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3권의 마지막 장인 13장 '경험에 관하여'가 거의 끝나갑니다.
내일이면 계묘년이 가고 갑진년이 오는데요. 후~ 새삼 몽테뉴와 일 년을 함께 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네요.
이번 주에도 몽테뉴는 선물 같은 문장들을 선사해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년과 병(요로 결석), 고통과 죽음, 그 모든 것들을 맞이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사람들의 이런저런 행위를 서로 연결시키는 일도 어렵게 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를 어떤 주요한 특질로써 규정하려는 것도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만큼 인간의 행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이고 이중적이다."
이렇게 적고 있듯, 고귀한 회의주의를 유지하는 몽테뉴는 인간의 경험과 행위에서의 규정불가능한 다채로움을 중시합니다.
행위와 경험은 결코 법이나 언어에 갇힐 수 없는 힘들로서 수많은 해석과 효과와 더불어 출현하는데요.
몽테뉴는 그것들을 번뇌를 증식하는 방식이 아닌, 의연하고 자유롭게 겪고 이해하는 기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습관, 운수, 대자연, 의학에 대한 고찰들은 모두 그런 맥락에 있는 듯합니다.
다음 구절들이 잘 보여줍니다.
"나는 때가 되면 즉시 나의 고통을 실컷 맛보리니, 두려움의 고통까지 굳이 내 고통에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울까 봐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움 그 자체로부터 이미 고통을 맛보기 시작한다."
"가장 심각하고 일상적인 고통이라는 것은 상상을 통해 우리가 짊어지게 된 것들이다."
"
피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삶이란 이 세상의 조화로움이 그렇듯이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 그러면, 이번주의 필사를 보실까요?
학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해 난 것을 이런저런 부류로 나누고 아주 작은 부분까지 특정한 개념으로 범위를 제한한다. 그러나 일상의 경험이 내 앞에 불규칙하게 펼쳐 놓는 것만을 볼 뿐인 나는 그저 내 생각을 대강 어림잡아서만 이야기한다. 여기서도 그런 식이다. 나는 내 소견을 동시에 한꺼번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인 양 이음새 없는 항목들로 내놓는다. 긴밀함과 일관성이란 우리처럼 비속하고 평범한 영혼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지혜란 견고하고 하나로 된 건물로서 모든 부분이 제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오직 지혜만이 자기 안에 자기를 온전히 보존한다.”(키케로)
이 세상의 무한히 다양한 모습들을 종류별로 묶어 나누고 우리의 불안정성을 고정하며 거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달인들에게 맡겨 놓기로 하지만, 과연 그들이 이렇게 뒤죽박죽이고 자질구레하며 우연으로 점철된 사안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의 이런저런 행위를 서로 연결시키는 일도 어렵게 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를 어떤 주요한 특질로써 규정하려는 것도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만큼 인간의 행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빛깔이고 이중적이다.(532~533쪽)
자신에 대해 꾸밈없이 판단하는 소리를 들으려면 어지간히 튼튼한 귀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상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히 정직한 충고를 해 주는 이들은 특별한 우정의 표현을 하는 셈이다. 도움이 되기 위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상처를 주려 하는 것은 건강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자질보다는 나쁜 자질이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정면으로] 평가하기란 힘든 일이다. 플라톤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영혼을 검토해 보려는 이에게는 세 가지 자질을 요구했는데, 학덕과 선의, 그리고 [솔직함으로서의] 대담함이 그것이었다.(533~534쪽)
있는 그대로의 자기이기를 바라며, 더 이상을 원치 않는 자.
