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찬탄'할 일입니다!
'꾸준히'와 '함께'의 힘으로 작년 봄에 시작했던 몽테뉴 읽기가 끝이 났습니다!
계묘년의 아침을 보석 같은 문장들로 열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덕분에 일년 간 아침을 기분 좋은 긴장으로 시작할 수 있는 리듬을 만들게 되었네요.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입니다! 안개처럼 저장해 놓은 귀한 문장들은 다른 조건 속에서 빛나리라 믿습니다!
몽테뉴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단하고 또 유연한 생각 조각들로 저희를 감동시켰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태도, 실존을 하나의 작품처럼 가다듬는 기예 및 훈련의 문제가 언급되는데요.
가령 이런 구절은 몇 번을 봐도 빛이 납니다.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삶을 즐기는 데는 솜씨가 필요하다."
"우리의 품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우리의 일이지 책을 쓰는 것이 우리 일인 것은 아니며, 어느 전투에 이기고 어느 지방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신을 질서 있고 평정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만드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걸작은 제대로 사는 일이다."
특히 '품행'(conduite)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요. 이는 푸코가 직접 참고했던 용어이기도 합니다.
품행이란 무엇에 의해 나 자신의 감성과 행위를 인도받을 것인가를 의미합니다.
마지막까지도 고귀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몽테뉴에게 이 문제는 각별해 보입니다.
끝까지 육체를 긍정하고, 탈속을 거부했던 몽테뉴의 건강함이 주는 기운을 받고 질문거리로 다듬어가보고 싶어집니다.
그럼 마지막 <에세> 필사를 보시고, 끝까지 함께 했던 샘들의 소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샘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고, <에세>를 다 읽는 '에세'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생명이 조금씩 줄어 가는 것은 하느님이 그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늙어 가는 것이 누리게 되는 유일한 축복이 그것이다. 최후에 맞게 될 죽음은 그만큼 덜 전면적이고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때쯤이면 한 사람의 절반 혹은 4분의 1 정도만 마무리할 단계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 내 이 하나가 아프지도 않고 애쓸 것도 없이 절로 빠졌다. 내 존재의 일부인 이것이나 다른 몇 가지는 이미 죽었고, 내가 가진 가장 원기왕성한 것들에 속했고 꽃피던 한창 나이에는 맨 앞열에 서 있던 것들은 절반쯤 죽은 상태이다. 이렇게 나는 시드는 중이며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미 이렇게까지 진행된 추락의 마지막 단계를 건너는 일을 마치 온전히 저 높은 출발점에서 떨어지는 양 느낀다면 나의 분별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 그러지는 않기를 빌고 있다.
참으로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 것은 내가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그런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 그런 까닭에 이제부터는 운명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호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다.(580~581쪽)
건강이 내게 주는 최고의 열매는 쾌락이니, 우리가 아는 지금 당장의 첫 즐거움을 붙들어 두자. 나는 금식의 법칙이 철저해지는 것은 피한다. 어떤 생활 방식으로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 마냥 지속되는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 이 습관에 무뎌진 나머지 우리가 가진 힘이 잠들어 버리니 말이다. 여섯 달이 지나면 당신의 위장은 너무나 왜곡되어 당신의 소득이란 그저 아무런 피해 없이 위장을 달리 쓸 수 있는 자유가 사라졌다는 것뿐이리라.(584쪽)
거의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내가 어느덧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 아닌가. 한 걸음 더,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또 한 걸음, 세 번째에서 네 번째로, 그렇게 아주 서서히 뒤로 가다 나는 어느 날 완전히 눈이 멀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내 시력이 약해지고 늙었음을 느끼게 되리라. 운명의 여신들은 그렇게 능숙하게 우리 목숨의 실타래를 풀어 간다. 내 청력이 어두워져 가는 것도 스스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니, 반쯤 귀가 멀어 놓고도 여전히 내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탓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리라.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떻게 새어 나가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려면 영혼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어야 한다.(587쪽)
