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적인 느낌인지는 몰라도, 이제 해가 좀 길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작 때에는 아직 어두워도 끝나면 많이 밝아집니다.
이번 주에는 10장 '자기 의지를 조절하는 것에 관하여'를 읽었습니다.
이전 번역인 <수상록>에서는 '자기 의지의 아낌에 대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네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내 마음을 건드리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사로잡는 것은 거의 없다."
라는 당찬 멘트로 시작하는 이 장에서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 중심을 유지하는 몽테뉴 자신의 기예들이 등장합니다.
보르도 시장직을 맞게 되었던 자신의 경험, 노년이라는 상황, 조급함과 탐욕 없는 성격의 중요성 등이 녹아 들어 간 문장들은
언제나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제게 꽂힌 문장 하나를 들자면 이것입니다.
"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의무를 안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대자연이 그들에게 이미 충분히 벅찬 일거리를 주었으며 조금도 한가할 틈이 없다고 여긴다. 너는 네 안에 충분히 일거리가 있으니 멀리 가서 찾지 말라."
자기 의무, 아마도 자기가 스스로에게 지운 의무로 이미 충분한 사람은 다른 소일거리로 산만해지지 않는다는 뜻 같은데요.
왜인지 심금을 울렸습니다. 또한 이런 문장들은 놀람과 키득거림이 함께 들었죠.
"자식들이나 명예를 노예 같은 애정으로 마음에 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을 잃고 난 뒤라도 여전히 담담하게 살아간다. 공들여 일하는 것이 주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 사람은 다른 이들이 자기 행동을 그 장점과는 반대되게 판단해도 전혀 언짢아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깨작거리지 않고, 샘들께서 몽테뉴에 대한 애정을 담아 남겨주신 필사를 함께 보겠습니다!
10장 자기 의지를 조절하는 것에 관하여
내 감관은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사물을 파악하기는 둔하고 집중력은 흐릿하다. 나는 쉽게 무엇에 몰두하지 못한다. 나는 가능한 한 나 자신에 온전히 전념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경향에 대해서도 기꺼이 억제하고 온전히 거기 빠져들지 않도록 고삐를 틀어쥐려 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소유한다는 것은 외부의 힘에 달린 것으로서 나보다는 운명의 신이 그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중히 여기는 건강마저도 너무 갈급해 찾다 보면 병을 견디기가 어렵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고통에 대한 혐오와 쾌락에 대한 사랑 사이 중간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둘 중간에 있는 삶의 길을 처방한다.(399쪽)
사람들이 이따금 나와 관계없는 일을 맡아 달라며 나를 떠미는 경우에도 나는 손을 써보겠다고 했지, 폐와 간에 담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짐을 매겠다는 것이지 내 몸에 담겠다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쓰겠다는 것이지 전념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유념하여 볼 뿐 그 일을 품에 안고 다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남의 일들을 담아 두고 나를 짓밟게 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일을 청해 부르지 않고도, 본질적이고 나만의 것인 내 배 속과 핏줄에 지닌 내 일거리들을 정리정돈하기에도 나는 벅차다. 자기네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의무를 안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대자연이 그들에게 이미 충분히 벅찬 일거리를 주었으며 조금도 한가할 틈이 없다고 여긴다. 너는 네 안에 충분히 일거리가 있으니 멀리 가서 찾지 말라.(400~401쪽)
“그들은 바쁘게 지내기 위해서 바쁘다.”(세네카) 그들은 일 속에 있기 위해서 일을 찾을 뿐이다. 그들은 움직이기를 원한다기보다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흔들리는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서 쓰러져 눕기까지는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바쁘다는 것이 능력과 위엄의 표시이다. 그들의 마음은 아이들이 요람에서 그렇듯 흔들리는 데서 휴식을 얻는다. 아무도 자기 돈을 남에게 나눠 주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기 시간과 자기 삶은 나누어 준다. 이런 것에 대해서만큼 우리가 후하게 구는 것도 없지만, 이런 것을 인색하게 아끼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또 칭찬할 만한 태도일 것이다.(401쪽)
진실에는 장애와 불편함과 우리와의 부조화가 들어 있다.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 우리 자신을 속여야 하며, 때로 더 분명하게 보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이해력을 무디게 해야 할 때도 있다. “판결하는 자들이 풋내기일 경우는 그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때로 그들을 속여야 한다.”(404쪽) 우리 자신에 앞서서 셋, 넷 혹은 오십 가지 범주의 대상을 더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활 쏘는 궁수들을 흉내 낸 것이니, 그들은 표적을 맞추기 위해 목표 지점 훨씬 위를 겨냥하는 것이다. 굽은 나무를 바로 펴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구부린다.(404~405쪽)
