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늦게 뜨긴 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겨울날이 이어지고 있네요.
그래도 몽테뉴와 함께하는 아침은 계속 이어집니다!
저희는 현재 <에세>3권 5장 '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에 관하여'를 계속 읽어가고 있는데요.
5장은 무려 백 쪽이 넘는 분량 동안 여러 다양한 토픽들이 등장하는데요, 그것들을 다 꿸 수 있는 단어는 '쾌활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읽은 문장에도 나왔듯, "철학은 자연스런 쾌락과 싸우지 않는다"는 것, "덕성이란 기분 좋고 유쾌한 자질"인 것이죠.
니체가 좋아했던 몽테뉴는 종교와 철학의 심각하고 비장한 얼굴에 반대했습니다. 중요한 건 가벼움과 변화와 역설과 웃음입니다.
5장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비너스 및 성욕에 대한 아주 긍정적인 이미지들 역시 생의 쾌활함이라는 맥락과 닿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서 이번 주의 필사들을 보시겠습니다!
연약하고 저항력 없는 이들 가여운 영혼을 질투가 사로잡으면, 그녀들이 그 힘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느라 가혹하게 시달리는 모습은 가련하다. 질투는 우정을 구실로 스며들어 오지만, 일단 이들 영혼을 사로잡고 나면 호의의 토대가 되었던 똑같은 이유가 극심한 증오의 기초가 된다. 마음의 병 중에서, 키우는 것들은 너무 많으나 치료해 주는 것은 거의 없는 병이다. 남편의 덕성, 건강, 장점, 명성이 그들의 증오심과 분노의 폭약 심지가 되는 것이다.
증오 치고 사랑에서 오는 증오만큼 집요한 것은 없다
_프로페르티우스(147쪽)
말을 드높이고 확장시키는 것은 상상력의 활기이다. “가슴이 사람을 웅변가로 만든다.”(퀸틸리아누스) 우리 시대 사람들은 판단력에 속하는 것을 문체라 하고, 풍부한 착상을 멋진 어휘라고 [잘못] 부른다.
이 같은 묘사는 능숙한 손놀림의 결과이기보다 대상이 영혼 안에 보다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루스가 단순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단순 명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라티우스는 피상적인 표현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표현은 그를 왜곡하는 셈이리라. 그는 사물을 보다 명료하게, 보다 깊이 뚫어 본다. 그의 정신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어휘와 문체의 상점 전체를 빗장을 열고 샅샅이 뒤진다. 그에게는 보통 이상으로 이것들이 필요하니, 그의 생각이 보통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163쪽)
언어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훌륭한 정신이 그것을 다루고 사용함으로써이다. 그것을 쇄신하기보다 활기차고 다채로운 용법으로 그것을 부풀리고 늘리고 구부리면서 말이다. 그들은 언어에 새로운 단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네 단어를 풍요롭게 하며, 그 의미와 용법에 더 큰 무게와 깊은 심도를 부여하고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을 언어에 부여하되, 신중하고 창의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164쪽)
학문은 만상을 너무 섬세하게, 공통의 자연스런 방식과는 다른 너무 인위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내 시동은 자기 여자와 동침도 하고, 또 그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에게 레온 헤브레오나피치노를 읽어 줘 보라. 자기에 대해, 자기 생각과 행적에 대해 말하고 있건만 그 아이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가운데서 나는 내가 늘 하는 행동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학자님들이 걸칠 만하게, 거기 다른 가운을 입혀 놓은 것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들이 잘한 것이기를! 만일 내가 그 일을 한다면, 나는 그들이 자연을 인위로 만드는 만큼, 인위를 자연으로 만들겠다.(165쪽)
그런데 내 작품의 주요한 목적이자 완결점은 그것이 정확히 나의 것이라는 데 있다. 우연한 과오는 얼마든지 고치겠지만, 그리고 내가 무심히 내닫는 이상 내 책은 그런 과오투성이지만 내 안에 있는 일상적이고 항시적인 불완전성, 그것들을 쏙 빼놓는 것은 배신 행위일 것이다.(167쪽)
나는 결국 사랑이란 욕망하는 대상을 향유하려는 갈구일 뿐이며, 비너스 역시 자신의 그릇을 비우는 쾌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과도하거나 절도를 잃으면 악덕이 된다.(170쪽)
자기 자신을 끔직하게 여기고 쾌락을 고통으로 알며, 스스로를 불행으로 여기다니 이 무슨 끔찍한 괴물이란 말인가! 세상에는 자기 삶을 숨기는 사람들도 있다.
유배를 위해 아늑한 집도 벽난로도 버린다.
_베르길리우스
그들은 남들의 시선에서 자기 삶을 가리며, 건강과 유쾌함을 해로운 적인 양 피한다. 어떤 종파들만이 아니라 어떤 민족들은 자기 탄생을 저주하고 자기네의 죽음을 축복하는 것이다. 태양을 혐오하고 암흑을 찬미하는 나라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학대하는 일에만 기발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힘의 진정한 먹잇감이니, 정신이란 통제되지 않으면 위험한 연장이로다!
오, 불행한 자들이여! 자기들 기쁨을 두고 자신을 비난하는구나.
_막시미아누스(174~175쪽)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는 사람은 우리를 포만하게 하고 물리게 한다. 표현하기를 머뭇거리는 사람은 글에 담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억제된 표현은 일종의 묘책인 바, 특히 두 시인들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위한 그토록 멋진 길을 반쯤만 열어 보여 줄 때 그러하다. 사랑의 경우에는 실제 행위에서건 문학적 묘사에서건 어딘가 훔친 물건의 느낌이 나야 한다.(177쪽)
거기서 어떤 차분함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이상할지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정념이 아니다. 인색함과 야심에 아무런 한계가 없듯이 음욕에도 한계가 없다. 포만한 뒤에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거기에는 어떤 한결같은 만족도 없고 끝을 규정할 수도 없다. 음욕은 자기가 소유하게 된 것 그 너머로 계속 나아간다.(187쪽)
나는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게으름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분주함만큼이나 싫어한다. 뒤의 것은 나를 옥죄고, 앞의 것은 나를 졸게 한다. 나는 상처도 타박상만큼 싫어하며, 살을 베는 칼날도 멍들게 하는 타격만큼이나 거부한다. 사랑의 관계 맺기에 보다 적절한 처지였을 때 나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적절한 절도를 보았다. 사랑은 싱싱하고 유쾌한, 깨어 있는 동요이다. 나는 그 때문에 혼란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적이 없으나 열이 오르고 더욱이 목이 마르게 되었다. 거기서 멈추어야 한다. 오직 거기서 더 나가는 바보들에게만 사랑은 해악이 된다.(198쪽)
우리는 이처럼 뭔가 따끔거리는 듯 자극되고 동요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자 아나크레온에게 얼마나 많은 젊음과 활력과 쾌활함을 주었는지 보라.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지금 내 나이보다 더 늙었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어깨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내 머리를 그의 머리에 가까이 한 채 우리가 함께 책을 들여다보니, 솔직히 말해 나는 마치 어떤 벌레가 문 것처럼 갑자기 어깨가 따끔거렸고, 그렇게 된 지가 닷새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가슴으로는 계속 어떤 욕구가 흘러드는 것이었다.” 스친 것, 그것도 우연히, 그리고 어깨 한 번, 그것이 나이 들어 차가워지고 허약해진 영혼을, 그리고 덕성을 가진 인간 중에 으뜸인 자를 뜨겁게 하고 변화시킨다니! 그러니 왜 마다할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이 되는 것도, 그 밖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