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군요. 이제 낭송 시작 전부터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아침의 왕이 되기에 아주 좋은 나날입니다 ㅎㅎ
이젠 에픽테토스의 문장들에 좀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문답을 이어가고, 무엇보다도 당당하고 강인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철학은
인상에 대해서 응답하는 능력 외에 다른 것은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철저히 인정함에서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나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사건들 앞에서 정념에 빠지 않기를 '운동선수처럼 훈련할 것'을 요청합니다.
자기 판단과 자기 믿음과의 철저한 대결.
어떤 사건도 내 뜻대로가 아니라,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교육과정.
단번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경계와 훈련의 시간을 기다림.
누군가 나의 것을 가져가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나 자신의 마음이 끄달린다는 점에 대해서 화를 내야 마땅함.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한 자신의 좋음을 누릴 수 없도록 설계된 존재라는 인간 이해로부터의 자기애와 자기 돌봄.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영혼을 무장하고 단련하기에 무척이나 유용한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산만해지는 봄, 마음의 힘을 쭉쭉 길러 왕이 되어가는 과정이 유쾌하기만 합니다!
6장 섭리에 대하여
그러므로 비이성적인 동물들이 행하는 곳에서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인간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네. 오히려 인간은 그것들이 행하는 그곳에서 시작하고, 자연이 우리와 관련해서 끝냈던 그곳에서 끝내야만 하는 것이네. 자연은 사물의 탐구와 이해에서, 자연과 조화하는 삶의 방식으로 끝냈던 것이네. 자연은 사물의 탐구와 이해에서, 자연과 조화하는 삶의 방식으로 끝냈던 것이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모든 실재(현실)를 관조하지 못한 채로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만 하네.(81쪽)
너희가 하는 것처럼 이 능력들을 자유롭고 또 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너희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네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며, 오히려 거기에 앉아 슬픔에 빠져 신음하면서, 너희 중 몇몇은 주는 자 자신을 향해 눈이 멀어 있으며 또 너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반면에 다른 이들은 정신의 비열함 때문에 신에 대한 비난과 불평을 하도록 잘못 이끌리게 되는 것이네! 그럼에도 혼의 위대함과 용기를 위해, 너희가 자력(自力)과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줄 터이니, 반면에 너희는 비난과 불평을 정당화해 주는 어떤 자력을 가지는지를 나에게 보여주도록 하세!(87쪽)
10장 로마에서 고관으로 나아가려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인간이 실천적이지 않은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네. 오히려 어떻게 우리 철학자들이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먼저 나 자신을 보자. 날이 밝아 오자마자, 강의 시간에 내가 읽어야만 할 책을 간략하게 떠올리고, 그런 다음 즉시 나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잃느냐가 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지? 우선 중요한 것은 내가 잠을 좀 자야 한다는 것이야.’(116~117쪽)
그들이 완전히 깨어 있으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함께하기를 열망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도 그들의 열정적인 노력과 나의 노력이 함께 하기를 한층 더 많이 열망했을 것이네.(118쪽)
11장 가족 사랑에 대하여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게 하는 것은 죽음도, 추방도, 고난도, 그런 종류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판단과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이것에 대해 당신을 설득했나요, 아니면 하지 못했나요?