자기에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 중 하나가 다른 이들과의, 그리고 세상과의 교류라는 것을 알게 되며, 그것을 위해 자기와 관련된 의무와 직책을 수행함으로써 공적 사회에 기여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얼마간 타인을 위해 살지 않는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전혀 살지 않는 셈이다.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될 때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세네카)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책무는 각자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는 정작 행복하고 성스럽게 살기를 잊은 사람이 남들을 그렇게 살도록 이끌고 훈육시킨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여긴다면 그는 바보일 것이다.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삶을 마련해 주기 위해 정작 자기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연과 어긋나는, 나쁜 선택을 하는 셈이다.(405~406쪽)
이처럼 날카롭고 격렬한 욕망은 우리의 기획을 수행해 가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되며, 결과가 지체되거나 불리할 때 우리를 초조함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의 협상 상대들을 향해 앙심과 불신에 사로잡히게 한다. 어떤 일이고 우리가 그 일에 사로잡혀 끌려가면 그 일은 제대로 해낼 수가 없는 법이다. “격앙된 감정은 한 번도 어김없이 만사를 그르친다.”(스타티우스)
반면 자신의 분별력과 자질만으로 일을 처리하는 자는 훨씬 즐겁게 임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 필요하면 아닌 척하기도 하고 슬쩍 피하기도 하며 마음껏 미루기도 한다. 실패를 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아파하지 않으며, 온전히 새로운 계획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항상 고삐를 제 손에 쥐고 간다. 격하고 고집스런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서는 어쩔 수 없이 신중함이나 적절함이 상당히 부족한 것을 보게 된다. 욕망의 맹렬함이 그를 압도하고 있어서 그의 행동은 무분별하며, 운명이 그를 애써 돕지 않는다면 결실을 맺기가 어렵다. 철학은 우리에게 모욕받은 것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분노를 피하라고 가르친다. 복수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더 제대로 타격을 가하고 훨씬 무거운 보복이 되게 하려면 말이다.(407쪽)
분노는 복수하려고 하는 시야를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두 팔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게 만든다. 그 불길은 그가 가진 힘 전체를 마비시키고 소진시킨다. 급히 서두르면 “덤벼들수록 더 늦어지는”(퀸투스 쿠르티우스) 식이어서, 다급함은 자신의 발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고 스스로 뒤엉키다 제 풀에 멈춰 서게 되는 것이다. “조급함이 그대를 묶어 버린다.”(세네카) 사람들이 흔히 하는 행습에서 내가 목도하는 바에 따르면, 탐욕은 자기보다 더 큰 방해자가 없다. 더 긴장되고 더 격렬하게 목표물에 다가갈수록 탐욕이 가져오는 결과물은 더 미미하다. 그것은 보통 아낌없이 주는 관대함을 가면으로 쓰고 있을 때 더 잽싸게 재물을 낚아채 온다.(407~408쪽)
자기도 남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일들을 겪으며 그 심각성을 알아보지만 되돌릴 길이 없는 문제들은 즉각 그냥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는 것이다. 그 밖의 일들은 우선 필요한 조처들을 취하는데, 정신이 명민한지라 즉각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뒤 평안하게 그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408쪽)
나는 그가 행운 속에서보다는 불운 속에서 더 위대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그의 패배가 그의 승리보다, 그의 압승보다 그의 불행이 더 영광스러운 일이다.(408쪽)
더욱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주게 되면 영혼은 그 장악하고 붙드는 힘을 방해받게 된다. 어떤 것들은 그저 영혼 앞에 제시되기만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은 영혼에 붙들어 매야 하며, 또 어떤 것들은 영혼 속으로 깃들게 해야 한다. 영혼은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을 먹고 살아야 하며, 정말로 자신과 관련된 것에 대해, 자기 소유이고 자기 실체인 것에 대해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은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 현자들은 이르기를, 자연에 따른다면 누구도 헐벗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견해에 따른다면 누구나 헐벗은 상태라고 했는데, 그들은 이처럼 자연에서 비롯하는 욕망과 우리네 상상력의 무절제에서 오는 욕망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끝이 보이는 욕망은 자연의 것이며, 우리 앞에서 줄곧 멀어지면서 우리가 그 끝을 잡을 수 없는 욕망은 우리의 것이다. 재물의 빈곤은 치유하기가 쉽다. 그러나 영혼의 빈곤은 치유가 불가능하다.(409쪽)
습관은 제이의 천성이고, 천성 못지않게 강력하다. 내게 습관이 된 것이 결여되면 나는 그것을 내게 결여된 것이라 여긴다.(410쪽)
나는 이제 더 이상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처지도, 새롭고 낯선 생활 방식으로 뛰어들 만한 형편도 아니다. 그것이 더 고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 말고 다른 내가 될 시간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나이에 무슨 대단한 행운이 내 손에 쥐여진들, 내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시절에 내게 온 것이 아니라며 한탄하려 하듯이,
내가 그것을 즐길 수 없는데
행운이 온들 어디에 쓰겠는가?