바로는 향연의 자리에 필요한 것으로서, 어엿한 자태에 침묵도 수다스러움도 아닌 기분 좋은 대화를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그리고 깨끗하고 세련된 음식과 공간, 맑은 날씨를 들었다. 잘 마련된 식사 자리는 여간한 기술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즐거움 또한 사소하지 않다. 걸출한 장수들도 위대한 철학자들도 누구나 이런 자리에 함께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또 그렇게 꾸리는 방법을 귀하게 여겼다.(588쪽)
무슨 일이건 항상 땅을 단단히 딛고 있는 나는, 우리로 하여금 육체를 가꾸는 것을 경멸하고 적대시하게 만드는 저 비인간적인 지혜를 혐오한다. 또 자연의 쾌락을 역겨워하는 것도 거기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크세르크세스는 바보였던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온갖 쾌락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또 다른 쾌락을 알려 주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바보가 바로 자연이 내려 준 쾌락들을 잘라 내 버리는 사람이다. 그 쾌락은 뒤쫓아 다닐 것도, 피해 도망 다닐 것도 아니며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풍요롭게 그리고 더 우아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보다 기꺼이 자연의 성향에 나 자신이 이끌려 가게 놔둔다. 우리가 이 같은 쾌락의 공허함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저절로 충분히 느껴지며 충분히 드러난다. 병든 데다 흥을 깨는 버릇이 있는 우리네 정신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이 쾌락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갖게 만드니 말이다. 정신은 만족할 줄 모르고 떠돌아다니는 변덕스러운 자기 기질에 따라, 자신과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에 대해, 때로는 미리 때로는 지나간 후에 이리저리 따져 본다.
단지가 청결하지 않으면, 무엇을 그 안에 부어도 상하는 법이다.
_호라티우스
삶의 즐거움들을 그렇게 정성스럽고 또 특별하게 맞아들인다고 자부하는 내가 자세히 그것들을 바라보노라면, 거기에는 바람 말고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어쩌랴, 어떻게 봐도 우리 자신이 바람인 것을. 그리고 바람마저 우리보다 더 지혜롭게, 그저 소리를 내고 뒤척이기를 좋아하면서 제 할 일로 만족할 뿐, 안정성이며 견고성 같은 자기 것 아닌 자질은 탐하지 않는다.(589~590쪽)
나는 우리 몸이 식탁 앞에 있는데 정신은 구름 속에 올라가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싫다. 나는 정신이 꼼짝 못하고 들러붙어 있는 것도, 뒹굴거리고 있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깨어 힘쓰는 것을 원하고, 거기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 잡고 앉아 있기를 원한다. 아리스티푸스는 우리에게 마치 영혼이 없는 듯 육체만을 옹호했고, 제논은 우리에게 육체가 없는 듯 영혼만을 받아들이려 했다.(591~592쪽)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그리고 아름다운 과수원 사이에서 홀로 산보를 하노라면 한동안 그 순간과 무관한 일들을 떠올리지만,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산보로, 과수원으로, 홀로 있음의 아늑함으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내 생각들을 데려온다. 대자연은 어머니의 자애로움으로 원칙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필요를 위해 우리가 따르도록 해 놓은 행동들에 또한 즐거움이 곁들이게 만들어 두어서,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도 그리 이끌린다. 대자연의 이 같은 규칙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592쪽)
우리는 대단한 바보들이다. “그는 평생을 하는 일 없이 지냈다”라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또는 “나는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아니, 당신이 살지 않았단 말인가? 사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근본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빛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게 큰 일을 할 수 있게 맡겨만 주었다면 나도 내 역량을 보여 줬을 텐데.” 당신은 당신 삶을 관조하고 다스릴 줄 알았는가? 그렇다면 만사 중 가장 필요한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자기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자연은 운수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단계에서나, 막 없이도 그렇듯 막 뒤에서도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의 품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우리의 일이지 책을 쓰는 것이 우리 일인 것은 아니며, 어느 전투에 이기고 어느 지방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신을 질서 있고 평정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만드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걸작은 제대로 사는 일이다. 다른 모든 일들, 다스리고 재물을 모으고 건물을 짓는 일은 기껏해야 부속품이고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593쪽)
일에서 자신을 온전히 분리해 내고 하던 일을 그대로 두었다 다시 들쳐 잡을 줄 모르는 것은, 일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시시한 영혼들의 모습이다.(594쪽)
