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에세>는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몽테뉴의 글귀들은 점점 더 힘 있고 아름다워지고 솔직해지는 것 같습니다. 뭉클하다고 말하면 오바일까요...
이토록 치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상과 일상의 활동이 분리 없이 밀착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몽테뉴가 뿜어내는 건강함 같습니다. 이런 말을 서슴없이, 당당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느껴집니다.
"
나 자신을 탐구하는 것 말고 다른 직업이 없는 나는 내 안에서 한없는 심연과 무한한 다양성을 보고 있으며, 내가 배움을 통해 얻은 결실이 있다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몸소 체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길게 이어진 12장 '외모에 관하여'에서는 아름다움의 문제 뿐 아니라 죽음, 삶에서의 훈련, 운수의 중요성, 믿음이 아닌 공들인 탐구의 중요성 등 온갖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3장 '경험에 관하여'에서는 행위를 규정짓고 처벌하는 법이 얼마나 허술하고 엉망인 권위인지를 비웃으며, 경험과 해석과 존재에 수반되는 변화무쌍함에 주목합니다. "
삼라만상의 모습에 담긴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든다면 바로 다양성과 상이함이다."
이번에도 귀중한 문장 필사들이 많이 모였는데요. 이제 이 텍스트와의 만남도 얼만 남지 않아서인지 더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그럼 문장들 보시겠습니다!
그대 고약한 운명을 맞아들이고 예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 비참해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것들이 그 스승[세네카]이 한 이야기였다.
불행의 모든 차원을 우리에게 정확히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철학은 분명 우리에게 적잖은 도움이 된다.
염려와 두려움은
우리 심장과 두뇌를 깨워 준다.
_베르길리우스
만약 불행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 감각이나 의식이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안타까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을 실제 겪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옛날 어떤 명석한 작가가 분명하게 말했듯이, “우리 감각은 육체의 고통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퀸틸리아누스)(485쪽)
우리는 죽음을 염려하느라 삶을 음울하게 만들고, 삶을 염려하느라 죽음을 어지럽힌다. 삶은 우리를 근심에 잠기게 하고 죽음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우리는 죽음에 맞서서 우리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순간적인 일이니 말이다. 후유증도 골칫거리도 남기지 않는 십오 분 정도의 인고를 위해 무슨 특별한 교훈이 필요하겠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무장한다.(486~487쪽)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가 몰랐다고 하면, 죽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거나 삶의 마지막 부분이 그 전체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만일 한결같고 평정한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죽을 수도 있으리라. 그들 좋을 대로 소리 지르라고 할 일이다. “철학자들의 삶 전체는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다.”(키케로)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죽음은 삶의 끝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삶의 종결이고 궁극의 지점이지 그 목적이 아니다. 삶이야말로 삶 자신의 과녁이자 목적이어야만 한다. 삶을 올바르게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를 규율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스스로를 견디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일반적이고 주요한 장에 포함된 다른 여러 가지 의무 가운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세부 항목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닌 두려움 때문에 그 무게가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가벼운 의무 중 하나이리라.
유익함과 꾸밈없는 진실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단순한 마음을 제시하는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그 반대를 가르치는 철학이론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사람이란 그 취향이나 역량이 다양한 법이다. 그들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길을 통해 그들 나름의 행복으로 이끌어 줘야 할 일이다. “폭풍이 나를 어떤 해안에 던져 놓던지, 나는 그곳에 발을 딛는다.”(호라티우스)(487쪽)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죽음을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나로서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저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 나쁜지 좋은지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두려워할 수가 없다. 내가 죽음을 향해 떠나며 당신들을 여기 삶 속에 두고 갈 때, 당신들과 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신들만이 아신다.(489쪽)
우리가 원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죽음을 죽음 자체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죽음은 삶 못지않게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분이다. 죽음은 대자연의 작업이 다채로이 펼쳐져 가는 것을 보장해 주며, 이 세계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상실과 파멸보다 생성과 증식에 더 기여하는 것을 볼 때, 대자연이 무엇을 위해 우리 안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심어 놓았겠는가?
