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시간은 빠릅니다. 아직 2024가 어색한데도 1월도 삼분의 일이 가버렸습니다.
겨울 아침은 어둡고도 달콤해서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래도 일단 앉아서 샘들과 인사하고 몽테뉴를 읽기 시작하면, 문장들이 또 말을 걸어옵니다.
지난 주에는 9장 '헛됨에 관하여'를 마쳤습니다.
언제라고 안그랬냐마는, 이번 장에서는 정말 중구난방 온갖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읽는 우리는 어차피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꾀기를 포기했음에도, 몽테뉴는 이렇게 자기 번호를 합니다.
"내 이야기의 끈을 놓치는 것은 부주의한 독자이지 내가 아니다. 어느 귀퉁이엔가는 항상 차지한 자리는 비좁을지언정 그래도 뜻을 전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단어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게나 요란하게 주제를 바꾸곤 한다. 내 펜과 내 정신은 마찬가지로 떠돌아다닌다."(386쪽)
그래서 <에세> 읽기는 언제나 읽는 이의 몫이 큰 것 같습니다.
몽테뉴가 뿌려놓은 문장들을 어떤 정성으로 수확해 다시 키우느냐가 관건인 것이죠.
여행, 죽음, 노쇠함, 뒤섞임, 삶의 물질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몽테뉴의 멋진 사유의 조각들을 줍는 것이 주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보아요!
나는 좀체 내 고향 대기의 아늑함에 넋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아주 새로운 관계가 내 보기에는 능히 이웃들과의 우연하고 평범한 관계만큼 가치 있다. 우리가 직접 맺은 순수한 우정은 보통 풍토와 혈연의 공동체가 우리를 이끌어 맺는 우정보다 더 강한 법이다. 대자연은 자유롭고 구속 없는 상태로 우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느 지역들에 가둬 놓는다. 마치 페르시아 왕들이 코아스페스 강물 외에는 다른 물을 결코 마시지 않기로 맹세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다른 모든 물을 마실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며, 자기들에게는 세상 나머지 전부가 몸을 말라붙게 만들었던 셈이다.(345쪽)
여행 중에 영혼은 새로운 미지의 것들에 대해 주목하도록 끊임없이 자극받는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삶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끊임없이 수많은 다른 삶과 견해, 관습의 다양성을 눈앞에 보여 주고, 그 영원히 다양한 우리 본성의 형태를 삶이 맛보도록 해주는 것보다 좋은 학교는 없다. 육체는 여행할 때면 게을러지지도, 피로하지도 않으며, 이 적절한 동요는 육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346쪽)
우리 아내들의 게으름이 우리의 땀과 노동으로 유지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부당한 일이다. 내게 그럴 힘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도 나보다 더 자유롭게, 더 차분하게, 그리고 더 염려 없이 내 재산을 쓰게 두지는 않으리라. 남편이 질료를 제공하면 여성들은 형상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 자체가 바라는 바이다.(348쪽)
향유와 소유는 원래 상상의 문제이다. 그것은 자기가 만지고 있는 것보다는 찾고 있는 것을 더 열렬하게 그리고 더 지속적으로 껴안는다. 당신의 나날의 즐거움을 손으로 꼽아 보라. 당신은 당신 친구가 옆에 있을 때 당신 친구를 더 잊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는 당신의 주의력을 느슨하게 하며, 언제고 어떤 기회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당신의 생각에 허락해 주는 것이다.(350쪽)
진실한 우정에서는, 나는 그 전문가이지만 벗을 내게 끌어오기보다 그에게 나를 내주게 된다. 나는 그가 내게 해 줄 법한 것보다 더 잘 해 주고 싶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잘해 주기를 바란다. 그가 자신에게 잘하는 것이 내게 가장 잘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재 상태가 그에게 즐겁고 유익하다면 그의 존재보다 부재가 내게는 훨씬 기쁜 일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꼭 부재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예전에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유익하게 잘 활용했다. 우리는 헤어져 있음으로써 삶을 보다 충일하고 드넓게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위해 나는 그를 위해, 어느 때나 다름없이 충만하게 살아가고, 향유하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는 우리의 한 부분이 게으른 상태로 있다. 우리는 하나처럼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이 서로 분리되면 우리 의지의 결합은 더 풍요로워진다. 육체의 현존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허기는 영혼의 향유가 어딘가 허약한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나를 나무라며 꺼내 드는 노년으로 말하면, 공동의 견해에 승복할 줄 알고 남을 위해 자신을 강제하는 것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할 일이다. 젊음은 대중과 자신, 둘 다를 위해 무엇이나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노년은 우리만을 위해서라도 할 일이 너무 많다. 자연의 안락함이 없게 되니, 우리는 인위적인 안락함으로 자신을 지탱한다. 젊음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그것을 찾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젊은 시절 나는 원기 왕성한 충동들을 자제심으로 감추었다. 늙어서 나는 울적한 상념들을 마음의 방탕으로 흩트린다. 플라톤의 법률은 여행이 보다 유익하고 교육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마흔 살이나 쉰 살 전에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나는 예순 살 이후에는 여행을 금지하는 법의 두 번째 조항에 더 기꺼이 동의하고 싶다. “하지만 그 나이라면 당신은 그런 긴 여행에서 귀환하지 못할 거요.” 그게 내게 무슨 상관이랴? 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돌아오기 위해서도, 그 여행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를 흔들어 놓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이 내게 기분 좋을 동안에 말이다. 그리고 나는 산보하기 위해서 산보한다. 이익을 쫓거나 토끼를 뒤쫓아 말을 달리는 자는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달리는 기쁨을 위해, 즐기고 놀이하듯 말을 달리는 사람들이 달리는 것이다.(352~353쪽)
우리를 세상에 들어서게 하는 순간에 지혜로운 여성, 산파가 필요하듯이, 세상에서 나가는 순간에는 훨씬 더 지혜로운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나아가 벗인 그런 사람은 이런 순간 도움을 얻기 위해 아주 귀한 값으로 사들여야만 하리라.