_마르시알리스(535쪽)
내게 건강이란 아무런 문제없이 평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병이 나를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만약 내가 의사들에게 몸을 의탁하면 그들은 다른 쪽으로 또 나를 몰아갈 것이다. 그래서 운수 소관으로건 의술이라는 인위로건 나는 내 평소 가던 길에서 벗어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믿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내게 익숙해진 것들을 계속하더라도 내 몸에 해로울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자기 뜻대로 우리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은 이 점에서 못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제 마음대로 우리 천성을 바꾸는 마녀 키르케의 음료이다.(539쪽)
인쇄된 증언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이며, 책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지 않은 것은 진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또 어쩔 것인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마저도 활자로 찍어 내고 나면 권위가 있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책에서 보니……” 하고 말을 하는 것이, “내가 들은 바로는……” 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의 입을 그의 손에 쥐여진 펜보다 덜 믿지는 않으며, 사람들이란 말하는 것만큼이나 글로 쓰는 것도 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세기도 지나간 다른 옛날과 마찬가지로 평가하고 내 친구 중 한 사람을 아울루스겔리우스나 마크 로비우스만큼 기꺼이 인용하며, 그들이 쓴 것만큼이나 내가 본 것도 마찬가지로 인용한다. 그리고 더 오래된 미덕이라고 해서 더 위대한 것은 아니라고 그들이 말했듯이, 나 역시 진리란 더 오래되었다고 해서 더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541쪽)
우리는 주장의 진실됨보다 인용하는 자랑거리를 더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는 바스코나 플랑탱의 가게에서 증거를 빌려 오는 것이 더 낫다는 듯이 말이다. 또 혹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검토하고 그 가치를 평가해 거기서 본보기를 끌어낼 만큼 깊이 있게 판단할 정신적 역량이 우리에게는 정녕코 없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증언을 신뢰하기엔 우리에게 권위가 부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치 않은 소리이다. 내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보편적이며 잘 알려진 일들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적절한 빛에 비춰 볼 줄만 안다면, 가장 위대한 자연의 기적들과 가장 경이로운 본보기들이 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행동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라면 말이다.(541~542쪽)
거지들도 부자처럼 자기네만의 호사와 환락이 있으며, 그들만의 정치적 지위와 신분이 있다고도 한다. 그것은 습관의 결과이다. 습관은 우리를 자기 마음 내키는 모습으로 만들며 (그런 까닭에 현자들은 우리가 늘 최선의 모습을 고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습관이 어느새 쉽게 거기 이르게 해 준다고 하니 말이다.) 나아가 변화와 다양함으로도 이끄는데, 이것이야말로 습관의 학교가 키워 내는 가장 고귀하고 쓸모 있는 학습이다. 젊은이들은 마땅히 자기 활력을 일깨우기 위해 그리고 적어도 그 활력에 곰팡이가 피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식의 습관을 뒤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명령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어리석고 유치한 삶의 방식은 없다.(544쪽)
마지막 수단까지 다 동원해 우리가 가질 만한 것을 가질 일이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 나가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강인하게 단련되고 체질도 개선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그를 괴롭히던 간질병에 눈도 주지 않으며 맞서다가 마침내 병의 기세를 꺾고 말았던 것처럼 마링다. 사람은 마땅히 최상의 생활 규칙을 택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노예처럼 붙들려서는 안 된다. 거기 꼼짝없이 복종하는 것이 유익한 생활 규칙이 있다면 그 경우는 예외이지만 말이다.(548쪽)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그만둬야 한다니,
삶을 연장하기 위해 더 이상 살지 말란 말인가?
숨 쉬던 대기와 비춰 주던 햇살마저 짐이 된 사람을
아직도 살아 있는 이라고 할 수 있을까?
_막시미아누스(549쪽)
아프건 건강하건 나는 늘 내게 밀려오는 욕구를 기꺼이 따라갔다. 내 안에서 이는 욕망과 내가 가진 성향을 나는 적잖이 존중한다.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 치유하고 싶지 않다. 병보다 더 힘들게 하는 치료법을 나는 싫어한다. 내가 결석을 앓고 있는 까닭에 굴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한 가지 말고 두 가지 고통을 갖게 되는 셈이다. 한편에서 병이 괴롭히는데, 다른 편에서는 처방이 괴롭힌다. 우리가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상 기왕이면 즐거운 쪽으로 내기를 걸어 보자. 세상은 반대로 한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유익하게 여기지 않으며, 손쉬운 것은 의심쩍어한다.(550쪽)
가장 심각하고 일상적인 고통이라는 것은 상상을 통해 우리가 짊어지게 된 것들이다.(552쪽)
기운이 쇠해 욕망하는 능력마저 맥이 빠지게 된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552쪽)
말이란 절반은 말하는 사람의 것이고 절반은 듣는 사람의 것이다.(554쪽)
경험을 통해 또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는 초조해하느라 무너진다는 것이다. 고통은 그 나름의 생명과 한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며, 그 나름의 병과 건강을 지니고 있다. 병의 체질은 생명체들의 체질을 본떠 만들어진 셈이니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고 수명이 있으니 말이다. 한참 그 행로를 진행하고 있는데 억지로 줄이려 하다가는 오히려 더 늘여 주고 곱절로 키워 주게 되며, 진정시키기보다 자극하게 된다.
나는 크란토르와 마찬가지 생각인데,
병 앞에서는 분별 없이 고집 부리며 맞서 싸우려 해서도 안 되고 맥없이 무릎을 꿇어서도 안 되며, 병의 상태와 자신의 상태를 헤아려 자연스레 병에게 양보해야 한다. 병에게는 지나가라고 길을 열어줘야 한다. 내가 보기엔,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는 내게는 별로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무슨 도움이나 치료술 없이, 의술의 규칙과는 반대로, 몹시 드세고 끈질기다는 병들도 저절로 시들해지며 사라지는 것을 몸소 경혐했다.
