해 봐야 항상 자기를 끌고 가는 사람의 발길을 따라가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냥매가 날아오르려 하더라도 항상 실 끝에 매달려 있는 것과도 같다. “유배와 고문, 전쟁과 질병과 난파를 명상해 보라, 그리하여 어떤 불행도 그대를 애송이로 여기지 않도록.”(세네카)
사람의 천성에 가해지는 이 모든 병들을 미리 상상하려고 하고, 어쩌면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저 병들에 맞서 그토록 애를 써 가며 미리 준비하려고 하는 이 기이한 욕망은 무엇에 소용되는 것일까? “고통을 맛볼 가능성은 실제 고통만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세네카) 칼의 일격이 내려치는 것을 느끼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갈리는 바람결이며 고함 소리가 우리를 후려친다. 혹은 왜 당신은 가장 심한 열병 환자처럼―확실히 그것은 열병이니 말이다―운명의 여신이 어느 날 우리에게 그것을 겪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부터 당신에게 채찍질을 해 달라고 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왜 크리스마스 때 필요할 것이라는 이유로 성 요한 축일부터 털가죽 외투를 입으려 드는 것인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 특히 가장 극단적 불행을 과감하게 경험해 보라. 그것을 겪어 보고 그리고 완전한 자신감을 얻으라고 그들은 말한다.(483~4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