어떤 것도 돕거나 방해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 강해지는 저 거만할 정도로 당당한 힘에는 내가 이르지 못했다. 나는 그 바로 아래 지점에 있다. 나는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꾀를 내어, 바짝 엎드려 기어가는 토끼처럼 이 통과의 길을 못 본 척 넘어가려 한다. 임종 때 내 꿋꿋함을 증거하거나 과시하려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다. 누굴 위해 그러겠는가? 그때면 명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며 이해 관계가 그치게 된다. 나는 세상에서 물러나 사적으로 산 내 삶에 어울리게, 고요하고 외로우며 온전히 나만의 것인 명상에 잠긴 죽음에 만족한다. 로마인들은 유언을 남기지 않고 죽거나 눈을 감겨 줄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함께하지 못한 채 죽는 이를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미신과는 반대로 나는 다른 사람 위로할 일 말고도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할 일이 가득하며, 상황에 의해 새로 만들어질 것들 말고도 머릿속에 이미 생각들이 가득하고, 따로 빌려오지 않더라도 곰곰 따져봐야 할 거리가 이미 가득하다.(355~356쪽)
우리 불행을 두고 벗들이 연민과 슬픔을 느끼기를 바라는, 그런 유치하고 고약한 기분을 나는 매일 성찰을 통해 벗어난다. 우리는 벗들의 눈물을 끌어내려고 우리의 불행을 정도 이상으로 과장한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는 자기의 불운을 견뎌 내는 확고함을 칭찬하면서도, 우리의 불운일 때는 그것을 확고히 견디는 친지들을 비난하고 나무란다. 그들이 우리 불행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저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356쪽)
다른 사람 안에 건강이 온전하고 힘찬 모습으로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고 적어도 함께 있음으로써 그것을 즐기는 것이 그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다. 자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고 하여 그가 삶에 대한 생각을 내던지는 것은 전혀 아니며, 평상시의 어울림을 피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건강할 때 병을 탐구해보고 싶다. 병이 들면 내 상상력이 그것을 돕지 않더라도 병은 충분히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한다.(357쪽)
내 생각과 태도를 책으로 펴내다 보니 생각지 않았던 이점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내게 얼마만큼은 규칙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따금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배신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공적 선언은 내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구속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판단력에 담긴 사악함과 병이 생각보다는 덜 훼손시키고 덜 왜곡해 놓은 나의 자질들을 거짓 없이 그리도록 만든다.(357쪽)
우리는 몸을 기댈 권리는 있지만, 그러나 다른 이를 무겁게 짓누르며 그 위에 몸을 눕히고, 무너져 버린 그들을 기둥 삼아 자신을 버틸 권리는 없는 것이다. 자기 병을 치료하겠다며 그 피를 쓰려고 어린아이들의 목을 따던 자처럼 말이다.(361쪽)
노쇠란 홀로 있기를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나는 과도하리만큼 사교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내 거북한 모습을 거두어 들이고, 나 홀로 그것을 품으며, 내 몸을 웅크려서 마치 거북이처럼 나의 껍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나는 사람들에게 들러붙지 않고도 그들을 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함께 다니려 하는 것은 철모르는 짓이다. 이제는 무리 지어 있는 곳에는 등을 돌릴 때이다.(361쪽)
내가 아파 누우면 무슨 대단한 것이 내게 필요하진 않다. 자연이 내 몸을 두고 어떻게 해 주지 못하는 것을 동방 세계의 저 묘약이 해 주리라 나는 바라지 않는다.(362쪽)
내 허약한 기질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면, 고백하건대 나는 여행길에 어떤 숙소에 도착하면 늘 내가 여기서 편안하게 앓다가 죽을 수 있는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곤 한다. 시끄럽지도 더럽지도 않고 연기가 끼거나 답답하지 않은 곳, 무엇이나 내게 적당한 그런 곳에 나는 머무르고 싶다. 나는 이런 소소한 안락함으로 죽음의 비위를 맞추려 하며, 더 낫게 말하자면 다른 모든 거북함에서 벗어나 오직 죽음을 맞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하니, 다른 부담 아니더라도 죽음은 그 자체로 나를 충분히 무겁게 짓누르기 마련이리라. 죽음도 내 삶의 평안함과 안락함에 제 몫을 지니고 있으면 싶다. 죽음은 삶의 커다란 한 부분이며, 중차대한 것이니 앞으로 남은 이 부분이 지나온 삶과 너무 다르지 않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365쪽)
