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 낭송세미나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네요!
동지가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일곱시는 깜깜합니다. 낭송이 마무리될 때 즈음에는 동이 슬쩍 터오는데요.
어쨌든 저희는 <에세>3권도 쭉쭉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몽테뉴는, 길고 긴(그러나 콧구멍이 벌렁거릴 정도로 흥미웠던) '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 해설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수레, 7장에서는 권세에 대해서 이런저런 재미난 '썰'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의 시대 화려한 유럽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우쭐함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고, 왕의 권력에 대해 성찰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은 한번도 주어진 권세보다 더 많은 걸 얻고자 아등바등하지 않았음을 밝히기도 하죠.
그렇다면, 담백함과 지성이 뚝뚝 흐르는 몽테뉴의 문장들을 또 만나보실까요?
철학은 자연스런 쾌락과 싸우지 않는다. 절제가 따르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화시킬 것을 가르친다. 철학이 저항하려 애쓰는 것은 자연에서 벗어난 이상한 쾌락들, 사생아인 쾌락들이다. 철학은 육체의 욕망이 정신에 의해 더 커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포만을 통해 우리의 굶주림을 깨우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배를 채우는 대신 가득 쑤셔 넣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에게 부족을 느끼게 하는 어떤 향락도 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배고프게 하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우리에게 경고한다. 사랑을 섬길 때, 철학은 그저 육체의 욕구를 채워 주기만 하지 영혼까지 동요시키지는 않는 대상을 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영혼은 이것을 자기 일로 만들지 말고 그저 육체를 따르고 거들어 주기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런 지침들은 내 생각에 조금 혹독한 듯싶다. 그런 지침이야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육체와 관련된 것일 뿐, 지친 육체에게는 상한 위장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덥히고 부축해 줘도, 또한 저절로 그것을 잃어버린 이상 상상의 중재를 통해 다시 욕망과 쾌활함을 되찾게 해 줘도 이해할 만한 일이라는 내 생각이 옳지 않은가?
이 지상에 감옥에 있는 동안은 순순히 육체적이거나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란 우리 안에 하나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부당하게도 둘로 찢어 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우리가 쾌락에 대해서도 적어도 고통에 대해서만큼 어서 오라고 맞아 주는 것이 더 옳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성자들의 영혼 안에서 고통은 참회를 통해 그 완벽함에 이를 만큼 격렬했다. 육체는 영혼과 밀접히 맺어진 탓에 당연히 이 고통에 자기 몫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원인에는 관여된 바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성자들은 육체가 고통받는 영혼을 그저 따라가고 돕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 자체를 육체 고유의 끔찍한 고통으로 학대했던 바, 영혼과 육체가 서로 질세라 힘들수록 더 유익하다 싶은 고통 속에 인간을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었다.(200~201쪽)
꾸미지 않은 못생김과 노쇠함은 그것을 분칠하고 매끄럽게 만든 것보다 내게는 덜 노쇠하고 덜 못나 보인다.(206쪽)
나는 수컷이나 암컷이나 같은 틀에서 주조되었다고 말한다. 교육과 관습 말고는 둘 사이의 차이가 크지 않다. 플라톤은 자기 ‘국가’ 안의 온갖 공부와 훈련, 임무, 전쟁시와 평화의 직분에 남자들과 여자들을 차별 없이 초대한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여성들의 덕목과 우리의 그것 사이의 모든 구분을 없애버렸다. 한쪽 성을 비난하는 것이 다른 쪽 성을 옹호해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있으니, “부지깽이가 가마솥보다 [새카맣다며] 놀리는 식이다.”(209쪽~210쪽)
6장 수레에 관하여
두려움은 이따금 담대하지 못한 데서 오기도 하지만 판단력이 부족해서 생기기도 한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위험을 두 눈을 뜨고 자유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두려움을 인정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언젠가 한번은 그 용기가 나의 도주를 질서 있게 도모하는 데 기여했다. 두려움이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공포심에 사로잡히거나 대경실색을 하지는 않았다. 흔들리기는 했으나 망연자실, 정신줄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영혼들은 훨씬 더 나아가, 평온할 뿐만 아니라 분별 있고 늠름한 퇴각마저 보여준다.(212~213쪽)
만약 관후함이 [마땅한] 공로와 상관없이 베풀어진다면 그것을 받는 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도 없이 받게 되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부당하게 승진시켜 준 바로 그자들의 손에 의해 폭군들이 인민의 증오의 제물이 되었던 바, 이자들은 자기들에게 한 몫 마련해 준 자를 오히려 경멸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불공정하게 얻은 재산의 소유를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대중의 판단과 견해에 가담하는 것이다.
