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습니다!
규문의 낭송팀은 몽테뉴와 함께 멋진 2024년의 첫 날을 시작했습니다!(사실 저는 늦잠으로 이 귀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ㅠ)
이제 <에세>3권도 거의 반을 넘어갔습니다.
9장 '헛됨에 관하여'에서도 몽테뉴는 빛나는 문장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헛됨에 관해 이렇게 헛된 글을 쓰는 일보다 더 확실하게 헛된 것은 아마도 없으리라."라는 센스 있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함께 읽고 있어서 그런지 니체와 유사해 보이는 생각도 많이 보였습니다.
가령, "
흔들리는 것은 어느 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나
"온 세상이 아프다는 것은 개인들이 건강함을 뜻한다." 같은 문장이요.
“의로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자발적인 정도만큼만 의로운 것이다.”
"누구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치워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다음에 꼭 선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툭툭 튀어 나오는 이런 문장들은 곰곰 곱씹고 새겨두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들게 하고요.
왠지 끝으로 다가갈수록 이런 귀중한 문장들을 많이 놓치면서 왔다는 느낌, 엉망으로 읽은 건 아닐까 하는 느낌,
그래서 언젠가 다시 <에세>를 펼쳐들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또 한 편으로는 쭉 읽어왔다는 사실에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요.
그럼, 새해 첫 날 2023년 마지막 주의 필사를 공유합니다!
확실하고 건강한 판단을 내리는 올곧고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신의 예를 들어 말하며, 제삼자는 물론 자기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증언한다. 우리는 진실과 자유를 위해 예의범절이라고 하는 저 비속한 규칙을 건너뛰어야 한다. 나는 감히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뿐만 아니라 나 말고는 다른 무엇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의 주제를 벗어나 다른 무엇에 대해서 쓸 때면 나는 방향을 잃고 만다. 나는 지나치게 분별심을 잃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거나 나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고 몰두한 나머지, 이웃사람이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듯이 나 자신을 떼어 놓고 고찰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다. 자기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그에 대해 자신이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거나 둘 다 비슷하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291쪽)
9장 헛됨에 관하여
헛됨에 관해 이렇게 헛된 글을 쓰는 일보다 더 확실하게 헛된 것은 아마도 없으리라.(294쪽)
인간의 특성 중에 대단히 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것보다는 낯선 것에 더 마음이 끌리며, 움직임과 변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다.(298쪽)
항상 무엇인가는 잘못되어 간다. 어느 때는 이 집의 일이, 또 어느 때는 저 집의 일이 당신을 성가시게 한다. 당신은 만사를 너무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당신의 명철한 눈이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그러하듯 여기서도 당신을 해친다. 나는 화가 날 때를 피하고 잘못되어 가는 일은 일부러 알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해도 언제나 내 집 안에서 불쾌한 일을 마주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사람들이 내게 제일 감추려 드는 못된 짓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일들이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숨겨 주려 공을 들여야 하는 일들이 있다. 허망한 상처, 때로 허망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처는 상처이다. 가장 사소하고 경미한 골칫거리가 가장 아픈 법이다. 마치 작은 활자들이 더 눈을 해치고 피곤하게 하듯이 미세한 일들이 우리를 찌른다. 한 무리의 작은 불행은 아무리 클지언정 한 차례 지나가는 격렬한 불행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집안일의 가시덤불이 예리할수록 그것은 느닷없이 우리를 쉬 덮치면서 위협도 않은 채 더 날카롭게 우리를 물어뜯는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불행은 그 무게에 따라 그만큼 나를 짓누른다. 그리고 그 내용만큼이나 방식에 따라 무게가 나가며, 이따금 어떤 방식이냐가 비중이 더 클 때도 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일반인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니 내가 더 큰 인내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불행은 내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지만 나를 아프게는 한다. 삶이란 여린 것이며 동요되기 쉬운 것이다. 음울한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난 뒤부터는 “첫 충도에 무릎을 꿇고 나면 더 이상 자신에게 저항할 수가 없는 법이다.”(세네카) 나를 움직여 가는 이유가 아무리 어리석은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쪽으로 내 기분을 더 몰아 간다. 그러고 나면 이 기분은 스스로를 키워 가다 그 자신의 운동에 의해 폭발하게 되는데, 스스로를 키울 이런저런 재료를 끌어오고 첩첩이 쌓아 가는 것이다.(302~304쪽)