바보들에게 좋은 죽이 있고 지혜로운 자들에게 좋은 죽음이 있으니, 우리는 그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 좋을 죽음을 찾아보자. 내 상상 속에서는 손쉬운 죽음의 얼굴도, 바람직한 죽음의 얼굴도―죽어야 하는 마당에 어떻게 바람직하단 말인가?―떠오르지 않는다. 로마의 폭군들은 죽는 방식의 선택권을 주면서 자기가 죄수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토록 섬세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철학자 테오프라토스야 말로 나중에 키케로가 라틴어로 옮긴 저 시구를 이성의 요구에 따라 읊었던 것 아닌가?
삶은 우리의 지혜와 상관없다.
운명이야말로 우리 삶의 키잡이리니.
_키케로(366쪽)
운명은 내 삶을 이제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또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는 지점에 데려다 놓았으니, 내 삶을 무엇과도 가볍게 교환할 수 있게 도와준 운명의 신은 얼마나 고마운가! 내 삶의 어떤 시절이라도 내가 받아들였을 조건이지만, 이제 주섬주섬 내 물건을 챙기고 가방을 꾸려야 할 이 시점에, 내 죽음을 통해 어떤 누구에게도 기쁨을 주거나 괴로움을 안기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이 나는 특별히 기쁘다. 운명은 놀랍도록 균형을 맞추어, 내 죽음으로부터 어느 정도 물질적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상속자들은 동시에 그로부터 물질적 손해를 입도록 해 두었다. 죽음은 때로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옥죄게 하며, 우리 자신의 근심 만큼이나 그리고 이따금 그 이상으로 그들이 느낄 근심 때문에 우리를 아프게 한다.(367쪽)
나는 내 동국인들이 자기네 것과 반대되는 방식에 대해 질겁하는 어리석은 기질로 인해 아둔해진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럽다. 그들은 자기 동네 밖에 나가 있으면 자기들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자기네 방식을 고수하며, 외국의 방식을 혐오스러워한다. 헝가리에서 동국인을 한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그들은 이 사건을 축하한다. 서로 어깨를 걸고 단단하게 엮여 자기들이 본 무수한 야만적 풍속을 단죄한다. 아무렴 그 풍속이란 것이 프랑스식이 아닌 바에야 왜 야만적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것을 알아보고 흉을 보는 것은 가장 총명한 치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돌아오기 돌아오기 위해서만 간다. 그들은 말없고 소통 불가능한 신중함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 갇힌 채, 모르는 세상의 대기에 오염되는 것을 방비하며 여행하는 것이다.(369쪽)
어디로 가면 그대를 가로막고 괴롭히는 것을 안 만나리라 생각하는가?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운명의 호의는 결코 없다.”(쿠르티우스) 그대를 가로막는 것은 그대 밖에 없다는 것을 알라. 그리고 그대는 어디서나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고, 어디서나 그대 자신을 탄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 하늘 아래에서는 짐승이나 신들의 영혼만이 만족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가 이러한데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서 그것을 찾으랴? 이 세상에는 그대의 처지 정도가 갈망의 최대치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저 그대 자신의 됨됨이를 다시 만들라. 왜냐하면 바로 그 됨됨이 안에서 당신은 무엇이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 앞에서 당신은 그저 참아 낼 권리밖에는 없는 법. “이성에 의지하는 평온함 말고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온은 없다.”(세네카)(373쪽)