삼라만상은 끝없이 자기를 쇄신하면서 이처럼 소멸에
맞선다.
_루크레티우스(493쪽)
우리는 우리 능력들을 시험해 보지 않으며 알지도 못한다. 다른 이의 능력을 가져다 뒤집어 쓰려 할 뿐 우리 것은 놀려 둔다.(494쪽)
누군가는 내가 여기 해 놓은 일이라고는 남들의 꽃을 가득 모아 놓은 것뿐이며 내 것은 이 꽃들을 엮은 끈밖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나는 대중의 취향에 굴복해, 이 빌려 온 장식들로 내 글을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장식들이 나를 뒤덮고 나를 가리도록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 의도와는 반대이니, 나는 오직 나의 것만을, 그리고 원래 내 것인 것만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충분한 자신감만 있었더라면 모든 것을 운에 맞기고 오직 내 목소리로만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변덕과 다른 이의 충고를 좇다가 내 원래 의도나 내 글의 처음 윤곽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매일 점점 더 많은 인용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이것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내 보기에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익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494~495쪽)
늙어 가면서 우리의 정신은 변비에 걸리고 웅크리게 된다. 나는 내 무지를 거창하고 풍요롭게 말하며, 내 학식을 빈약하고 초라하게 말한다. 학식은 부수적으로 또 어쩌다 말하고, 무지는 분명하게 우선적으로 말한다. 하찮은 것 말고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며, 무지에 대한 앎 말고는 어떤 앎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묘사하려고 하는 내 삶 전체를 멀찌감치 조망할 수 있는 때를 골랐다. 남은 시간은 죽음에 더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죽음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처럼 내게도 수다스럽게 군다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에도 나는 기꺼이 내 죽음에 대해서만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리라.(498쪽)
“어떤 종류의 육체에 깃들게 되는지가 영혼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육체의 여러 특성이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는 데 쓰이기도 하고, 또 다른 많은 특성이 그것을 무디게 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기 때문이다.”(키케로)(499쪽)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강력하고 유리한 자질을 내가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는 아무리 되풀이 말해도 부족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을 짧은 폭정이라 했고, 플라톤은 자연의 특혜라고 불렀다. 신뢰도에 있어서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자질은 어디에도 없다.(499~500쪽)
외모란 허약한 보증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고려해 볼 만하긴 하다. (...) 그리고 사람 얼굴을 두고 선량함과 미숙함을 구분해 내고, 엄격함과 냉혹함을, 음흉함과 의기소침함을, 오만함과 음울함 등 기타 쌍이 되는 성격들을 구분해내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눈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당할 뿐 아니라 거만한 아름다움들도 있다. 부드러운 아름다움들도 있고 그것을 넘어서 무미건조한 아름다움도 있다. 그로부터 다가올 일을 예측한다는 것은 내가 미결정 상태로 두고 있는 문제이다.(502쪽)
나는 나를 위해서는 오래된 다음의 가르침을 아주 단순하고도 거칠게 받아들이고 있다. 즉 대자연을 따르다 보면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것, 지고의 가르침은 대자연에 순응하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이성의 힘으로 내 타고난 경향을 바꾸지는 않았으며, 깊이 숙고해 나의 성향을 억누르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왔던 대로 나아가게 두고 있으며, 무엇과도 맞서 싸우지 않으니, [이성과 성향이라고 하는] 나의 주요한 두 부분은 각각의 뜻대로 서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고 있다.(502쪽)
스치듯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즉 우리 사이에 거의 유일하게 통용되고 있는 바, 저 모종의 형식주의적인 덕의 개념은 내가 보기에 실제 가치보다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규범의 노예이며 희망과 두려움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나는 법률과 종교가 만들어 낸 바로서의 덕이 아니라, 그저 그것들이 완벽하게 만들어 주고 권위를 더해 주는 덕,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버틸 만큼 자신을 충분히 강력하게 느끼는 덕,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각인돼 있는 보편적 이성에 의해 파종되어 자기 뿌리에 의지해 뻗어 나가는 그런 덕을 사랑한다. 소크라테스를 그의 악덕에서 일으켜 세운 이 이성은 그로 하여금 자기 도시를 이끄는 사람들과 신들에게 복종하게 하고 죽음 앞에서는 담대하게 하는데, 자기 영혼이 불멸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믿음만 있으면 도덕성 없이도 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설득하는 가르침은 어떤 정치 체제에서도 파괴적이며, 기발하고 섬세하기보다는 훨씬 더 해로울 것이다. 독실한 믿음과 양심 사이에는 엄청난 구별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통해 알고 있다.(503쪽)