영혼의 위대함이란 위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기보다 자신을 가지런히 하고 자신의 한계를 설정할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적당한 것이면 무엇이나 위대하다 여기며, 각별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그 고귀함을 드러낸다. 사람 노릇을 마땅하게 해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떳떳한 것은 없으며, 이 삶을 잘, 그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지혜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가장 야만스러운 병폐는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멸시하는 것이다. 자기 영혼을 따로 떼어 내기 원하는 자는 그럴 수 있다면 과감하게 그렇게 하라. 몸이 아플 때 영혼이 거기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때는 그와 반대로, 영혼이 몸을 돕고 몸을 편들며 몸이 느끼는 자연의 쾌락들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함께 즐기며, 육체보다 더 지혜로운 영혼이라면 그 쾌락들이 행여 불쾌함과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즐거움에 절제를 곁들여야 할 일이다. 무절제는 쾌감의 천적이지만, 절제는 쾌감을 파괴하지 않고 그 맛을 돋운다. 쾌락을 지고의 선으로 여겼던 에우독소스와, 쾌락의 가치를 더없이 높게 끌어올린 그의 벗들은 절제를 통해 가장 매력적인 쾌락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것인데, 그들의 절제는 독특하고도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영혼에게 고통과 쾌락을 똑같이 제어되고 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그러나 고통은 즐겁게, 쾌락은 엄격하게 바라보며, 할 수 있는 한 고통은 소멸시키고 쾌락은 확장시키려 애쓰라고 지시한다. “영혼이 즐거움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은 고통 속에서 오그라드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다.”(키케로) 좋은 것들을 건강하게 바라보는 것은 나쁜 것들을 건강하게 바라보는 것과 함께 간다. 그리고 고통은 그 연약한 초기에 피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으며, 쾌락은 그 과도한 끝 무렵에 무엇인가 피할 수 있는 것을 담고 있다.(597~598쪽)
고통, 쾌락, 사랑, 증오는 어린애가 느끼는 최초의 것들이다. 이성이 깃들 때, 이것들이 이성애 매달리게 되면 그것이 덕성이다.(598쪽)
흔히 사용하는 ‘시간 보내기’며 ‘시간을 흘려 보낸다.’라고 하는 표현은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는 사람들이 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니, 그들은 인생을 그저 흘려 보내고 피하며 지나쳐 가고 비켜서면서, 할 수만 있다면 마치 귀찮고 하찮은 것인 양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그와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삶의 끝자락에 와서도 그것은 여전히 가치 있고 기분 좋은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자연이 우리 손에 쥐여 준 인생은 그 많은 유리한 조건들이 갖춰진 것이어서, 인생이 우리를 짓누르고 소득 없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간다면 탓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 “분별없는 자의 인생은 기쁨이 없고, 그저 들떠 있으며, 온통 미래만 향하고 있다.”(세네카) 그러나 나는 아쉬워하지 않고 인생을 떠나 보낼 채비를 하는 중이니, 괴롭고 귀찮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본성상 잃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말이다. 또한 죽음을 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즐거이 사는 이들에게만 어울리는 일이다. 삶을 즐기는 데는 솜씨가 필요하다. 나는 남들보다 곱절로 즐기는데, 향유하는 정도가 다소간 우리가 삶에 얼마나 마음을 쏟느냐에 다렬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 삶의 시간이 너무도 짧은 것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의 무게를 확대하고 싶다. 시간의 신속한 소멸은 내가 시간을 민첩하게 붙들어 놓고 싶게 하며, 그 다급한 흐름은 내가 시간을 밀도 있게 사용함으로써 상쇄하고 싶게 만든다. 삶을 소유할 시간이 더 짧아질수록 나는 더 심오하고 더 충만하게 그것을 소유해야 한다.(599~600쪽)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과 비교해 보면 이 생각은 확연해진다. 그래서 나는 운명에 의해 혹은 그들 자신의 과오로 휩쓸려 가거나 내팽개쳐진 사람들, 그리고 나와 더 비슷한 처지이지만 그들의 행운을 너무 맥없고 덤덤하게 받아 든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그야말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희망의 노예가 되고 환상이 그들 코앞에 흔들어 보이는 그림자들과 헛된 상(像)들을 좇느라 현재를, 그리고 그들이 소유한 것을 흘려 보내니, 이 허상들은
사람들 말로 죽은 뒤에 여기저기 날아다닌다는 환영들이나
또는 잠든 우리의 감각을 속이는 꿈들과 비슷하니,
_베르길리우스
이것들은 사람들이 쫓아갈수록 더욱 빨리 더욱 멀리 도망간다.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인가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자기 일의 목적은 일하는 것 자체라고 한 것처럼, 그들이 추구하는 열매와 목표는 추구하는 것 그 자체이며,
한 일이 아직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_루키아누스(601~602쪽)
“너는 신들에게 복좀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호라티우스)
폼페이우스가 자기네 도시에 온 것을 기념해 아테네인들이 적은 멋진 비문은 내 생각과 맞는다.