‘나를 설득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각각의 경우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또한 그 결과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날로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가 했던 대로 행하도록 이끌었던 판단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탓을 돌리지 말고, 우리 몸의 종양과 농양 이상으로 그것을 파괴하고 잘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올바르게 행위한 것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인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판단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행위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확인했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나 이웃, 아내나 아이들이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나쁜 것에 대한 탓(책임)이 있는 것인 양,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지, 우리 자신 바깥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겁니다.(128~129쪽)
12장 마음의 만족에 대하여
그러나 무엇보다 앞서, 우리는 각각의 이러한 입장들에 관해 그것이 건전하게 주장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들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을 따르는 우리의 목표가 건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와 달리 신들이 존재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더라도 신들과 인간 사이에 소통이 전혀 없다면, 실제로 제우스를 통해서, 적어도 그들과 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어떻게 그 경우에서조차 신을 따른다는 생각이 여전히 건전할 수 있겠는가?(133쪽)
좋은 시민들이 폴리스의 법에 복종하는 것처럼 우주를 통치하는 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키는 것이네. (...)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자신의 의지(프로하이레시스)에 따라 일어나며 누구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기 때문이네.(134쪽)
오히려 참된 교육은 각각의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배우는, 바로 이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네.(135쪽)
우리가 가서 교육을 받는 것은 사물의 이러한 정함[조정, 질서]을 기억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의 질서를 변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이것은 우리에게 허용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한느 것이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주위의 사건들은 그것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또 그것들의 본성이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므로, 우리 쪽에서는 우리의 지성을 앞으로 일어날 일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네.(136쪽)
그리고 너는, 자네가 탄생할 때 함께하며, 자네의 운명의 실을 뽑아 준 운명의 신들(모이라이)과 협력해서, 제우스가 규정하고 또 정했던 그의 칙령에 대해서 분노하고 불만을 터뜨릴 텐가? 전체에 비교해서 너의 부분이 얼마나 작은지 알지 못하는가? 너의 신체에 관련해서 그렇다는 말이네. 그러나 적어도 이성에 관련해서는, 너는 신들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또한 그들보다 더 작은 것도 아니네. 왜냐하면 이성의 크기는 길이와 높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판단의 질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기 때문일세. 그러면 너는 너를 신들과 동등하게 만드는 그 점에서 너의 좋음을 기꺼이 두지 않겠느냐?(138쪽)
네가 시각의 힘을 소유한 목적에 대해 무지했다면, 어떤 색깔이 너에게 나타날 때 너의 눈을 감으면 너는 불행하고 비참하게 될 것이네. 하지만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혼의 큼과 고귀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더 불행하고 비참해지지 않겠는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기능에 적합한 대상들이 너에게 가까이 제시되지만, 너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열어 두고 완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바로 그 순간에 그 기능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이네.
오히려 신들이 너희에게 달려 있는 것 안에 놓아두지 않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 또 단지 너희에게 달려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하신 것에 대해 신들에게 너희는 감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너희 부모에 관련해서는 신들이 너희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 주셨다네. 또한 너희 형제들과 자매들, 너희 신체와 재산, 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네. 그렇다면 신들이 너희들에게 책임을 지게 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단지 너희에게 달려 있는 것에 대해서만―네 인상의 올바른 사용이네. 그렇다면 너희가 책임이 없는 것들에 대해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 그것은 너희 스스로 근심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네.(139~140쪽)
14장 신들이 우리 모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너는 신적 통치 질서와 신적 작용(현상)의 각각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사에 관해서도 숙고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생각하라. 너는 너의 감각과 지성 모두에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판단을 중지하는 것과 같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음을 생각하라. 너 자신의 혼 속에 그렇게 많은 다양한 대상들로부터 오는 그렇게 많은 각인들(인상들)을 보존하고 있으며, 그 각인들에 의해 움직여지게 됨으로써 너의 정신은 처음에 혼에 새겨진 각인들에 상응하는 개념들을 떠올리는 것이네. 이렇게 해서 너는 이렇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항으로부터 기술들과 기억들을 차례로 이끌어 내며 보존한다는 것을 생각하라.(146쪽)
그러므로 네가 문을 닫고 방 안을 어둡게 했을 때라도 혼자라고 결코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실상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신이 너희 안에 있으며, 너희의 영(다이몬) 또한 네 안에 있으니까 말이네. 그리고 너희가 하는 일을 보기 위해 그들이 빛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148쪽)
15장 철학은 무엇을 약속하는가
