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이제 몽테뉴를 읽기 전에 깜깜한 계절이 왔습니다. 다 읽을 때쯤이면 동이 트는 것 같아요.
4장 '기분전환에 관하여'에서는 정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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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혼을 동요시키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실체도 없고 종잡기 어려운 몽상이 그것을 지배하고 동요시킨다."
언제나 종잡기 어려운 미세한 흐름들이 우리 영혼을 동요시킨다는 말,
어쩐지 요즘 배우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개념이 떠오르네요.
5장 '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에 관하여'에서도 흥미로운 대목들이 이어집니다.
특유의 명랑함과 유쾌함, 또 진솔함의 문제들이 제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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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겁고 사교적인 지혜가 좋으며, 풍속의 조야함과 엄격함을 피하고, 모든 따분한 얼굴을 수상쩍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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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에게 그것을 숨기는 자들은 대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몽테뉴가 자신의 <에세>가 부인들의 '안방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줄 것' 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과 관련된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자연스럽고 그렇게 필수적이며 그렇게 당연한 성 행위는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가 술에 취하지 않고는 감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며, 진지하고 절제된 이야기에서 그것이 제외되는 것일까?"
라고 말하며, 몽테뉴는 사랑과 성욕을 둘러싼 일화들과 의견들을 쭉쭉 재미나게 이야기합니다.
비몽사몽한 아침 졸음이 확깨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나날입니다^^
그럼 부분적이지만 필사로 만나보시죠!
4장 기분 전환에 관하여
복수심은 달콤한 정념이며 우리 안에 천성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 경험이 내겐 전혀 없지만 나는 그것이 잘 보인다. 최근에 한 젊은 군주를 이 정념에서 벗어나게 하려던 나는, 자비의 의무를 위해 자기 뺨을 때린 자에게 나머지 뺨도 내주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또한 문학에서 이 정념 탓에 생기는 것으로 묘사하는 비극적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다. 복수 이야기는 놔둔 채, 그 반대되는 그림의 아름다움을 그가 맛보게 하는 데 전념하며, 그가 관용과 선함으로써 얻게 될 수 있는 명예, 인기, 호의 등을 보여주었다. 그의 주의를 야심으로 돌린 것이다. [복수심은] 이런 식으로 다뤄야 한다.(88~89쪽)
우리의 고통에 대한 최상의 의사로서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시간이며, 시간은 우리 상상력에 다른 일거리들을 연이어 제공함으로써 아무리 강력한 것이었을지언정 처음의 느낌을 해소하고 부셔 버리며, 주로 이 방식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라면 죽어 가는 자기 벗의 모습을 이십오 년 지났다고 해서 그 이듬해보다 덜 [생생하게] 보게 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그것은 조금도 덜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고통이란 미리 예견해 봐도, 지난 지 오래되어도 그 때문에 완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다른 생각들이 처음의 생각을 가로질러 넘어 다니다 보니 결국 처음 생각은 약화되고 지치게 된다.(90~91쪽)
대수롭지 않은 일이 우리 기분을 풀어 주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우리를 붙들어 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크게, 그것만 바라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그 세부적이고 피상적인 상황과 영상들이며, 사물들로부터 벗겨 떨어지는 공허한 껍질들이니,
여름에 매미들 몸에서 벗는 저 가벼운
날개들처럼
_루크레티우스
플루타르코스마저도 자기 이 어린 시절에 했던 우스꽝스런 짓들을 떠올리며 애통해한다. 어떤 작별, 어떤 행동, 어떤 특별한 호의, 어떤 마지막 충고의 기억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죽음 자체는 정작 그러지 않았는데 피가 낭자해진 그의 겉옷은 온 로마를 동요시켰다. 우리 귓가를 울리는 저 이름 부르는 소리들, ‘불쌍한 우리 주인 나리!’라거나 ‘내 귀한 친구여!’ ‘아, 사랑하는 내 아빠!’ 혹은 ‘내 착한 딸아!’처럼, 늘 듣는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해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지 문법과 음성으로 된 탄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와 어조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마치 설교자들이 청중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흔히 그들의 추론보다는 외침이듯이, 그리고 우리가 쓰려고 도살하는 짐승의 구슬픈 울음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사태의 참되고 진실한 본질을 꿰뚫어 본다거나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 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런 강렬한 자극들을
통해서다.