그대가 인간임을 인정하는 그만큼
그대는 신이로다.
_플루타르코스, 아미요의 번역
자기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절대적 완벽함이요 신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조건들을 찾아다니며 우리 내면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밖으로 나간다. 죽마(竹馬)에 올라서 봐야 소용없는 것이 죽마 위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다리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왕좌에도 우리는 우리 엉덩이를 걸치고서야 앉게 되는 것이다.(607쪽)
노년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다뤄져야 할 필요가 좀 있다. 건강과 지혜를 지켜 주시라고, 그러나 쾌활한 지혜, 사람과 어울리는 지혜를 지켜 주시라고 저 신에게 이 노년을 의탁할 일이다.
라토나의 아들이여, 내게 오직 튼튼한 건강을 허락하고
내가 모은 재산을 쓸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고 비노니 내 정신 멀쩡하고
부끄럼 없는 노년이 되게 하며
아직도 리라를 켤 수 있게 하소서.
_호라티우스(608쪽)
*몽테뉴의 서재 들보에 새겨진 금언들
1. 인간이 갖춰야 할 최고의 지식은 닥친 일을 좋게 보고, 나머지는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전도서> 어딘가)
2.알고자 하는 갈망, 그것은 애간장을 태우라고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전도서> 1장 13절과 유사)
3.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 그거야말로 가장 달콤한 인생이다.
왜냐하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말 아프지 않은 병이니까.(에라스뮈스가 인용한 소포클레스)
13.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섹스투스 엠피리쿠스)
21. 자기가 뭘 좀 안다고 여기는 자는 아직 “앎”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코린트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8장 2절)
22. 인간은 나무것도 아니니, 자기가 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6장 3절과 유사)
34. 현재를 즐겨라, 나머지는 네 능력 밖의 일이다.(<전도서> 3장 22절과 유사)
37. 하느님은 사람을 그림자 같은 것으로 만드셨으니,
빛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면 그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전도서> 6장 12절과 유사)
38. 불확실성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보다 더 가련하고 더 오만한 것도 없다.(플리니우스)
41. 네가 가장 자부하는 것, 너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멋진 이미지, 바로 그것이 너를 파멸시키리라.(메난드로스)
42. 사람들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에픽테토스)
낭송 끝나자마자 일이 있어서 바쁘게 나가느라 늘 꼴찌로 필사를 올렸었는데, 마지막은 일등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놓쳤네요^^
금언들도 몽테뉴라는 사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삶을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인간적인 고귀한 삶을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내려는 몽테뉴가 느껴져 여운이 많이 남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신현숙 선생님
소감..
우리 행위의 변덕스러움과 어리석음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 이 불안정하고 다형적인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솔직하고 담백한 마음으로 자기 자리에서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몽테뉴의 문장들이 정신이 혼미하거나 몸이 지칠 때 문득, 자주 떠올려지기를 바라봅니다.
샘들과 함께하니 몽테뉴와의 아침 산책 너무 좋았습니다~♡
-동하 김미영 선생님
아침낭송은 몸과 마음을 청명하게 깨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몽테뉴의 『에세』가 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몽테뉴 낭송을 통해 얻은 ‘낭송과 필사로 시작하는 하루’라는 씨앗을 저의 것으로 키워가고 싶네요.^^
소감을 적으려니 낭송과 각자의 필사로 다채롭게 『에세』를 만나게 해준 학인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두 손 모아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감사드립니다.