우리는 일반적인 것으로써, 또 보편적인 원인과 과정을 따지느라 우리 생각을 어지럽히는데 이것들은 우리 없이도 너무나 잘 운행되어 가는 것들이다. 우리는 인간 자체보다 더 가까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 나, 미셜은 저 뒤에 내버려 두고 있다. 지금은 내 시간 대부분을 집에 머무르고 있지만 나는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집에서 즐거이 지내고 싶다.(306쪽)
자기 욕구를 자기 가진 만큼으로 끌어내리고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았던 아버지는 참 행복하신 분이었다.(307쪽)
“속아 넘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속이기를 가르치고, 자기들이 못 믿어서 사람들의 배신을 정당화해 주는 이들이 많다.”(세네카) 내가 내 사람들에게서 얻는 가장 평범한 안전은 그들의 과오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308쪽)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조건 지운 것이 인위이건 혹은 본성이건 그것은 우리를 좋게 해 주기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해를 끼친다. 우리는 대중의 의견에 맞는 모습을 보이고자 우리 자신의 장점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우리 존재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것인가보다는 남들의 시선에 그것이 어떻게 보일까가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 정신적 재산마저도 그리고 지혜도 우리 자신만이 그것을 향유하거나, 남들의 시선과 인정 앞에서 그것이 빛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쓸모 없어 보인다.(312쪽)
나는 한 가지, 세 가지 혹은 백가지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관행이 된 풍속을 보는 바, 특별히 그 인간성과 배신행위는 내게는 최악의 악덕이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혐오감 없이는 도저히 그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증오하는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그에 대해 경탄하기도 한다. 이 놀라운 사악함의 실행은 과오와 무절제의 표지인 만큼이나 영혼의 활력과 힘의 표지이기도 하니 말이다. 필요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결합시킨다. 이 우연한 결합은 나중에 법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들 생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무리 야만적인 경우라도 일찍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궁리해 냈을 그 어떤 경우보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유지된 사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315쪽)
그것은 자기를 내리누르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생각만 하며, 어떤 대가가 요구되는지는 따져 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수백 가지 예를 통해 세상은 자기를 치유한다면서 그 몫을 지불하고야 마는 것을 보고 있다. 현재의 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전체적인 상황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치유라고 할 수가 없다.(318쪽)
누구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치워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다음에 꼭 선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18쪽)
흔들리는 것은 어느 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커다란 조직의 구조는 수많은 못이 지탱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고색창연함으로 버티고 있기도 하다. 마치 오래된 건물이 시간에 의해 그 기초는 낡아 없어지고 외장도 접착제도 사라졌는데, 그래도 살아남아 자신의 무게로 지탱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더 이상 튼튼한 뿌리로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그 무게만으로 곧추 서 있네.
_루키아누스(322~323쪽)
도처에 악과 위협이 가득 찬 이 사회에서 우리는 단순히 위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지속될 수 있다는 어떤 희망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함께 무너질 때면 사실은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아프다는 것은 개인들이 건강함을 뜻한다. [모두가] 엇비슷한 상태는 해체에 적대적인 성질이다. 나로서는 어쨌든 절망에 빠져들지는 않으며, 우리를 구해 줄 길들이 있다고 여긴다.
어쩌면 어떤 신이 다행히도 마음을 바꿔
혼란에 빠진 세상 다시 우리에게 제대로 돌려줄지도
모를 일.
