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왓! 너무나 따뜻한 겨울이라 좀 걱정했는데, 결국 맹추위가 지나가고 나니, 그 유명한 화이트크리스마스가 찾아왔네요.
규문에는 이제 모든 수업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유일하게 저희의 낭송 세미나만이 해를 넘겨 계묘년 끝자락까지 이어져 있습니다요!
그래서 오늘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저희의 낭송은 이어졌답니다! ㅎㅎ
동지가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침 낭송 시작 이래로 아침이 가장 어두운데, 그래도 눈이 오면 조금 환하답니다.
이번 주, 저희는 8장 '대화의 기술에 관하여'를 읽었습니다.
'대화'라는 활동이 가장 귀중하고 값지다고 말하는 몽테뉴...
사실 이번 장에서는, 말하는 기술 뿐 아니라 듣는 기술, 사람과 사람의 생각을 듣고 읽고 응답하는 근본적인 기예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몽테뉴의 주특기인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시험하는 방법들까지도 함께 등장하지요.
명문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 적기는 어려운데요. 살짝 볼드처리를 해서 내적 공감을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럼 샘들께서 적어주신 필사를 보시며, 연말의 들뜬 가슴에 지적 온기를 뿌려보시죠~
8장 대화의 기술에 관하여
나는 남들의 고약한 모습을 보면 그만큼 더 스스로를 유쾌한 사람으로 만들려 했고, 남들의 나약한 모습을 보면 그만큼 강인해지려 했으며, 표독한 예들을 보면 그만큼 자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척도를 스스로에게 내밀었던 셈이다.
내 생각에 우리 정신의 가장 비옥하고 자연스러운 훈련은 대화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삶의 다른 어떤 행위보다 더 달콤한 경험이라고 여긴다. 바로 그 때문에 만일 지금 내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듣고 말하는 능력을 잃느니 시각을 잃는 쪽을 택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아테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그들 아카데미에서 대화의 훈련을 대단히 명예로운 것으로 유지해 왔다. 우리 시대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어느 정도 그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로서 우리 [프랑스인들]의 이해력과 그들의 것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책을 공부하는 것은 나른하고 희미한 움직임으로서 조금도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대화는 우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훈련시킨다. 내가 만일 강력한 영혼, 굳센 논적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는 내 옆구리를 공격하며,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찌르고, 그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 날아오르게 만든다. 경쟁심, 영예욕, 쟁투는 나를 부추기고 나를 내 수준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린다. 대화를 가장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다.(252~253쪽)
나는 토의나 논쟁을 시작할 때 아주 자유롭고 편하게 임하는데, 사람들의 견해는 내 안에서, 뚫고 들어가기에도, 깊이 뿌리내리기에도 마땅치 않은 토양을 마주하게 될 테니 말이다. 어떤 주장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으며, 어떤 신념도 그것이 내 것과 어떻게 대립되건 나를 언짢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찮고 기괴한 착상이라도 인간 정신이 만들어 낼 성싶지 않은 것은 내 보기에 없다. 우리의 판단력에서 판정 내릴 권리를 박탈해 두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리 것과 다른 갖가지 의견들을 담담하게 바라볼 따름이다. 그리고 그 의견들에 우리의 판단력을 그저 내주지 않더라도 귀는 쉽사리 기울여 준다.
저울의 한쪽 접시가 텅 비어 있으면 나는 다른 쪽에 노파의 몽상을 얹어 접시가 흔들리게 해 본다. 내가 짝수보다 홀수를 선호하더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금요일보다 목요일을 택하고 식탁에서 열세 번째 자리보다는 열두 번째 혹은 열네 번째 자리를 원하더라도 여행 가는 길에 토끼가 내 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는 길옆을 따라오는 것이 더 기분 좋더라도, 장화 신을 때 오른발보다는 왼발을 먼저 내밀더라도 말이다. 우리 주변에 믿는 이가 적잖은 이 모든 헛수작에 적어도 귀를 기울여 줄 필요는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것들이 뜬구름의 무게라 여기지만 그러나 그것도 무게는 무게이다.(253~254쪽)
그러므로 사람들의 판단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나를 언짢게 하거나 화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나를 깨우고 훈련시킬 뿐이다. 우리는 교정되기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거기 자신을 드러내고 대면할 일이다. 특히 지시가 아니라 토의의 형식으로 그것이 다가올 때면 말이다. 사람들은 반대 의견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정당한지를 눈여겨보지 않고, 옳게건 그르게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갈까를 궁리한다. 우리는 두 팔을 그쪽으로 벌리는 것이 아니라 발톱을 세우는 것이다. 나는 내 벗들이 “자네는 바보일세.” “자네 제정신인가.” 하며 나를 거칠게 몰아 대도 견디려 할 것이다. 의젓한 사람끼리는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밝히고 생각이 향하는 곳으로 말문이 향해 가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귀를 강건하게 해야 하고, 정중한 말소리의 부드러움에 맞서도록 단련해야 한다. 나는 강건하고 씩씩한 사교와 친밀함을 좋아하며, 사랑이 물어뜯고 할퀴어 피흘리는 것을 기꺼워하듯, 날카롭고 힘찬 사귐을 기꺼워하는 우정이 좋다.(254~255쪽)
우리는 귀를 강건하게 해야 하고, 정중한 말소리와 부드러움에 맞서도록 단련해야 한다. 나는 강건하고 씩씩한 사교와 친밀함을 좋아하며, 사랑이 물어뜯고 할퀴어 피흘리는 것을 기꺼워하듯, 날카롭고 힘찬 사귐을 기꺼워하는 우정이 좋다.