-이경희 선생님
지난 한 해 몽테뉴의 에세 읽기로 아침을 채울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몽테뉴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소름 끼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보다 이런 생각까지 글로 남겼다는 점이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너무도 디테일하고 솔직함이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글은 세상을 관찰하여 그에 비추어 나를 견주어 보는 과정이었고, 자기의 한계를 지음으로써 자신을 알아가고 그 한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었던 거 같습니다. 글쓰기로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다시 한번 왜 공부하는지 왜 글을 쓰는지 저에게 설득시키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탁한 목소리와 불안정한 발음 들어주신 샘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정혜윤 선생님
끝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하는 몽테뉴 덕분에 지난 일년 낭송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늘 자신을 탐구하기보다 나 이외의 것에 시선을 두는 저로서는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었네요. 그래서 다른 것에 휘둘리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길을 놓쳤습니다. 이제라도 몽테뉴 덕분에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또 아침 잠이 많은 제가 아침 잠을 쪼~오끔 절제함으로써 이렇게 함께 낭송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습니다. 절제를 너무 과하게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도 남에게도 유용한 절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을 이끌어준 민호샘과 학인들께 감사드립니다.
-오경숙 선생님
그저 아침 시간에 깨어있고 싶어 낭송을 신청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몽테뉴라는 훌륭하면서도 매우 흥미롭고 인간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가 들려준 많은 고대의 이야기들과 문장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비추어 써내려 간 글들은 저에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지 알려주는 환한 등불이 되기도 했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촛불이 되기도 했습니다.
꼭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싶습니다.
목소리의 진동에 담긴 샘들의 삶과 마음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은이 선생님
읽고 싶은 목록에는 있었으나 도무지 엄두가 안 났었는데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침시간을 몽롱함이 아닌 명징함으로 맞이할 수 있었어요.
1년 간의 <에세> 낭송 시간은 무엇보다 다른 샘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이 충족되는 시간이었고, 소리 내어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었으며, 생생하고 진솔한 몽테뉴의 글을 만나는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몽테뉴 자신이 재료와 주제가 되어 쓴 <에세>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하죠. 한 페이지의 글을 쓸 때조차 그저 책 내용을 요약하거나, 사실을 나열하고 어설픈 견해와 판단으로 급마무리하여 도리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글을 쓰기 십상인데 몽테뉴를 통해 한 수 배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좌우명으로 삼아 사물에 대한 진정성을 담으려고 관찰, 기록하면서 의식을 전개하는 과정은 자신에 대해 주도권을 회복하고 삶과 죽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매번 문을 열어 주었던 민호샘과 여러 샘들 약간의 어설픈 인사와 표정, 목소리가 많이 생각날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촘촘 이미영 선생님
딱딱하고 지루하면 어쩌지..라는 약간의 우려를 갖고 시즌 3부터 합류했는데, 첫날 몽테뉴의 문장을 접하며 왜 샘들이 1년을 이어 오셨는지 알 수 있었어요. 유쾌, 솔직함이라는 강력한 무기와 잘 훈련된 눈길로 버무려진 문장들이 마음을 파고들어 왔습니다.
16세기 서양인의 입을 통해 ‘자연에 따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생소하면서도 재밌었습니다. 내꺼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그 둘을 분별하고 아닌 것은 내려놓기. 그즈음 겪는 일들과 몽테뉴의 문장들이 만나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고 방향을 잡아가기도 하면서.. 작은 사건들을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인 낭송리듬이 일상을 잡아주는 것 같았어요.
최근에 읽었던, 어떻게 신체적 쇠락과 노년,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특별한 시선과 지침은 지금 당면한 문제라 그런지 간절하게 읽히더군요.^^
매주 필사 문장을 정리하고 소회를 적어주신 민호샘의 후기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필사를 통해 다시 읽을 때는 샘들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함께해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_^ 아침 산책길에 또 뵐 수 있기를..
-양문영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