_호라티우스
누가 알랴? 길고 힘든 병고 끝에 몸은 정화되고 더 깨끗한 건강을 갖게 되는 것처럼, 혹시 하느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일지도?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우리네 병의 징후들을 따져 보니 우리의 타락과 인간적 과오들이 가져온 것들만큼이나 원래 자연과 하늘에 그 병 자체에 내재된 고유의 징후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별들 자신이 우리가 충분히 오래 살아왔으면 이미 일반적인 시한을 넘긴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또 한 가지는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임박한 재난이 견고한 전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동이 아니라, 그 덩어리 자체가 분열되고 해체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최악의 것이다.(323~324쪽)
필요 없이 반복하는 말은 설사 호메로스의 글일지라도 어디서나 지루하다. 그러나 피상적이고 그저 스쳐 가는 눈길만을 끄는 것들의 경우 그것은 재앙에 가깝다. 나는 주입식을 싫어하는데, 세네카의 경우처럼 유익한 것들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325쪽)
나는 덧붙이되 수정하지는 않는다. 첫째로, 세상에 자기 작품을 저당 잡힌 사람은 이제 더 이상의 권리를 갖지 않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 더 잘 말할 일이지, 자기가 팔고 난 작품을 일그러뜨릴 일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려거든 그들이 죽고 난 다음이라야 마땅하리라.(327~328쪽)
두 번째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바꾸려 하다 잃게 되지나 않을지 두렵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항상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가기도 한다. 내 생각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하는 것이라고 해서 첫 번째 했던 생각보다 내가 덜 불신하는 것은 좀체로 아니며, 옛날 생각이든 지금 생각이든 마찬가지로 미심쩍어한다. 남들을 교정해 주려고 할 때처럼 우리 자신을 교정하려 할 때도 우리는 가끔 어리석게 군다. 내 책을 처음 출판한 때가 1580년이었다. 그 뒤로 적잖은 세월 동안 더 나이가 들었지만 내가 한 치라도 더 지혜로워진 것은 확실히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얼마 전의 나는 분명 둘이다. 그러나 어느 때가 더 나은 내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줄곧 개선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늙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리라. 그러나 그것을 비틀거리며 어지러워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주정꾼의 움직임이거나 혹은 바람이 자기 좋을 대로 아무렇게나 흔들어 대는 갈대의 움직임이다.(328~329쪽)
나는 어떤 종류의 것이건 신세지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데, 특히 나를 마음의 빚으로 붙들어 놓게 되는 은덕이 그렇다. 내게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은덕의 이름으로 내 의지를 저당 잡히게 하는 것만큼 값비싼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며, 돈 받고 해 주겠다는 봉사를 나는 더 기꺼이 받아들이겠다.(332~333쪽)
“의로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자발적인 정도만큼만 의로운 것이다.”(키케로) 행동에서 어딘가 자유의 찬란함이 비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하지도 명예롭지도 않다.(334쪽)
나는 짐이나 의무를 벗어 던지는 것을 너무나 기꺼워하는지라, 어떤 사건으로 인해 혹은 타고나면서부터 일정한 우정의 의무를 지게 된 사람들로부터 배은망덕함이나 무례함, 모욕 따위를 겪게 되면 그것을 내 쪽의 이득으로 계산했는데, 그들이 범한 과실을 내 빚을 갚고 면하는 기회로 여겨서이다. 나는 사회적 의무가 요구하는 외적 예의를 그들에게 여전히 지키기는 하지만, 애정으로 하던 것을 법으로 하게 되고 내 의지가 내적으로 긴장하고 염려하던 데서 조금이라도 풀려난 것에 대해 그것이 적잖은 저축이라고 생각한다. “선의의 충동이 처음 일어날 때, 마치 마차를 세우듯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현자의 태도이다.”(키케로) 이 선의에 내 마음을 담으려 할 경우에는 그것은 어딘가 너무 급하고 충동적이 된다. 적어도 자기가 무엇인가로부터 결코 억압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같은 방식으로 의지를 관리하는 것은 나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결함에 대해 어느 정도 화해하게 된다. 그 때문에 그들이 그만한 대접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러나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을 향한 마음 씀이나 의무의 수고를 어느 정도 아끼게 된다.(334~335쪽)
무슨 일에나 누구에게든지 격의 없이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일 그들이 신세지는 데서 오는 구속이 지혜로운 사람에게 어떤 무게를 갖는 것인지를 헤아려 본다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338쪽)
나는 죽음이라는 상태 앞에서 움츠러들고 있기보다 죽는 것과 친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단단히 챙겨 입고 폭풍우 속에 따뜻이 안기면, 그것은 순식간에 느낌도 없이 나를 덮쳐 내 눈을 감게 하고 나를 쓸어가 버리리라.(3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