줄 하나로는 나를 붙들어 놓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대는 말하리라. “그런 식의 즐거움이란 헛되다.”라고. 그러나 헛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여기 멋진 격언들도 헛되고, 모든 지혜도 다 헛된 것이다. “주님은 현자들의 생각을 알고 계시며, 그것이 헛된 것일 뿐임을 아시니라.”(시편 및 고린도전서) 이 빼어난 섬세함은 오직 설교에만 적합한 것이다. 그것운 우리 모두를 말에 태워 다른 세계로 보내고 싶어 하는 듯한 이야기다. 삶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움직임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 무질서하고 불완전한 행동이다. 나는 그 조건에 따라 삶을 섬기고자 노력한다.(374쪽)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가 의로운 인간인지를 되돌아볼 생각도 아예 못 하지만 우리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한 인간이 될 능력도 없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처방해 놓은 의무들의 수준에 결코 다다르지 못했다. 설사 다다랐다 하더라도 그랬다면 인간은 그 지점 너머에 또 다른 의무들을 처방해 줄곧 거기 이르고자 열망하고 요구할 것이니, 그만큼 우리의 마음 상태는 한결같음에 적대적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과오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를 자기 아닌 다른 존재의 이치에 맞춰 만들어 내니 도저히 영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도 못 해내리라 예상되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 처방하는 것일까? 자기에게 불가능한 것을 아예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불의한 자인가? 법은 우리가 해낼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나서 해내지 못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다.(378쪽)
세상일에 동원되는 미덕은 인간의 허약함에 적용되고 또 거기 결합되기 위해 여러 겹의 주름과 갖가지 모서리와 팔꿈치 관절을 지니고 있으며, 뒤섞이고 인위적인 것으로서 곧고 맑고 한결같거나 티 없이 결백한 것은 아니다.(379쪽)
이런 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선의 징표는 자신의 과오와 타인의 과오를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것이며, 악으로 향하는 경향에 힘을 다해 저항하고 어떻게든 제동을 걸며, 이 비탈길을 마지 못해 내려가면서도 더 나은 것을 희망하고 갈구하는 일이다.(382쪽)
온전히 물질적인 나에게 현실적인 것, 그것도 묵직한 것으로밖에는 만족하지 않는 나에게 말이다. 그리고 감히 고백하자면, 나는 인색함이 야심만큼이나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불명예만큼이나 고통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건강이 학문만큼이나, 재산이 귀족만큼이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394쪽)
내가 하듯이 다른 이들도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내가 그러하듯 자신들이 부질없고 바보 같은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이다. 내 안에서 그런 것들을 지우다가는 나 자신을 지워야 하게 되리라.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비슷하게 그런 요소들로 절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가 알기로 대가를 조금은 헐하게 치르고 거기서 벗어난다.
우리 말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을 당연시하는 모두의 습관은 우리를 멋지게 곤경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우리 자신이란 불만에 가득 찬 대상이다.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비참과 헛됨뿐이다. 우리가 낙담하지 않도록 대자연은 적절하게도 우리의 보는 행위를 바깥쪽으로 던져 놓은 것이다. 우리는 물길을 따라 아래로 쓸려간다. 그러나 그 흐름을 거슬러 우리로 향하게 되돌려 놓으려는 것은 힘든 움직임이다. 바다도 이처럼 자기에게 거슬러 물결이 일면 혼란 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된다. 누구나 말한다, 보라 하늘의 움직임을, 보라 세상을, 저 사람의 다툼을, 이 사람의 맥박을, 또 저 사람의 유언장을. 요컨대 항상 위쪽을 혹은 아래쪽을 혹은 옆을 아니면 당신 앞이나 뒤를 보라고 한다.
옛날 저 델포이의 신이 우리에게 했던 명령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대 내면을 바라보라, 그대를 알고자 하라, 그대에게 집중하라. 그대의 정신과 그대의 의지는 지금 다른 곳에서 소모되고 있는데, 그것을 그대 안으로 가져오라. 그대는 그대 자신을 흘려보내고 흩뿌리고 있다. 그대의 밀도를 높이라, 그대의 고삐를 죄라. 사람들은 그대를 속이고 있고, 산만하게 하고 있으며 그대에게서 그대를 훔쳐 가는 중이다. 이 세계는 그 모든 시선을 늘 안으로 향하고 있으며, 자기를 명상하기 위해 늘 눈뜨고 있다는 것이 너는 보이지 않는가? 안으로건 밖으로건 너에게는 늘 헛됨뿐이지만 외부로 덜 뻗으려 할수록 그 헛됨은 줄어들리라.
그 신은 말하고 있었다. 오 인간이여, 너를 제외하고는 세상 만물이 우선 자기를 탐구하며, 자신의 필요에 맞게 자신의 욕구와 작업에 한계를 둔다. 너처럼 텅 비고 보잘 것 없는 자는 따로 없는데도 너는 우주를 껴안으려 한다. 아는 것 없는 탐색자요, 판결권 없는 재판관인 너는 결국 웃음거리 소극에 나오는 어릿광대일 뿐이로다.(397~3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