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동안 이어진 <베르그손을 읽자> 세미나가 채운샘의 정리 강의로 모두 끝이 났습니다. 원래 일정에는 없던 강의였는데요, 시즌 3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기 시작한 저희가 맥락을 잡지 못해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샘께서 마지막 정리 강의를 제안해주셨어요(감사합니다!). 8주차 세미나를 마치고 이제 더는 월요일 저녁마다 모여 베르그손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밀려들던 참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줌이 아닌 규문에서 직접 만나 함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강의는 세미나에서 풀지 못한 궁금증들이 해결되는 시간이기도 했는데요, 샘께서 주요 저작들의 맥락과 함께 <두 원천>의 핵심 부분을 다른 저작들과 연결시켜 설명해주셔서 전체적으로 중요한 지점들을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강의로부터 시간이 좀 많~이(^^;) 지났지만,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베르그손의 주요 저작들을 관통하는 ‘지속’ 개념
1889년에 쓰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베르그손의 첫 저작입니다. 이 첫 저작에서부터 1932년에 쓰인 마지막 저작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까지 베르그손의 주요 저작들은 일관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의 문제에서 삶의 문제, 윤리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동안 계속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지속’이라는 개념입니다. 지속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연속해서 흐르는 하나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샘께서 짚어주셨듯이, 지속의 핵심은 ‘끊이지 않는 흐름’입니다. 베르그손은 세계의 본질적인 속성을 지속으로 보았고, 모든 저작에서 ‘공간적 표상’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죠.
공간적 표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쪼갤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 세계를 쪼개진 것들의 총합으로 보는 관점이지요. 우리는 ‘시간’도 이처럼 공간적 표상을 덧씌워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은 ‘시간은 존재한다. 그것은 공간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우리가 시간을 공간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공간적 표상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공간적 표상은 ‘양적 사고’이기도 한데, 우리가 늘 하는 생각들 가운데 ‘더하다, 덜하다’와 같은 양적 사고에 기반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요.
끊이지 않는 흐름이라는 점에서 지속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끊이지 않는 흐름과 그 흐름 속의 개체들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샘께서 자주 예를 들어주시는 바다의 그림을 가져와보면, 우선 바다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하나의 전체, 지속의 흐름입니다. 그 흐름은 자신의 리듬으로 흘러가고, 그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 바다 속을 헤엄치는 나와 물고기들은 바다의 리듬 속에서 각자 자신의 리듬들을 만들어내며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들은 당연히 서로에게 진동을 전달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흐름 속에서 모든 개체들이 상이한 리듬들과 진동들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나도 나의 리듬을 형성하면서 흘러가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직관’입니다. 그러니까 직관이란 ‘지속 속에 우리가 있음을 아는 것’, 즉 ‘지속의 체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샘께서는 지속이 ‘체험적인 것’이라고 하셨죠.
<시론>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 의식과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 즉 의식의 조건인 지속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베르그손은 다양한 의식상태들을 예로 들며 세세하고 친절하게, 그것도 독자가 못 알아들을까봐 수시로 반복하며 설명하고 있어서, 세미나 시간에 감탄하며 베르그손의 문체와 서술 방식에 관해 이야기 나눈 기억이 떠오르네요. <시론>은 지속으로서의 우리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샘께서 정리해주셨죠. 그 다음으로, 이런 의식이 물질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의 문제를 탐구한 것이 1896년 저작인 <물질과 기억>입니다. 지속과 물질,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도식이 그 유명한 ‘원뿔 도식’이지요. 원뿔의 꼭지점이 닿아 있는 물질의 평면, 그곳에서 운동하는 것들에게 ‘그 자체로 보존되는 기억(과거/정신)’이 수축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물질과 정신은 함께 한다고 베르그손은 설명합니다. 이후 1907년 저작인 <창조적 진화>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결합되는 방식으로 진화해온 전체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생명 전체의 진화과정 속에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본능과 지성으로, 그리고 그것들을 넘어가는 직관으로 진화되어 갈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종교 감정, 이 세상에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
<창조적 진화>를 쓰고 난 후, 한 인터뷰에서 베르그손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의 논의로 윤리나 도덕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밝히고, 인간 정신의 진화를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설명해냈지만, 과연 그러한 설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당연히 그 문제와 연결되는 전제 아래에서 썼고, 언젠가 그 문제도 다룰 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32년에 출간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바로 그 답이 되는 저작입니다.