자연이 얼마간 제 일을 하게 둬 보자. 자연은 자기 일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554~555쪽)
즐거움이란 이로운 것이 지닌 가장 주요한 양상 중 하나이다.(555쪽)
용맹으로 맞서는 것보다 공손하게 대해 줄 때 그들[병]이 더 쉽게 물러난다.(556쪽)
“아가야 네가 이 세상에 온 것은 견뎌 내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견디고 참아라, 그리고 입을 다물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해서 불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너 한 사람에게만 불의한 법을 적용하려 들면 그때는 투덜대라.”(세네카) 어떤 노인이 완벽하고 힘찬 건강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시 말해 청춘으로 돌려 달라고 신에게 빌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라.
돌았구나! 그 어리석은 소망을 쓸데없이 빌어 봐야
무엇하랴?
_오비디우스(556쪽)
피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삶이란 이 세상의 조화로움이 그렇듯이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감미로운 소리와 거친 소리, 날카로운 소리와 나지막한 소리, 여릿한 소리, 장엄한 소리 같은 갖가지 음조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중 한 가지 방향으로만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다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겠는가? 그는 마땅히 양쪽 모두를 함께 쓸 줄 알고 또 섞어서 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이 함께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쓸 줄 알아야 하리라. 우리 존재는 이렇게 섞어 쓰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으며, 다른 한쪽도 나머지 한쪽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삶에 필요하다. 자연의 필연성을 거역하려고 버티는 것은 자기 당나귀하고 서로 발길질 시합을 했던 크테시폰의 바보짓을 따라하는 셈이다.(557~558쪽)
예를 하나 들어 봤으면 싶은가? 내 마음은 스스로에게 결석이 있는 것은 더없이 잘된 일이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내 나이의 사람 몸이란 원래 그렇게 어딘가 새게 돼 있다고 말이다.(이제 점차 헐거워지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때이다. 누구나 겪게 마련인 일인데, [이런 일이 없다면] 나를 위해서 새로운 기적이 일어난 셈 아니겠는가? 노년에 바쳐야 할 세를 그렇게 지불했으니 그 정도면 더 바랄 나위 없는 거래가 이루어진 셈이리라.)(559쪽)
“그것은 네 몸 중 많이 실수하게 한 부분을 가격하는 고통이다. 너에게 그 정도의 양심은 있느니라.”(560쪽)
그러나 너는 아픈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병의 도움 없이도 죽음은 너를 능히 처분한다. 어떤 이들은 병이 죽음을 멀리 떼어 놓기도 하는데, 자기들은 이제 다 끝나 죽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상처들이 그렇듯, 치료해주고 건강을 돌려 주는 병들도 있다. 결석은 흔히 당신 자신보다 더 싱싱하게 살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극도의 노년기까지 줄곧 이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게 되지만, 자기들이 먼저 이 병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 병은 훨씬 더 오래 그들과 동행할 참이었다. 병이 당신을 죽이는 것보다 당신이 병을 죽이는 경우가 훨씬 흔하며, 임박한 죽음의 모습을 병이 당신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 나이에 이른 사람이 자기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주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는가?(561~562쪽)
온당한 판단을 내리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마음의 결단을 내릴 방법을 네게 주기 위해 그것은 아플 때와 건강할 때 그 각각의 경우에 네가 타고난 조건의 온전한 몫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때로는 지극히 쾌적한 삶과 때로는 견디기 힘든 삶을 같은 날 보여주기도 한다. 죽음과 포옹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죽음과 악수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하다 보면 너는 바랄 수 있으리라, 어느 날 이 병이 범상한 얼굴로 다가오고, 자주 포구에 이끌려 나갔던 네가 이번에도 늘 가 보던 저 마지막 경계선에 가나보다 믿고 있을 즈음, 너도 너의 믿음도 어느 아침 아무 생각 없이 저승의 강물을 이미 건너와 있게 되기를 말이다.