게다가 사실 나는 타고나기를 의심이 별로 없는 아무나 믿는 편이다.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내며 가장 좋게 해석하려고 드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사람들을 보통 누구나 생각하는 식으로 판단하며,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사악하고 타락한 경향들에 대해 믿지 않는다. 괴물이나 기적을 믿지 않듯이 말이다. 더욱이 나는 기꺼이 운명의 여신에게 나를 맡기고 그녀의 품 안으로 무작정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지금까지는 이 점에 대해 나를 탓하며 후회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축하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리고 나보다는 운명의 여신이 더 신중하고 또 내 일에 대해 더 우호적인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의 몇 가지 처신은 사람들이 쉽지 않은 것이었다고, 혹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사려 깊은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만했다. 그 경우마저 3분의 1은 내 몫이라 해도, 분명코 3분의 2는 너끈히 운명의 여신 몫이었다. 내 보기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하늘에 맡기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 몫 이상으로 우리 행동에 기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기획은 그토록 자주 허방을 짚는 것이다. 하늘은 우리가 하늘의 권한을 줄여 가며 인간적 지혜의 권한을 넓혀가는 것을 질투하며, 우리가 그 권한을 확대하려는 정도만큼 우리에게서 그것을 줄여버린다.(505~506쪽)
“내가 용기를 내어 처벌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범죄가 저질러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티투스 리비우스)(509쪽)
13장 경험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자연스러운 욕망은 없다. 우리는 앎에 이르게 해 줄 만한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본다. 이성적 사유만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우리는 경험을 동원하는데, “다양한 시련을 통해 경험이 경륜을 만들고, 사례가 길을 제시한다.”(마닐리우스)(511쪽)
이성은 너무 많은 형태를 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중 어떤 것에 매달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경험의 형태 또한 못지않다. 사건들의 유사성에서 우리가 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그다지 확실하지가 않은데 사실상 이 사건들은 늘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모습에 담긴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든다면 바로 다양성과 상이함이다.(511쪽)
다르다고 해서 전혀 다른 판을 만들지는 못하듯 닮았다고 해도 꼭 같을 수는 없다. 대자연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512쪽)
우리 마음은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때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공격할 때도 어디로든 내달릴 수 있다.(512쪽)
“옛날에는 범죄 때문에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은 법 때문에 고통스럽다.”(타키투스)(512쪽)
우리가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 내도 실제 예의 다양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 백배 되는 궁리를 더해 보라. 그래도 장차 다가올 일들 중에는 골라 뽑아 등재해 놓은 수천 가지 사건 중 어느 하나와 정확히 들어맞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고려가 필요하다 싶은 사정이나 차이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란 없다. 끝없는 동요 상태에 있는 우리 인간의 행동은 고정되고 변화하지 않는 법이라는 것과 그다지 관련이 없다. 가장 바람직한 법은 가장 적은 수의, 단순하고 일반적인 법이다. 지금 우리처럼 수많은 법을 갖는지 차라리 법 자체가 아예 없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하다.(513쪽)