우정이 만약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예절 바르고 기교적이며 충격을 두려워하고 거동이 억제된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할 만큼 힘차거나 너그럽지 못하게 된다.(255쪽)
적수의 허약함에 의해 얻는 승리에 기분 좋은 것보다는, 논쟁의 열기 속에서마저도 내 적수의 이치가 지닌 힘 아래 내가 스스로를 굽힐 줄 알아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얻는 승리가 나는 더욱 자랑스럽다고 느낀다.(257쪽)
학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나도 지식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참되게 쓰이기만 한다면 지식이란 인간이 획득한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자신의 근본 능력과 가치로 삼는 이들, 자기들의 분별력을 기억력에 의존하게 하는 자들, “타인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자들,”(세네카) 그리고 책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경우(이런 종류 사람들의 수는 무한대이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는 그 지식을 얼뜨기짓보다 더욱 혐오하는 바이다. 내 나라, 그리고 내 시대에 학식이 호주머니 사정을 크게 개선시켜 주는 일은 있어도 영혼을 더 낫게 해주는 일은 드물다. 무딘 영혼을 만나게 되면 학식은 날것의 소화되지 않은 덩어리처럼 그 영혼을 더 무겁게 하고 숨막히게 한다. 예리한 영혼이라면 학식은 쉽사리 그것을 정화시키며, 명석하게 하고 소멸에 이를 만큼 정련시킨다. 학식은 중립에 가까운 속성을 가진 어떤 것이다. 잘 타고난 영혼에게는 아주 유용한 부속물이지만 어떤 종류의 영혼에게는 위험하고 해로운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나 귀한 곳에 쓰이는 것이라서 헐값에 자신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손 안에서 그것은 임금의 왕홀이다. 다른 손안에 있으면 그것은 어릿광대의 지팡이다.(261쪽)
세계는 탐구의 학교일 뿐이다. 누가 표적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누가 가장 멋지게 표적을 향해 달려가느냐가 문제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허위를 말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게 굴 수가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방식이기에 말이다.(262쪽)
그리고 나는 매일 작가들이 저서를 즐거이 추켜들고서 그들의 학식에는 무관심한 채, 그들이 말하는 주제가 아니라 이야기 방식을 찾으며 읽곤 한다.(263쪽)
그런데 만약 내가 사태를 실상과 다르게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때문에 나는 내 조급함을 나무라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옳은 생각을 하는 이의 경우건 잘못 생각하는 이의 경우건, 나는 이 조급함을 마찬가지로 악덕이라고 여긴다.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은 항상 폭군적인 못된 기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상 존재하는 세상의 헛수작에 흔들리고 발끈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꾸준하며 몰지각한 헛수작은 정말이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을 향해 화를 내게 되니 말이다.(264쪽)
내 기준으로 보더라도 나는 매일 얼마나 얼빠진 소리를 하고 또 얼빠진 대답을 하는 것일까. 그러니 당연히 남들 보기에는 얼마나 더 많은 얼빠진 이야기를 하겠는가! 내가 그 때문에 후회스러워 혼자 입술을 깨문다면 남들은 그에 대해 어떻게 하겠는가? 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일이며, 다리 아래 강물이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혹은 적어도 우리가 그 때문에 몸져 눕는 일 없이 그냥 흘러가게 둘 일이다.(264쪽)
“내가 무엇인가를 불건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하기 때문 아닐까? 내가 하는 경고가 나를 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혜롭고 신성한 후렴구이리니, 인간이 지닌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잘못을 후려치고 있도다.(265쪽)
누구나 자기 똥냄새는 좋게 여긴다.