시간을 건강과 공정하게 나눠 갖는 병에 대해서는 불평을 할 이유가 없다.(562쪽)
나쁜 일도 좋은 일처럼 자기 때가 있다.(564쪽)
이 급격한 변화보다 더 달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이 신속한 호전의 쾌감을 상쇄할 만한 무엇이 우리가 겪는 통증 안에 있겠는가? 서로가 그렇게 가까이 이웃하여 있어서, 상대의 존재 안에서 각자의 가장 당당한 위용을 알아볼 수 있을 때, 둘이 마치 정면으로 겨루려는 듯 맞부딪칠 때, 병고 다음에 오는 건강은 내게 얼마나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가! 스토아 학파에서 악덕이란 미덕을 귀하게 만들고 도와주기 위해 세상에 가져온 유익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는 그보다 더 타당한 이유를 들고 억지가 덜한 추정을 통해
자연이 우리에게 고통을 알게 한 것은 평안함과 즐거움의 가치를 드높이고 그것을 돕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족쇄를 풀어 주자 그 무게 때문에 다리에서 느껴지던 기분 좋은 근질거림을 맛보던
소크라테스는 고통과 쾌감이 필연적 고리로 연결되어 차례로 서로를 뒤이어 불러오는 것을 고찰해 보고 기뻐했다.(564~565쪽)
통증이 몹시 격렬한데도 나는 말을 탄 채 열 시간을 버티기도 했다. 그저 견디라, 다른 치료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놀아라, 먹어라, 달려라, 이것도 하고 할 수 만 있다면 또 저것도 하라.(566쪽)
다른 병들의 경우는 삼가야 할 것들이 더 포괄적이고, 우리가 하는 행동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며, 우리가 유지해 온 질서 전체를 방해하고, 우리의 생활 상태 전체를 병을 고려해 재고하라고 한다. 그런데 내 병은 그저 살갗을 꼬집을 뿐이다. 생각도 의지도 당신 원하는 대로 그대로 두고, 혀도 발도 손도 그대로 둔다. 그것은 당신을 잠들게 하기보다 깨운다. 영혼은 열병의 뜨거운 기운에 타격을 받으며 간질로 쓰러지고 심한 두통에 흩어지는 등 한마디로 몸 전체와 그 가장 귀중한 부분들을 해치는 온갖 병에 뒤죽박죽이 된다. 그런데
내 병은 영혼을 조금도 공격하지 않는다. 어딘가 신통치 않다면 그것은 영혼 그 자신의 책임일 뿐이다. 영혼은 스스로를 배신하고 스스로를 버리고 스스로를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뜨린다. 신장에서 구워지고 있는 이 단단한 덩어리가 뭘 좀 마시면 녹을 수 있으리라 설복되는 것은 바보들밖에없다. 그러니 일단 결석이 움직이면 그저 길을 내주는 수밖에 없으며 그러면 그것도 그 길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566~567쪽)
키케로가 자기 노년이라는 병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식으로, 나도 때로 강력하고 또 때로 허약한 논거를 들어 가며 상상력을 잠재우거나 달래려고 하면서 노년의 상처 위에 약을 발라 본다. 내일 그 상처가 심해지더라도 내일은 또 다른 방책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567쪽)
나는 때가 되면 즉시 나의 고통을 실컷 맛보리니, 두려움의 고통까지 굳이 내 고통에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울까 봐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움 그 자체로부터 이미 고통을 맛보기 시작한다. 게다가 대자연이 작동하는 원리며 그 내적 과정을 설명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의 흐릿함과 무지, 그리고 그들 의술이 그 많은 엉터리 진단을 하는 것을 보면 대자연이 갖고 쓰는 방식들은 아직 아득한 미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약속하거나 혹은 위협하는 것은 너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하며 애매모호하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인 늙음 말고는 내 보기에 다른 어떤 병에서도 우리가 장차 어찌될지를 예측해 볼 징후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568쪽)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달려드는 공동의 위험을 두려워하거나, 서로 다른 그 많은 종류의 영혼들이 감당하려 드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르고 비천한 심성이다. 어린애들도 동료가 있으면 자신을 갖는다. 다른 이들이 당신보다 학식이나 품위, 힘 혹은 재산이 더 많을 경우 당신은 당신 밖의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단호함이 남보다 못하다면 당신 자신밖에 탓할 수가 없다. 죽음은 전장에서보다 침대에서 맞을 때 더 초라하고 시들하며 괴로운 법이니, 고열이나 독감도 화승총 맞은 것처럼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만나게 돼 있는 사고를 당당히 맞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군인이 되기 위해 일부러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없는 법이다.
“친애하는 루킬리우스여, 산다는 것은 곧 투쟁하는 것이라네.”(세네카)(571쪽)
또한 내 수명이 떡갈나무처럼 길고 충만하지 않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일도 없다. 내 상상력을 불평해야 할 이유도 없다. 깊은 잠에 들었다 돌연 깨어날 만한 그런 생각들에 골똘한 적이 사는 내내 없었거니와, 어쩌다 깨어나는 경우는 내 욕망이 빚은 사태로서 아무런 괴로움도 따르지 않았다.(574쪽)
욕망은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묶어 두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자신을 무엇엔가 종속시키는 것은 그래도 늘 악덕이다.(576쪽)
“자유로움의 상당부분은 절제된 배 속에 있다”(세네카)(577쪽)
평범한 사람들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운명이 그들을 가르치게 놓아 두라. 습관이 그들을 소박함과 엄격함에 길들여지게 해, 그들이 삶의 혹독함을 향해 점차 올라가도록 하기보다 내려오도록 할 일이다.(577쪽)
나는 천성적으로 강자들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약자들 앞에서는 오만하게 굴던 피루스의 경우보다는 플라미니우스가 보여 준 예에 더 끌리는데, 그는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 보다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주었다.(5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