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독 범위 공지*
2주차(12/30) : 2권 「이제까지의 최고 가치에 대한 비판」 │ 1장 종교 비판(~228쪽)
3주차(1/6) : 2권 「이제까지의 최고 가치에 대한 비판」 │ 2장 도덕 비판 │ 3장 철학 비판(~401쪽)
4주차(1/13) : 3권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 │ 1장 인식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 2장 자연에 있어서의 권력에의 의지(~591쪽)
5주차(1/20) : 3권 「새로운 가치 정립의 원리」 │ 3장 사회와 개인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 4장 예술로서의 권력에의 의지(~706쪽)
6주차(1/27) : 4권 「규율과 훈육」 │ 1장 위계질서 │ 2장 디오니소스 │ 3장 영원회귀(~859쪽)
안녕하십니까! 규문의 전체 프로그램들이 마무리되고 방학이 시작되자 <권력에의 의지> 강독 강좌가 성황리에(?) 시작되었습니다. 기록을 갱신하는 신청 댓글에 들뜨고 설렜던 터라, 어떻게 더 수월하게 모여 앉을까를 고민하며 규문각에서는 새로운 책상 대형을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이 시대에 니체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귀중한 연말연초의 토요일들을 마다않고 이렇게 모여 앉은 저희만 봐도 알 수 있죠!
“왜 니체는 인기가 많은가?” 채운샘은 이 질문으로 강독을 여셨습니다. 뜨거워서, 멋있어서 라는 이유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고 강한 적들과의 싸움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종교, 도덕, 이성, 과학 등 그가 맞선 상대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중력으로 우리를 지배해온 가치들입니다. 그리고 니체 사상의 정수로 평가되는 <권력에의 의지>에서는 근대 인간에게 드리운 짙디짙은 그림자인 허무주의와 대결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 두 세기의 역사이다. 나는 다가오고 있으며, 더는 다르게 올 수 없는 것을 서술한다. 허무주의의 도래.”(15쪽)
무기력과 우울로 신음하는 오늘의 우리는 니체의 이 예언자 같은 선전포고에 눈이 반짝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다가도 불현듯 ‘도대체 왜 살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이유나 가치나 의미를 붙들고자 합니다. 가족을 위해, 성공을 향해, 신 덕분에. 하지만 이런 정당화 및 목표들도 허망해지는 때가 옵니다. 무엇 하나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폐허와도 같은 무너져내림의 경험. 이 허무감은 심리적인 동시에 관계적인 현실의 체험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니체적 의미로서 병든 것입니다. 물론 전혀 몰락하지 않고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해맑고 좋기만한 사람들, 사회 곳곳이 무너져가도 여행과 소비와 오락을 멈추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활동성이 결코 건강은 아닙니다. 병은 소진이 아닌 항진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서 시계를 손에 들고 있고, 점심을 먹으면서 주식신문을”(<즐거운 학문> 329절) 보는 시대에서 우리는 허무주의가 어떤 징후들로 번져가고 있는지를 주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요컨대, 극도의 무기력과 극도의 활동성이라는 이 양극단의 진자운동이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몰락의 시기를 건널 것인가. 그것만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권력에의 의지>라는 기획 : 징후적 진단과 역사적 고찰
총 네 챕터로 되어 있는 <권력에의 의지>는 그 목차만 봐도 ‘와, 이건 커다란 싸움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1권에서는 허무주의의 여러 뉘앙스와 역사를 진단한다면, 2권에서부터는 지고한 “가치들”로 여겨져 온 종교와 도덕과 철학의 가치를 비판하고, 3권에서는 가치를 새로이 정립하는 원리로서의 권력에의 의지가 소개됩니다. 마지막으로 4권에서는 이 가치 전도의 시도를 위한 훈련의 문제 및 영원회귀라는 실험이 제안됩니다. 여기서 왠지 저는 깨달음을 향한 불교의 네 진리인 고-집-멸-도의 구상을 겹쳐보게 되는데요. 존재의 미로를 풀어가는 여정은 서로 닮은 곡선을 그려내는 걸까요?