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분화한 것을 다시 또 나눔으로써 사람들이 배우게 되는 것은 더욱더 의심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 것을 더 확장하고 다양하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니, 사람들은 그것을 잡아 늘이고 흩뿌리게 된다. 의문의 씨앗을 퍼뜨리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그것을 유포시킴으로써 의문은 결실을 맺게 되고, 세상은 불확실성과 다툼으로 소란스러워진다.(514~515쪽)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경험으로 미뤄 볼 때 그 많은 해석들은 진실을 흩어지게 하고 부숴 버린다는 것이 분명하다.(515쪽)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신이 원래 병든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저 뒤지고 찾으러 다닐 뿐, 끝없이 맴돌며 집을 짓고 마치 누에처럼 자기가 만든 고치 안에 허우적거리다 숨이 막힌다. “송진에 달라붙은 생쥐 꼴이다.”(에라스무스에서 인용한 격언) 멀리 가상의 광명과 진리 같은 무언가가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으로 달려가는 길에 무수한 어려움과 장애를 만나고 새로운 연구거리 마저 생겨 정신은 길을 잃고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린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들이 겪는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시체처럼 보이는 것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본 개들은 가까이 갈 방법이 없자 물을 다 마셔서 길을 내려고 하다가 숨이 막혀 죽어 버린다.(516쪽)
앎을 향한 추구라고 하는 이 사냥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혹은 우리 자신이 이미 찾아 놓은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허약함 탓이다. 더 유능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도 설 자리가 있고, 그렇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새로운 길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탐색에는 끝이 없다. 우리의 종점은 저세상에나 있다. 정신이 만족해한다는 것은 스스로 모자라거나 지쳤다는 신호이다. 굳센 정신이라면 결코 자신의 한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강한 정신은 항상 더 앞으로 나아가며 자기 힘의 한계를 넘어서 간다. 그것은 성취 가능성을 넘어 비약하려 한다. 전진하지 않고 밀고나가지 않으며 궁지에 몰리거나 타격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쯤만 살아 있는 셈이다. 정신의 추구는 끝점이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이 취하는 양분은 놀라움이고 사냥 놀이이며 애매모호함이다. 우리에게 늘 이중적 의미로 애매하게 에둘러 이야기함으로써, 궁금증을 풀어 주기는커녕 더 키우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아폴로가 이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정신이란 본보기도 목표도 없는 불규칙하고 영원한 운동이다. 정신이 생각해 낸 것들은 서로를 자극하고 서로를 뒤따르며 서로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처럼 흐르는 시냇물은
윗물이 아랫물을 끝없이 쫓아오고
쉼 없는 영원한 흐름 속에
한 물결이 다른 물결을 따르고
한 물결이 다른 물결을 피해 가네.
이 물결은 저 물결을 떠밀고
저 물결은 다른 물결에 뒤처지니
줄곧 물결이 물결 속으로 가는 중에
늘 같은 시냇물이면서 늘 다른 물결이라네.
_라 보에시
무엇을 해석하는 것보다 해석을 해석하는 일이 더 까다로우며, 어떤 주제에 관한 책보다도 책에 관한 책들이 더 많다. 우리는 서로를 주하는 일만 하고 있는 중이다.
온통 해석들이 우글거리는데, 원저자는 가뭄에 콩 나는 식이다.
우리 시대의 평판 높은 주요 학식이란 학자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아닌가? 그것이 바로 모든 배움의 공통된, 궁극적 목적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의 견해란 서로 접목되어 있다. 첫 번째 견해가 두 번째 견해의 줄기가 되고, 두 번째는 세 번째의 줄기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한 단계씩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높이 올라간 자는 흔히 분수에 넘치는 명예를 얻기에 이른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바로 전 사람의 어깨 위로 그저 한 뼘쯤 더 올라간 것뿐인데 말이다.(517~518쪽)
어떤 일, 어떤 형상도 다른 것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듯이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 모든 것이 어떤 유사성으로 연결돼 있지만, 어떤 표본이라도 절뚝거리는 법이다. 그래서 경험에서 끌어낸 관계는 늘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저것 비교한 뒤 어느 구석을 붙들어서 서로 연결시킨다. 법률들이 쓰이는 것도 그와 같아서 좀 어거지로 구부려 우회적으로 해석하고 나서야 우리 인간사 하나하나에 적용되는 것이다.(520쪽)
키레네 학파에서는 그 자체로서 올바른 것은 있을 수 없고 관습과 법이 정의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테오도리안들은 현자가 행하는 절도나 신성 모독, 기타 온갖 방탕한 행위는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겼다.(522쪽)
그가 누구건 법정을 나설 때는 항상 손해를 보고 나온다.(523쪽)