_루크레티우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애통함의 토대들이다.(92~93쪽)
“동기가 시시하네!”하고 당신은 말하리라. 동기라니, 무슨 뜻인가? 우리 영혼을 동요시키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실체도 없고 종잡기 어려운 몽상이 그것을 지배하고 동요시킨다. 내가 스페인에 성을 몇 채 지어 보려니 하는 식으로 황당한 생각을 하면, 내 상상력은 안락함과 쾌락을 내게 만들어 주고 내 영혼은 정말로 스르르 흔들리면서 즐거워한다. 그런 환영들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정신을 분노나 슬픔으로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며, 가공의 정념 속에 우리를 밀어 넣어 우리 영혼과 육체 모두를 변질시키는 것인가! 몽상은 우리 얼굴에 왜 그리 놀라고, 웃고, 당황하는 표정을 그려 넣는 것인가! 왜 그리 팔다리가 절로 움직이고 목소리는 흔들리게 하는 것인가!(96~97쪽)
5장 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에 관하여
“울적한 심사는 농담으로 흥겹게 하는 것이 좋다.”(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 나는 즐겁고 사교적인 지혜가 좋으며, 풍속의 조야함과 엄격함을 피하고, 모든 따분한 얼굴을 수상쩍게 여긴다.(106쪽)
덕성이란 기분 좋고 유쾌한 자질이다.(107쪽)
“생각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작자 미상) 나는 자기 삶의 즐거움들에 무감각한 채 그 위로는 미끄러지듯 스쳐 가면서도, 불행과 드잡이하며 그것을 먹고 사는 까다롭고 음울한 정신을 싫어한다. 윤기 나고 매끄러운 몸에는 견디지 못하고 우툴두툴하고 거친 곳에만 달라붙어 쉬는 파리들처럼, 또한 나쁜 피만을 들이마시며 찾아다니는 거머리처럼 말이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감히 하려 드는 일은 감히 이야기하도록 지시해 두었으며, 공개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일을 생각하는 것마저도 내게는 불편하다. 내 행위나 생활 방식 중 최악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태도의 추하고 비겁함만큼 추하지는 않으리라. 누구나 고백하는 일에는 조심스러운즉,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과오를 저지르는 무모함은 그것을 고백하는 무모함에 의해 어느 정도는 상쇄되고 제어도니다. 모든 것을 말하기로 다짐하는 사람은 침묵해야만 하는 일 따위는 조금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셈이다. 내 과도한 무모함이 우리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저 비겁하고 허울뿐인 미덕을 넘어 자유로 나아가게 해주기를! 그리고 나의 무절제함을 대가로 내가 그들을 이성의 지점으로 이끌어 올 수 있기를! 자신의 악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바라보고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이에게 그것을 숨기는 자들은 대개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이면 충분히 감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양심 앞에서 그것을 따로 빼내어 감추는 것이다. “패덕한 자가 자기 악덕을 고백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그가 그 악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세네카)(107~108쪽)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된 칭찬에 배가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를 보고 있고, 배 속까지 나를 연구하며 내게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더 정확히 알려져 있기만 한다면 칭찬을 덜 받아도 나는 기쁘다. 내게는 어리석다고 보이는 것을 지혜로움이라고 여기며 사람들이 나를 현자로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111~112쪽)
아라곤 여왕은 이에 주목할 만한 결정을 내렸다. 자문 회의를 통해 충분히 숙고한 나머지 이 선한 여왕은, 정당한 결혼에 요구되는 절도와 겸손의 규칙과 본보기를 모든 시대에 통용되게끔 제시하기 위해, 합당하고 필수적인 횟수를 하루 여섯 번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 말로는, 자기네 여성의 필요와 욕구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내주는 것이로되, 쉽고 따라서 항구적이며 변경할 수 없는 공식을 확립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126쪽)
그네들 욕망의 타고난 격렬함이 그네들에게 마련된 두려움과 명예심으로 얼마간 고삐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치욕을 겪었으리라.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이 짝짓기로 나아가고 그것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도처에 스며든 질료이고, 만물이 시선을 향하고 있는 중심이다.(132쪽)
“확실한 것은, 절제를 위해서는 무절제가 필요하고, 화재는 불을 써서 끌 수 있다는 사실이다.”(테르툴리아누스)(133쪽)
플라톤은 신들이 우리에게 말 안 듣고 폭군 같은 기관을 주었다고 한다. 이 기관은 마치 거친 짐승처럼 그 욕망의 광포함으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는 게걸스럽고 탐욕스런 짐승을 붙여주었는데, 제때에 양식을 주지 않으면, 지체되는 것을 견뎌 내지 못하고 광증을 보이며, 여성들의 몸 안에 자기의 광기를 불어넣어, 기혈을 막히게 하고 호흡을 멈추게 하는 등 수많은 병증을 낳게 하는데, 너나없이 갈망하는 과실을 빨아들여 자궁 바닥까지 충분히 적시고 씨앗이 뿌려지고 나서야 멈춘다고 한다. (...) 여성들이 상상의 자유와 열기에 따라 그것을 스스로 짐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실제를 알도록 해 주는 것이 보다 정숙하고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았어야 했다.(136쪽)
악덕에 대한 이 얼마나 불공정한 평가인가! 우리나 그녀들이나 음행보다 더 해롭고 더 타락한 부패 행위를 몇백 가지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이 아니라 우리 이해관계에 따라 악덕을 만들어 내고 평가하며, 그 때문에 악덕들의 모습이 우리 눈에 그토록 달리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엄혹성으로 인해 여성들의 악덕은 본래 성격보다 훨씬 맹렬하고 고약하게 취급되며, 그래서 원인보다 더 나쁜 결과를 빚게 만든다.(140쪽)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자기 전부보다 여자가 주는 얼마 안 되는 것이 여자로서는 더 비싼 대가일 수 있다. 어떤 일에서는 희소성이 그 가치를 더한다면 바로 이 경우가 그럴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적은지는 살피지 마라, 대신 그것을 가지게 된 사람이 얼마나 소수인가를 보라. 화폐의 가치는 주형과 주조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진다.(142쪽)
흥미진진한 몽테뉴의 배-속 여행, 그의 예리한 눈에 제 뱃속까지 털려 멀미가 날 때도 있지만요 ㅋㅋ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정리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