<두 원천>을 쓰기 전에 베르그손은 ‘종교 감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 세상에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 ‘홀로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전체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 같은 것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의 저자인 윌리엄 제임스라고 하는데요, 그의 시각에 깊이 공감한 베르그손은 그와 서신을 교환하고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가 관념이 아닌 정서의 문제이고 체험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베르그손은 종교와 도덕 모두 1차적으로는 정서의 문제이고, 온몸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힘의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느낌으로만 남는다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기에 그 체험을 언어화하고 논리화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 정서적 체험을 어떻게 해서든 공유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종교라고 베르그손은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원천>에서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으로 두 가지 정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표면적인 정서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기쁨, 슬픔처럼 경험적 표상의 결과로 산출되는 감정을 말합니다. 베르그손은 이를 ‘지성 이하의 것(닫힌 것, 정태적인 것)’이라고 부르는데요, 이와는 다르게 지성의 표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성을 넘치는 정서가 있지요. 저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심층적인 정서들은 ‘초지성적인 것(열린 것, 역동적인 것)’이라 불립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체험, 직관적 체험이고, 이 세상에 내가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 저 근원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성과 언어로 분절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죠. 그래서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이미 정태화된 것, 정태적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본질, 엘랑 비탈(élan vital)
그런가 하면 지성을 넘쳐흐르는 정서, 종교적 체험은 역동적 종교, 신비적 직관, 신비주의라고도 불립니다. 샘께서는 이 신비주의가 베르그손에게는 <창조적 진화>에서의 진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셨죠. 이 진화 과정 속에서 모든 개체가 자신을 현실화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직관의 능력이고요. 그 능력이 지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지, 사실과 무관하거나 어떤 초월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도 하셨지요. 베르그손은 ‘완전한 신비주의’를 “행동이고, 창조이고, 사랑”(<두 원천>, 329쪽)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베르그손에게는 신의 본질이 ‘엘랑 비탈(생의 약동)’이라는 샘의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엘랑 비탈은 <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의 끊임없는 추진력, 분출력을 뜻하는 말로 등장합니다. 인류는 중단될 수 있지만,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이어지는 이 생명 자체의 과정은 계속 이어지지요. 이 생명의 과정, 진화의 과정 속에 내재되어 있는 창조적 힘 또는 에너지가 베르그손에게는 ‘신’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관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 유물론적으로 느껴졌고, 교황청에서는 그의 저작들을 금서로 규정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저희에게는 <두 원천>이 너무나 종교적으로 느껴지는데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두 원천>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계주의의 기원에 신비주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정반대로 느껴지는 이 두 가지가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저희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샘께서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문명’의 시작도 ‘이로운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짚어주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고 베르그손은 보는 듯합니다. 신체의 진화, 기계의 진화를 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 베르그손은 지금 우리가 놓인 상태를 그렇게 진단합니다. 하나의 힘이 극에 달하면 잠재해 있던 다른 힘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베르그손의 시각임을 생각하면, 그는 이제 저 근원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 신비주의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조건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베르그손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강의를 마지막으로 모든 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지난 겨울 강독 강좌를 시작으로 1년간 베르그손과의 인연을 이어왔네요.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시구를 되뇔 때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시구를 창조했던 순간의 셰익스피어나 단테가 된다’고 한 보르헤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계묘년 한 해 동안 수없이 베르그손이 되었던 겁니다!^^ 함께 베르그손이 되어준 샘들께, 그리고 뒤에서 불안불안 지켜보시다 마지막에 등판해서 확실하게 마무리해주신 채운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마지막 후기를 마칩니다.😊
베르그손 저작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던 것 같아요. 정말 개념을 어찌나 친절하게, 섬세하게 알려주는지, 그리고 외우고 싶은 문장이 넘쳐날 정도로 글을 참 잘 쓰시는지, 여러모로 존경과 감동이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베르그손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강한 선입견 때문에, 베르그손이 얘기하는 신, 사랑이 잘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강의 덕분에 이것이 엘랑 비탈이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이란 걸 알게 되었네요. 나름 강렬하게(?)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분주함과 산만함으로 베르그손과의 만남이 금방 휘발되었는데, 샘의 후기 덕분에 다시 되살리게 되었습니다. 정갈하게 정리해준 후기 감사해요.😊
베르그손과 함께했던 계묘년의 한 해는 참 멋있었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지성 너머의 감정으로서의 직관. 종교성을 세상에 혼자 있지 않다는 공동의 존재감으로 정의하는 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교와 철학의 경계는 어디인지, 지성과 직관의 경계는 어디인지가 계속 다시 질문되는 한 해였습니다. <두 원천>마지막에 제안되는 결단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극한의 기계주의 앞에서, 절망이나 체념이 아니라면 어떻게 오늘을 꾸려갈지를 계속 질문해가야겠습니다~ 정성들여 남겨주신 후기에 뒤늦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