_호라티우스(410~411쪽)
추락하는 데는 기예가 필요 없다. 모든 일의 끝에는 본래 종말이 나타나는 법이다. 나의 세계는 몰락했고 나의 형체는 텅 비었다. 나는 온전히 과거에 속하며 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 맞추어 내 출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412쪽)
요컨대 여기 나는 지금 이 사람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을 가지고 도 다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습관을 통해 나의 이 형식은 실체가 되었고 그 운명은 천성이 되었다.(413쪽)
우리의 필요와 소유를 더 확장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우리를 운명과 역경의 타격 앞에 드러내놓게 된다. 우리 욕망의 무대는 가장 손쉽고 바로 인접해 있는 즐거움들의 좁은 테두리 속에 제한되고 한정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 궤도는 다른 어딘가에서 끝나는 직선이 아니라, 출발과 도착의 두 지점이 짧은 윤곽을 그리며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거기서 종결되는 곡선이라야 한다.(413쪽)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은 익살극이다. “온 세상이 희극을 공연 중이다.”(페트로니우스, 유스투스 립시우스의 인용)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마땅하게 연기해야 하지만 그러나 빌려온 인물의 역할로서 연기해야 한다. 가면과 분장을 진실한 본질인 양 해서는 안 되며, 남의 것을 우리 고유의 것인 양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피부와 속옷을 나눠 놓을 줄 모른다. 얼굴에 분칠하는 것으로 족하지 가슴까지 분을 칠할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을 보면 자기들이 맡는 직책만큼이나 매번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존재로 변모되고 변질되며, 간장과 창자까지 주교 노릇을 하는가 하면, 자기 직위를 실내용 변기에 까지 끌고 간다.(414쪽)
그것은 자기 나라의 관습이며, 거기에 이로운 점도 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며, 우리 앞에 놓인 바 그대로의 세상을 선용해야 한다.(414쪽)
사람들은 자기네 편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몹시 좋게 여긴다. 나로서는 내 편에게서 보이는 것 대부분을 심지어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은 그것이 나의 대의를 반박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 멋을 잃지는 않는다. 논쟁의 핵심에 대해서 말고는 나는 언제나 차분함과 철저한 무심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전쟁의 불가피성에 따르는 것 이상으로는 어떤 심각한 증오심도 키우지 않았다.”(리비우스를 변용)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스럽다. 사람들은 보통 이와 반대되는 잘못을 저지르니 말이다. “자기 이성을 따를 수 없는 자는 정념에 빠지도록 두라.”(키케로) 자신들의 관심사 너머로까지 분노와 증오를 연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태도이지만, 이것은 이런 정념의 원천이 어딘가 다른 곳, 자기네의 사사로운 동기에 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궤양에서 회복된 사람이 아직 열이 있는 것은 뭔가 더욱 감춰진 다른 병인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 대의가 모든 사람과 나라의 이익을 해친다고 여기면서 그런 격렬한 적대감을 느끼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그 대의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은 공공의 정의와 이성과 무관한 사적인 감정으로 격앙된다. “그들 모두가 일치하여 전체 내용을 비난하기보다는, 각자 자기 이익과 관련된 세부사항을 두고 비판하는 것이었다.”(리비우스)(415~416쪽)
이를 통해 나는 대중의 오류란 불가피하게 이런 길을 밟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오류가 나타나면 마치 바람 따라 물결이 일 듯 다른 오류들이 줄지어 따라 나온다. 만약 거기서 벗어 나오려고 하고, 폭풍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기를 거절하며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만일 정의로운 파당을 도우려고 협잡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파당을 해친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방식에 대해 줄곧 반대해왔다. 그것은 병든 정신을 가진 이들이나 반길 사술(邪術)이다.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는 역경을 설명해 주며 용기를 북돋는, 더 명예로울 뿐만 아니라 보다 확실한 길들이 있다.(418쪽)
마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양 왕공들의 호의를 입 벌린 채 뒤쫓아 다니지는 않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맞아 주는 태도나 얼굴 표정이 쌀쌀맞다 해도, 그들의 기분이 변덕스럽다고 해도 다지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자식들이나 명예를 노예 같은 애정으로 마음에 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을 잃고 난 뒤라도 여전히 담담하게 살아간다. 공들여 일하는 것이 주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 사람은 다른 이들이 자기 행동을 그 장점과는 반대되게 판단해도 전혀 언짢아하지 않는다. 그런 거북한 경우에는 아주 미량의 인내심을 마련해 두는 것이다. 나는 이 처방에 만족하는데, 처음부터 나의 자유를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사 두는 것이니 그 덕에 많은 수고와 곤란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낀다. 나는 내 감정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별다른 노력 없이 그것을 멈추게 하며, 무엇이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나를 휩쓸어 가기 전에 내려놔 버린다.