_에라스무스 <격언집> 중에서 변용
우리 눈은 뒤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는 우리 이웃 이야기를 하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결점을 혐오하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더 명백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경이롭다 싶을 만한 뻔뻔함과 맹목성에 의지해 자기 결점인지는 모르는 채 ‘이럴 수는 없다.’라고 고개를 흔든다.(265쪽)
결백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다른 이를 비난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아예 비난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리라. 정말이지 동일한 종류의 과오로부터 결백하지 않으면 나서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점을 놓고 누군가를 비난할 때 우리의 판단력이 자신에 대한 심판에서 스스로를 면제해 주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다. 자기 내부에서 악덕을 제거할 수 없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안에서, 어떠면 덜 해롭고 덜 완전하게 자리 잡고 있을 이 악덕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선 단체에서 해야 할 사업이다. 그리고 내 결점을 지적하는 이에게 당신에게도 그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답변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 지적은 여전히 진실이고 유익하니 말이다. 만약 우리 코의 후각이 좋다면 우리의 똥은 우리 것인 까닭에 더욱 냄새가 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자면, 자기와 자기 아들, 그리고 낯선 이가 폭행이나 부당 행위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법에 따라 심판을 받고 형 집행자의 손에 도움을 청해 속죄하기 위해, 우선 자신이, 그다음에는 자기 아들이, 마지막으로 낯선 자가 출두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너무 음이 고조된 셈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의 법정에는 자기를 제일 먼저 나서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66~267쪽)
의사가 가진 경험의 열매란 그가 행한 치료의 역사가 아니며, 네 사람을 페스트에서 구하고 세 사람을 통풍에서 치료했다는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이 경험으로부터 자기 판단을 형성하게 될 무엇을 이끌어내고 자기 기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 때문에 보다 지혜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해 줘야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경험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268쪽)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가늠하고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들이 담고 있는 이치와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그것들을 소화하고 증류해두어야 한다.(269쪽)
이 세상이 돌아가는 데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도하는 것이 있으니 운명의 여신은 미덕과 경쟁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무슨 일에서나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고 또한 우리의 자만심을 무찌르는 것을 즐거워해, 무능한 자들을 지혜롭게 바꿔 놓을 수 없을 바엔 차라리 행운아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또 기꺼이 여기저기 끼어들어 그 경과가 오롯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이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거든다. 그 결과 우리 중 가장 단순한 이들이 공식적이거나 사적으로 막중한 일들을 잘 마무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페르시아인 시람네스가 그의 계획은 그토록 지혜로웠는데 일의 결과는 왜 그렇게 나쁜 것인지 놀라는 이들에게, 자기는 자기 계획의 주인일 뿐이고 자기 일의 성패를 가리는 주인은 운명이라고 대답한 것처럼, [앞에 이야기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 각도에서 말이다. 세상만사의 대부분은 저절로 이루어져 간다.
운명은 자기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_베르길리우스(272~273쪽)
우리는 그들이 설명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추정하거나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리는 판단이 적절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라는 식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되었을 경우, 그들 판단의 적절함이 요행 탓은 아닌지를 알아낼 일이다. 그 판단들을 유보적으로 만들고 그 결론을 약간 제한시켜 보라. 그것이 왜 좋다는 말이냐? 어떻게 하여 그것이 좋다는 것인가? 그런 식의 일반적인 판단은, 내 보기에 아주 흔한 일이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마치 군중 속에 한 무리로 있는 사람들 전체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278~279쪽)
베르길리우스의 책 한 쪽을 [낭독하는 것을] 다 듣고 난 직후에, 야 그것 참 멋지다!라고 외쳐도 아무렇지 않다. 교묘한 이들은 그런 식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좋은 작가의 세부를 다시 더듬어 생각해 보려 하는 일, 여러 예들을 정확하게 선별해 작가가 작가 자신을 넘어서고 있는 부분이 어디이며 그의 어휘나 어법, 그리고 소재의 선택을 두고 하나씩 따져 봄으로써 작가가 드높이 비상하고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제시하려는 일을, 해 보려는 이가 많지 않다. “우리는 각자가 하는 말을 검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견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키케로) 나는 매일처럼, 멍청이들이 멍청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279쪽)
지혜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고 불만족스럽고 두려운 상태로 만들어 두는 데 반해, 고집스러움과 무모함이 그 주인들을 기쁨과 자신감으로 채우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다. 가장 아둔한 자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어깨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싸움 끝에 항상 영광과 기쁨에 가득 차서 돌아온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판단력이 허약하고 진정한 우월성을 가려 내는 데 있어서 무능한 구경꾼들의 눈에는 종종 이 아둔한 자들의 거만한 언어와 만족스러운 얼굴이 그들을 승리자로 비치게 한다. 어리석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기 견해에 대한 맹렬한 고집이다. 확신에 차고 단호하며 경멸에 차고 명상적이며 진지하고 신중한 것으로 당나귀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는가?
행복함과 친밀성이 친구들 사이에 가져오는 짤막하고 날카로운 말씨름을 대화와 의사 소통의 범주에 포함할 수는 없을까? 이 자리는 유쾌한 농담과 서로에 대한 날카로운 조롱이 오간다. 나 자신의 타고난 명랑함 때문에 이것은 비교적 내게 잘 어울리는 경기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방금 묘사한 또 다른 경기만큼 팽팽할 정도의 진지함은 없다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는 날카로운 기발함이 있으며 리쿠르구스가 생각했듯이, 그에 못지 않은 유익함도 있다.(282쪽)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때로 상대방의 약점이라는 비밀스러운 심금을 집어 뜯는 수가 있는데, [이 마음의 현악기는] 평상시에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각자의 결점을 경고해 주는 유익한 일을 한다.(283쪽)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야 그쯤 해두자. 당신을 온전히 대표할 무엇, 그것으로 당신을 측정하는 것이 당신으로서도 기분 좋을 그 무엇을 내게 보여달라. 그러고 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면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부분인가 저런 부분인가? 그 우아한 문체인가, 중심 주제인가, 창의적 소재인가, 판단력인가, 박학다식함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내 보기에 대체로 자기 작업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 작업에 대해서만큼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