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모어니체) 두 번째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청년인 세헌샘이 합류했는데, 오자마자 뜨거운 관심과 격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역시 규문은 청년이 우대되는 곳이네요. 세헌샘도 규문의 니체 세미나 선택을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하더라구요.(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살짝 ㅎㅎ) 이번 시간에 우리는 『아침놀』 152~300쪽을 읽었습니다. 샘들이 관심을 갖고 메모를 해오신 것들은 크게 동정(연민)과 노동, 힘 등이었습니다.
= 어떤 동정인가.
- 동정은 그것이 정말로 고통을 낳는 한 유해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나약함이다.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아침놀 p156)
- 동정을 받을 경우 사람들은 모든 덕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동정을 베푸는 것은 경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아침놀 p158)
-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아침놀 p158)
니체는 동정에 대해서 늘 부정적이었습니다. 동정은 고통보다 더 강하다고 말하지요. 동정은 이웃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에 갇힌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정이라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가. 연민과 같은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누었는데요. 인간은 자신이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이런 동정의 감정이 일어나는데, 동정은 자신과 상대를 모두 약자로 만듭니다. 경희샘이 ‘어떤 동정이냐’가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마음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요즘 전쟁이 한창인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동정이라고 하면 그게 비판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죠. 그 부분에서는 약간 이견이 있었는데, 전쟁의 폐허가 된 팔레스타인을 위한 마음은 동정과는 좀 다른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얽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어요. 전쟁의 폭력성, 연대하는 감정 등 복합적인 감정이 있을거라는 거죠. 이럴 때 어떤 동정인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동정과 연민, 공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는데 뭔가 명료하게 해결이 안된 느낌이었네요.
니체는 항상 힘을 문제 삼지요. 누군가에게 동정심이 생겨 도움을 줌으로써 자신이 우월감이나 쾌감을 느낀다면 타인으로 인한 ‘쾌’를 느끼는 것인데, 그건 니체가 말하는 약자, 수동적인 힘입니다. 동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동정심을 호소하는 경우도 문제가 되지요. 동정의 마음은 스스로의 힘을 고갈시키고 모두에게 건강하고 명랑한 삶을 훈련할 기회를 박탈합니다. 니체는 동정은 병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치유되어야 하는 거지요.
= 어떤 노동인가.
- 사람들은 지금 이러한 노동- 이때의 노동이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행해지는 저 고된 노동을 의미한다-를 보며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아침놀 191쪽)
- 아! 인격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 (…) 오히려 그대들이 해야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면적 가치가 그러한 외면적인 목표를 위해 포기되는지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민을 가자. 세계에 아직 남아 있는 야만적이고 신선한 지역의 주인이 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주인이 되려고 하자. (아침놀 227쪽)
이번에 새로 합류한 세헌샘은 일은 싫지만, 최소한 먹고 잘 곳은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알바를 해도 시급이 9,620원 밖에 못 받는 것이 비참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몸값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질문을 했는데 니체를 읽으면서 그 답을 찾고 싶다고 하네요. 우리는 왜 그 시급 때문에 비참함을 느껴야 하느냐, 그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왜 하게 되었냐 등 질문들을 세헌샘께 드렸습니다.
니체는 노동을 하지 말라. 직업을 갖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노동인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요즘 크크랩에서 핫하게 읽고 있는 책이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인데요. 어렵기도 하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고니의 삶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목수이며 시인인 고니는 마루 까는 일을 하는데, 노동과 시를 쓰는 일에서 위계가 전혀 없습니다. 일을 할 때는 마치 그 일을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즐기며 몰두하죠. 매번 그 영역에서 실존을 다르게 구성하고 있는 고니는 어느 한 정체성에 가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위계 없이 주변과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으까요. 공부를 하면서 저는 직장일보다 규문 공부나 책을 읽는 일이 훨씬 고귀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 스스로 위계를 만들고 하찮게 생각하는 일들은 대충 넘기거나 지나치는 경우도 많죠. 직장에서의 일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오롯이 긍정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공부는 어떤가요. 니체의 말처럼 노예 제도에서 벗어나려면 죽을 각오로 하라고 하지만 적당히 피하면서 안죽을 만큼만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일과 공부,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능동적으로 관계 맺으며 살 수 있을까요. 니체를 만나면서 함께 풀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두 번째 세미나는 책을 읽으면서 각자 궁금하거나 풀리지 않는 것들(니체는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동정은 연민과 같은가? 등등)을 질문하고 마쳤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가버렸네요.
* 담주 간식과 후기는 경희샘입니다. 책은 아침놀 끝까지 읽고 옵니다.
승연샘! ㅋ 빠른 후기를 올리셨네요. 무엇보다 니체가 도덕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힘에의 의지'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려고한 것인데, 이 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주인(지배,명령)이 되려고 하죠. 동정이나 연민에서 느끼는 우월감이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힘에의 의지'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비판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동정이나 연민을 가지지 말라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불교에서 보시를 할때처럼 아낌없이 주는(~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의식없이) 주어도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노동의 문제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언제나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죠. 청년들에게는 더 큰 문제일것 같고요. 알바 시급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느낀다는 청년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는데요.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밤에서 노동하는 자의 정체성에서 노동과 자기 자신, 실존을 분리하는 분할선에 대한 많은 논의들을 다루었지요. 이제 일을 마무리 단계에 있는 저와는 다른, 이제 앞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청년이 느끼는 비참함이 사실은 잘 와닿지 않았어요...^^ (ㅎㅎ 양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