과도하게 내주는 군주의 신하들은 과도하게 요구하게 된다. 그들은 이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례에 따라 제 몫을 가늠한다. 확실히 우리의 뻔뻔함에는 낯이 붉어질 경우가 가끔 있다. 우리의 봉사에 걸맞는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라도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과도하게 지불받은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고난 의무에 따라 이미 우리 왕들에게 드려야 할 봉사가 있지 않은가? 우리의 비용을 왕이 감당한다면 그가 벌써 지나치게 짐을 지는 것이며, 왕은 얼마간 거들어 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은 시혜라고 불리는 바, 이는 강요될 수가 없는 것이니 관대함(libéralité)이라는 말 자체에 자유로움(liberté)의 음향이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 풍속에서는 결코 그렇게 되는 적이 없으며, 받은 것은 더 이상 셈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장차 베풀어 줄 관대함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줄 것이 바닥날수록 친구도 더 드물어지게 된다.(220~221쪽)
이집트 사제들로부터 그들 나라의 긴 역사며 외국 역사를 배우고 간직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서술한 솔론의 이야기는 이 점에서 배척할 만한 증언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의 무한한 광대함을 우리가 명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쪽으로든 뛰어들고 뻗어나가는 정신은 사방으로 걸어 나가면서 그의 행보를 멈추게 하는 어떤 한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니, 이 무 속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존재형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키케로 텍스트의 변형)
과거와 관련해 우리에게까지 내려온 모든 것이 사실이고 누군가에 의해 알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흘러가는 이 세계의 상에 대해서도 가장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변변치 않고 왜소한 것이랴! 우연의 힘으로 흔히 본보기처럼 되거나 중요해진 개별 사건들뿐만 아니라 거대한 체제나 국가의 상태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게 되는 것보다 백배나 더 많은 일이 우리 모르는 새 지나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네 대포며 인쇄술에 대해 기적이라고 소리쳤지만, 지구 반대편 중국 쪽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천년 전에 그런 것을 향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보고 아는 것이 못봐서 모르고 있는 만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필경 인간 삶의 형식이 끝없이 증식되고 변화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 유일하고 희귀한 것은 없으며, 우리의 앎도 역시 그러한데 그 위에 우리의 학문 체계를 세우기에는 그것은 너무나도 빈약한 토대이다. 오늘날 우리가 허황되게도 우리 자신의 허약함과 쇠락에서 끌어낸 논변으로 세계의 몰락과 쇠퇴를 결론 짓듯이,
우리 시대는 이제 더 이상 활력이 없으며 대지도 더 이상
비옥하지 못하리니.
_루크레티우스
자기 시대가 갓 태어나 젊다고 허황되게 결론지은 자가 있으니, 그는 새로움에 다양한 예술의 발명이 넘치던 자기 시대 정신의 활력을 보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227~228쪽)
“평화로운 자들이라고 하는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낯빛이 그러하지 못하구나. 당신들의 왕으로 말하자면 그가 뭘 요구하는 걸 보니 가난하고 처지가 곤궁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시기으로 땅을 나눠 준다고 한 이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제삼자에게 줌으로써 원래 소유자들과 그 사람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려 하는 것으로 보아 불화를 좋아하는 모양이다.”(233쪽)
7장 권세의 불편함에 관하여
권세를 누릴 수가 없는 우리니만큼 권세를 비난하는 말로써 분풀이를 해 보자. 하지만 무엇인가의 단점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들을 온전히 비난하는 일은 못 된다. 아무리 멋지고 바람직한 것일지언정 만상에는 무엇이나 단점이 들어 있는 법니다. 일반적으로 권세의 명백한 이점은 내킬 때 거기서 비켜설 수 있다는 점이니, 어느 쪽이든지를 대체로 선택할 수 있는 법이다.(241쪽)
권세를 멀리하는 것은 이러한 거부에는 권세에 대한 욕망 자체나 그 향유보다 더 큰 야심이 깃들 수도 있을 터인데, 이런 거부에 수반되는 영광을 여전히 고려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거기엔 권세에 대한 욕망이나 향유보다 더 큰 야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야심이란 평범함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방식으로 제 길을 내어 가는 것이 더 그 본성에 맞으니 말이다.
나는 인내를 향해서는 내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고, 욕망을 향해서는 그것을 약하게 만든다. 나도 남들만큼 바라는 것이 많으며, 내 소망에 남들만큼 자유로움과 분별없음을 허락한다. 그렇긴 하지만 내게는 한 번도 제국이나 왕위를, 혹은 저 높은 운수나 통솔하는 자리를 바라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니, 나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다.(241~242쪽)
내 운명에 의해서도 그렇고 또 내 기질에 의해서도 그렇듯 나는 중간쯤 가는 지위가 익숙하다. 그리고 내 삶의 행적과 내가 기획한 것들을 통해 나는 하느님이 나의 탄생에 묶어 주신 운명의 정도를 뛰어넘으려 하기보다 그런 생각을 멀리하려 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자연이 마련해놓은 것은 무엇이나 똑같이 알맞고 편안하다.(242쪽)
그러나 내 심장이 충분히 담대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툭 트여 있어서 그것은 나더러 자신의 허약함을 거침없이 알리라고 한다.(243쪽)
사람들은 서로 사귀는 데 있어서, 명예와 용기가 남에게 뒤질세라 육체나 정신을 겨루며 서로 부딪히는 시합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군주들은 결코 이런 시합의 진미를 맛볼 수가 없다. 사실 너무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군주들을 깔보며 부당하게 대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릴 적에 한없이 마음 상했던 일이, 나하고 겨루는 아이들이 자기들 맞상대로 내가 마땅치 않다고 여겨 진짜로 힘을 쓰는 일을 아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왕들에게 매일처럼 일어나는 일이니 누구나 자기가 왕을 상대로 힘을 쓰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왕들이 어느 정도건 간에 승리를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그것을 내주려고 애쓰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왕의 영광을 손상시키기보다 자기 영광을 기꺼이 배반하지 않을 사람도 없는 것이다. 각자가 다 왕들 편에 선 백병전 친선 경기에서 왕들이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겠는가? 내게는 마치 옛날의 용사들이 주술에 걸린 몸과 무기를 가지고 경기장과 전투에 출정하는 것을 보는 듯싶다. 브리송은 알렉산드로스를 상대로 내달리는 시늉만 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그 때문에 그를 꾸짖었지만 채찍질을 당하게 했어야 할 일이다. 이 점을 고려해 카르네아데스는 군주들의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는 것은 말 다루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어떤 훈련에서고 누구나 이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승리를 양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아첨꾼도 궁신도 아닌 까닭에 왕의 아들을 마치 마부의 아들인 듯 땅에 내동댕이 치니 말이다.(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