하지만 이 기획에 들어섬에 있어서 중요한 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이미 폐허 위에 있다는 자각일 것입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기존에 따랐던 선, 행복, 의미 등에 더는 매달릴 수 없겠다는 마음 말이죠. 나 자신에게서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서 이러한 막다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붕괴를 직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에 적었듯 스러짐에 초점을 맞추기 어렵게 하는 요인들은 많습니다. 끊임없이 시선을 분산시키는 오락과 컨텐츠가 쏟아지기에, 우리는 경제-기후-식량-안보 등 모든 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안정성을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기존에 안정감을 주었던 벽돌들인 재산, 가족, 국가에 매달리려 애씁니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보여주듯, 우리를 쌓아온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 폐허에서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건 분명 두려운 것이겠지만 그제서야 이 손으로, 빈 자리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실험될 수 있습니다. 생의 긍정은 거기서 가름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겠지만, 니체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허무(nihil) 혹은 폐허는, 없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 해석이 무너진 땅으로서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할 무엇입니다. 그리고 다시 해석한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삶을 욕망하는 힘이 해석하는 것이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힘의 출렁임,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모든 가치의 가치 전도의 시도’요, ‘권력에의 의지’인 것입니다(일단 거칠게 적어보았는데(^^), 앞으로 니체의 논의를 따라가며 살을 붙여가야겠습니다).
어떻게 다시, 그리고 고귀하게 해석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적 고찰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우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관한 탐사 없이는 어디로 도주하고 무엇과 접속할지를 정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채운샘께서는 니체에게 역사-계보학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해주셨습니다. “예언하는 새의 정신으로 그는 무엇이 올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뒤돌아본다.”(16쪽) 니체는 다음 두 세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지난 두 세기의 역사를 헤집습니다. 이런 역사의 감각은 푸코의 ‘비판’ 개념에서 본격화되는데요. 비판에는 첫째 ‘어떤 것이 어떻게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하는 계보학적 차원과 둘째 ‘어떻게 그것에 다른 방향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해석적 차원이 포함됩니다.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의 가치를 가진 것은 없고 오직 가치화의 과정과 배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배치를 더듬어 어떻게 다른 벡터와 다른 의미화를 가능케 할 것인가만이 문제죠. <권력에의 의지>의 기획 속에는 이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허무주의 : 초감성적인 것의 붕괴와 비관주의의 전개
“붕괴, 그리고 또한 불확실성이 이 시대의 고유한 특성이다. 아무것도 자신의 다리로, 그리고 자신에 대한 견고한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지 않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산다. 내일모레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77쪽)
우리 시대를 말하는 거 아니야? 니체의 글을 읽다 보면 헉 소리가 날 때가 많습니다. 점쟁이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이게 140년 전, 산업화의 효시인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기도 전의 글이라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모두가 다가올 진보의 확실한 희망에 눈멀어 있을 때 니체는 벌써 붕괴의 징후를 감지했던 것이죠. 종교가 그랬듯 과학과 이성 역시 여리박빙의 불확실성을 제공할 뿐이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은 죽었고, 신의 자리에 올라온 그 무엇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철학을 ‘초감성적인 것의 붕괴’라고 이름했다고 하는데요. 니체는 감성적 세계를 초월해서 설정된 자아, 대상세계, 표상 모두를 해체하고 지금까지처럼 이성과 형이상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여, 니체는 지금까지 ‘참된 세계’로 여겨졌던 것들을 부숴버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상 세계’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부숴야 합니다. 그렇게 의지처 하나 없는 완전히 허무주의로 들어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도 안 되지요. 그러면 19세기 당시 유럽에 받아들여졌던 수준의 ‘소멸에의 의지’로서의 불교에 멈추게 됩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수동적 허무주의이지요. 중요한 것은 재-가치화라는 창조적 측면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영원회귀가 사유되어야 하는데, 이는 이다음 범위에서 다뤄질 것 같습니다.