누군가 에픽테토스에게 어떻게 하면 그의 형이 자신에 대해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는지를 상담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인간에게 어떤 외적인 것들 중 하나를 획득한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은 그 고유한 주제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증하게 될 테니까 말이네.(150쪽)
‘모든 상황에서 나는 자연 본성에 따라 “지도하는 중심”(지배하는 원리)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네.―누구의 지도하는 중심인가?―내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지도적 부분이다.(151쪽)
에픽테토스의 조언을 구하던 그 사람이 그때 말하길,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 형이 나와 화해하기를 기꺼워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자연 본성에 맞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픽테토스가 대답했다.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별안간에 생기는 것은 없으니, 심지어 포도 한 송이나 무화과조차도 그런 것이네. 지금 자네가 나에게 ‘무화과를 원해요’라고 말하면, 나는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고 대답할 것이네. 무화과 나무가 먼저 꽃을 피우게 하고, 그다음에 열매를 맺게 하고, 그다음에야 열매가 익도록 하라. 무화과나무의 열매조차도 별안간에, 단 한 시간 안에 다 완성되지 않는데, 인간 정신의 열매를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또 그렇게 쉽게 거두어들이려고 해야 쓰겠느냐? 내가 너에게 스스로 그것을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것을 기대하지는 말라.(152쪽)
16장 섭리에 대하여
절름발이 노인인 내가 신을 찬미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의 일을 할 것이고, 백조라면 백조의 일을 할 것이네. 허나, 사실상 나는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하네. 이것이 나의 임무이네. 나는 이 일을 할 것이며, 또 이 자리가 나에게 주어지는 한, 이 직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나는 너희들에게 바로 이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는 것이네.(156쪽)
17장 논리학은 반드시 필요한 것
정말로 경탄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자연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 그럼 너 스스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우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잘못을 저지르는 모든 사람이 의지에 반해서(비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 참이고, 네가 그 참을 완전히 알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네가 이미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는 것이네.(163쪽)
18장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화내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해는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하는 것이고,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의지(선택, 프로하이레시스)인 이상, 그것을 결여한 사람이 있다면, 네가 그에게 여전히 화를 낼 무슨 이유가 남아 있는가? 인간아, 네가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해 정말로 자연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느낌을 품어야 한다면,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해야만 하는 것이네.(170쪽)
그렇다면 왜 화를 내는가? 그것은 우리가 빼앗긴 사물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네. 그러니 너의 옷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너는 도둑에게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네. 아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것을 그만두게, 그러면 너는 간통한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네. 도둑과 간통하는 자는 너 자신의 것들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며, 그들의 자리는 다른 어딘가에 있으며 또 너에게 달려 있는 것들 영역 바깥에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이것들을 물리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면, 누구에게 여전히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들을 중시하는 한, 너는 그 사람들보다는 너 자신에게 화를 내야만 하는 것이네. 이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을 생각해보라. 너에게는 좋은 옷이 있고, 네 이웃은 갖고 있지 못하며, 너희 집에는 창문이 있고, 옷을 바람을 쐬어서 말리기를 원하네. 옆 사람은 인간의 진정한 좋음이 무엇인지 않지 못하지만, 좋은 옷을 소유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너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네. 그러면 그 사람이 찾아와서 그 옷을 훔쳐 가지 않겠는가? 대식가에게 케이크를 보여 주고, 그런 다음 나만 그것을 게걸스레 다 먹어치운다면, 너는 패거리들에게 그것을 빼앗아 가라고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자극하지 말라! 열린 창문을 갖지 말라! 너의 옷을 바람에 쐬지 말라!(170~171쪽)
‘머리가 아파요.’ 슬픔을 표현하지 말라. ‘귀가 아파요.’ 슬픔을 표현하지 말라. 그런 일에 신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신음하지 말라는 것이다.(173쪽)
19장 참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네가 내 앞으로 올 때는,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냐?’
전혀 안 하네. 오히려 나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이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돌보겠다고 한다면, 나는 도자기 항아리를 돌보라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네.
이것은 단순한 자기애의 문제가 아니네. 오히려 모든 동물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는 그런 본성이 있기 때문이지. 해조차도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며, 실제로 제우스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이네. 그러나 제우스가 ‘비를 주는 자’, ‘과일을 주는 자’,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할 때, 너는 그가 공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그러한 일을 성취하거나 그러한 호칭을 얻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제우스는 이러한 자연 본성을 가진 이성적인 동물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공통의 이익에 무언가를 기여하지 않는 한 어떤 그 자신의 고유한 좋음들을 얻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네. 그래서 그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더 이상 반 공동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는 것이네.(178~179쪽)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