출발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자는 그 흐름도 제지할 수 없다. 정념들 앞에 문을 닫아걸지 못하는 자는 일단 들어온 뒤에는 그것을 쫓아낼 수가 없다. 처음의 고비를 제대로 넘지 못하는 자에게 마지막 고비는 더 넘기 어렵다. 그리고 처음 충돌을 버텨 내지 못하는 자는 붕괴하는 것도 피할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한번 이성에서 벗어나면 정념들은 저 멀리까지 날뛰니 말이다. 인간의 허약함은 자신에게 무엇이든 허락하다가 자기도 몰래 너른 바다까지 나아가고, 그때는 닻을 내릴 어떤 곳도 찾을 수 없게 된다.”(키케로)
나는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내 영혼에 도달해 슬쩍 나를 건드려보고 중얼거리기 시작하면 태풍의 전조임을 제때 감지한다. “몰아쳐 오기 이미 오래전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한다.”(세네카)(424쪽)
내 천성에는 고문이나 화형보다 더 끔찍했던 저 비천하고 한심한 소송 방식과 답답함의 시대가 지난 이후, 판관들로부터 당하는 더 험악한 불의를 피하기 위해 나 스스로 분명한 불의를 감수했던 것이 그 몇 번이던가?(425쪽)
우리는 차라리 부드럽고 냉정하게 시작하면서 일이 어렵고 완성에 이르는 때를 위해 호흡과 힘찬 도약을 아껴 둬야 하리라. 일의 처음에는 그것을 이끌어 가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우리이지만, 나중에 일이 일단 시작되고 나면 일 자체가 우리를 이끌고 휩쓸어 가니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427쪽)
어떤 사람들을 보면 경기장에 등장할 때에는 분별없고 맹렬한 기세인데, 달릴 때는 무기력해진다. 플루타르코스가 이야기하기를, 지나치게 수줍음을 타는 이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요청하건 순하고 쉽게 끄덕이는데, 나중에 자기 언약을 지키지 않거나 부인하는 것도 쉽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쉽사리 언쟁을 벌이는 사람은 그만큼 쉽게 거기서 빠져나가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를 어려워하는 나는 마찬가지로, 일단 시작해 열이 오르면 더 자극을 받는다. 그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다. 일단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가야 하니 말이다. 느긋하게 시작하되 뜨겁게 계속하라고 비아스는 말한다. 신중함의 결여 때문에 자기 제어의 용가기 결여된 상태로 퇴락해 가는 것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다.(428쪽)
우리는 우리 생각을 부인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솔직함도, 우리가 가진 용기의 명예도 포기하며,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허위 속에 [도망처로서] 토끼굴을 파놓는다. 우리는 우리가 부인했던 사실을 은폐하려고 우리 자신까지도 부인한다. 당신의 행동이나 말이 해석될 수도 있는지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당신이 앞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참되고 진실한 해석이다.(429쪽)
우리에게는 우리 처지에 적절한 즐거움들이 있다. 위대함에 주어진 즐거움을 붙들려고 하지 말자. 우리의 즐거움들이 더 자연스러우며, 대지에 가까이 있어 더 소박한 만큼 그것은 더욱 단단하고 확실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아는 분별력으로 그렇게 안 된다면, 명예욕으로써 우리는 명예욕을 거부하자. 명성과 명예에 대한 이 저열하고 구걸하는 굶주림을 경멸하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천한 수단을 통해, 그리고 아무리 모욕적인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냥질하게 하니, “어물전에서 구할 수 있는 이 영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435쪽)
시장으로서 나는 오직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만 해야 했는데, 이것은 소리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이다. 쇄신은 자못 휘황하지만 우리가 힘겹게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주로 새로운 것들에 맞서 우리를 지켜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시대에는 금지된 것이다. 무언가 하기를 삼가는 것은 이따금 그것을 하는 것만큼이나 고결하지만, 그것은 빛을 덜 본다. 그리고 내가 얼마라도 이뤄낸 공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이 그늘진 쪽에 있는 것이다.(436쪽)
왜냐하면 나는 보통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덜, 그리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보다 적게 약속하려고 조심하기 때문이다.(4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