1권에서 중요했던 것은 허무주의의 양상들과 어떻게 비관주의(염세주의)가 허무주의로 전개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허무주의는 여러 결들과 뉘앙스를 갖습니다. 역사의 과정이기도 하고, 철학적 태도일 수도 있으며, 문화상의 상태들일 수도 있습니다. 약함의 징후인 동시에 강함의 기호이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거칠게 사용되는 허무주의라는 것의 개념적 용법을 알아볼까요? 니체는 이렇게 정의하며 시작합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하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 “왜?”라는 물음이 결여되어 있다.”(27쪽)
18세기에는 허무주의가 주로 거부와 저항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무로 되돌리는 운동 같은 것 말이죠. 이런 흐름은 러시아에서 심화되었는데요. 러시아 니힐리즘은 독특한 정치운동과 결합되어 무정부주의적이고 전복적인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니체는 “강함으로서의 비관주의”(30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허무주의가 무가치-무의미-무기력과 동일시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신의 죽음, 그것은 그 어떤 것도 ‘최고’ 가치일 수 없으며, 가치의 근거가 되는 토대가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이는 A를 잃고 B를 찾는 게 아닙니다. 허무주의는 “우리가 사는 다른 영역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30쪽)라는 것이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비관주의의 허무주의로의 발전”(49쪽)을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니체는 비관주의는 허무주의의 예비적 형태라고 말하는데요. 내가 믿었던 것 혹은 나의 삶에 대한 부정에 국한되는 것이 비관주의라면, 허무주의는 다른 모든 가치들과 다른 모든 삶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것은 단지 규모적 정도적 차이가 아닙니다. 비관이 전체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니체는 그 원인으로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실존에 의미를 부여해주었던 가치들의 상실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입니다. 현실의 괴로움은 이제 완화될 도리가 없습니다. 니체는 이를 “심리적 상태로서의 허무주의”(30쪽)라고 말하죠.
“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실존 전체 성격이 “목적”의 개념으로도 “통일성”의 개념으로도, 그리고 “진리”의 개념으로도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무가치의 감저잉 일어난 것이다. 실존의 목표도 없고 끝도 없다. 사건의 다양성 속에는 포괄적 통일성이 없다. 실존의 성격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다. (...) 그래서 세계는 이제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다.”(33쪽)
두 번째는 생리적 약화입니다. “왜소화, 고통에 대한 민감성, 불안, 조급함, 혼잡이 계속 증대하는 것.”(48쪽) 니체는 인간의 왜소화에 대해 탄식합니다. 더 이상 우월한 종족들(강자들)이 살아남을 수 없게 되고, “가장 평범한 중간치들만이 번성”(47쪽)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이 좀 위험한데요. 니체는 서슴없이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나폴레옹 같은 인물의 도래를 예찬합니다. 심지어는 군국주의를 언급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는 실제 제도가 아니라 건강성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할 문제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문제는 지금 우리의 왜소함과 싸우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체험되는 정동들을 쾌와 불쾌로만 환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쾌를 들이고 불쾌를 줄일까에만 고안하게 되지요. 하지만 강하다는 것, 힘이 고양된다는 것은 고통이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힘의 느낌은 체험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상대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니체는 강함을 이해하는 하나의 척도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참된 세계를 재건하지 않고도 폐허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몰락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어떤 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피상성, 즉 거짓의 필연성을 얼마만큼 시인할 수 있는가가 힘의 척도이다.”(35쪽)
횡설수설 길었지만, 사실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와글와글 남아있습니다. 데카당스의 문제, 주체화의 문제, 소진의 문제 등. 이것들은 차차 정리해보기로 하고, 여기서 뒤늦은 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폐허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새로운 해석,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깊이 남습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그리고 고귀하게 해석할 것인가! 니체의 사유를 따라서 완전히 허무주의를 겪는 방법과 허무주의 위에서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규격화되고 왜소화되고 평균화된 인간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 고양되고 강하고 예외적인 인간의 태도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