이 나라가 빠진 내전 속에서 내가 신중을 기하며 하는 일이란 마음대로 오고 가는 나의 자유를 행여 법이 건드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런데 법이 신용을 유지하는 것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그저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법이 지닌 권위의 숨겨진 기초인 것이다. 다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법에게는 참으로 유리한 셈이다. 법은 흔히 바보들이 만들며, 그보다 더 흔히들 평등을 증오하는 나머지 공정성을 잃은 자들이 만들지만, 그러나 변함없이 언제나, 공허하고 불안정한 저자인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524쪽)
이 우주 안에서 나는 아는 것 없이 무심하게 세상의 보편 법칙에 나를 내맡긴다. 그 법칙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게 되리라. 나의 지식이 그 법칙의 행로를 바꿀 수는 없으리라. 그 법칙이 나를 위해 자신을 바꿀 리도 없으리라.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며, 그 사실로 괴로워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늘 한결같으며 일반적이고 만인에게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을 다스리는 이의 선함과 역량을 믿고 우리는 마땅히 그의 통치에 대해 염려할 생각 말고, 온전히 마음 놓고 있으면 될 일이다.(525쪽)
자연은 우리에게 두 발을 줘 걸을 수 있게 했듯 이 삶을 헤쳐 갈 지혜도 마련해 주었다. 철학자들이 생각해 낸 지혜처럼 그렇게 기발하고 강고하고 거만스러운 지혜가 아니라 적당히 손쉽고 건강한 지혜, 순박하고 차분하게, 다시 말해 자연스럽게 자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철학자가 말로 한 것을 너무나 잘 행한느 지혜 말이다. 자신을 가장 단순하게 자연에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다. 오, 호기심 없음과 무지함이여! 그것은 [판단력이 깃든] 잘 다듬어진 머리를 뉘이기에 얼마나 아늑하고 건강한 베개인가!(526쪽)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 경우 그 사람이 말해 준 새로운 내용이나 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점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보다(그 정도 소득은 별 것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이 아둔하며 내 이해력이 나를 오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527쪽)
일련의 실수이건 개별적 실수이건 나는 그것이 어쩌다 걸려 넘어지게 된 돌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 걸음걸이가 문제라고 여겨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자기가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했다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자신이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이 훨씬 풍요롭고 중요한 가르침이다. 내 기억력은 아무리 틀림없다 생각되는 경우에도 너무 자주 나를 헛발 딛게 했지만 그 덕에 내가 얻은 것이 있다. 이제는 아무리 기억력이 내게 분명하다고 맹세하고 나를 설득해도 나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내 기억의 증언에 대해 누군가 한 번만 이의를 달아도 즉시 판단을 보류하게 되니, 중요한 일에서 내 기억에 의존하거나, 타인의 일에 대해 내 기억을 장담하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527~528쪽)
나 자신이 어떤 정념의 먹이가 되고 나서 스스로를 살펴본 것처럼, 누구든 자기를 지배하는 정념들이 어떤 결과와 어떤 상황을 낳는지를 가까이서 살펴본다면, 정념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그것이 가진 격렬성과 조급성을 얼마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념이 단숨에 우리 목을 부여잡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위협이 있고 그리고 단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처음 바람이 불면 바다는 하얗게 변하며
점차 부풀어 올라 출렁거리다가 이내 저 심연의
바닥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곧추 몸을 세운다
_베르길리우스(528쪽)
자기를 아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아주 확실하고 만족스런 문제로 여기는 것이나, 너나없이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들이 자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529~530쪽)
나 자신을 탐구하는 것 말고 다른 직업이 없는 나는 내 안에서 한없는 심연과 무한한 다양성을 보고 있으며, 내가 배움을 통해 얻은 결실이 있다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몸소 체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덜 떨어진 사람인 것을 여러 차례 인정했던 덕분에 나는 절제된 태도를 가질 수 있었고, 내가 따르게 되어 있는 [종교적] 앞에서 순종적일 수 있었으며, 내가 가진 견해를 항상 담담하고 신중하게 표현하게 되었다.(5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