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늦은 후기 올립니다. 세미나 이후 다시 읽어보기를 시도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갔네요. 현미밥알이 처음 씹을 때는 입안에서 겉돌고 거칠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것처럼 처음에는 의미가 좀처럼 잡히지 않은 문장들이었는데 읽을수록 숨겨진 의미들을 발견하며 감탄했어요. 세미나에서 제가 이해한 부분들과 다시 읽으면서 이해하게 된 내용(맞는지는 모르겠지만)들 중심으로 정리했어요^^
출발점으로서의 ‘감동’
지난 시간 창조가 감동이며 감동이 지성을 전진시킨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도덕, 질서,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감동’이라니! 낯설었지만 지성 이전에 ‘감동’에서 출발한다는 부분에서 그야말로 마음이 움직였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감동이 우리를 고양시키고 우리는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데 이 감동은 새로운 도덕,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있었다. 이 감동은 의지의 측면에서는 약동으로 연장되고 지성에서는 설명적 표상으로 연장된다고 하였다. 에세이를 끝낸 크크랩 샘들은 글, 예술도 지성이 아니라 감동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지점을 이야기하며 격하게 공감했다. 그런데 이 감동이 시작되는 지점을 우리는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 하는 지안 샘의 의문이 예전부터 ‘느낌’을 감지하는 것이 참 어렵다고 생각해온 나에게도 깊이 공감되었다. 그런데 이 ‘느낌’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만의 어려움은 아니었던 듯하다. 베르그손이 도덕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말이다.
두 도덕의 세계
베르그손은 도덕의 절반은 의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의무들을 출현케 한 사회적 요구(압력)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그 나머지 부분(어떤 감동적 상태를 번역하고 있는)은 발견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압박이 아니라 매력(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힘)에 복종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인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있는 원본적 감동을 대체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9쪽)
도덕의 양극단에서 이와 같은 압력과 열망이 발견되는데 압력은 습관, 본능으로 부르기조차 하는 자연적 힘에 가까울수록, 열망은 이 자연에 대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더 강력하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도덕을 의무이자 습관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익숙했지만 ‘자연’과 연결해 설명하는 부분의 의미는 잘 와 닿지 않았다. 기존에 ‘자연’이란 단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열려 있음, 변화, 예측불가능성 등) 때문일 것이다. 현주 샘이 이 맥락에서 ‘자연’이란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닫힌 세계라고 의미를 정리해주셔서 습관, 본능을 자연적 힘이라고 한 구절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습관, 본능, 의무들의 세계 즉 압력의 도덕과 달리 열망의 도덕은 앞서 말한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있는 원본적 감동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감동을 느끼고 고양될 때의 도덕은 진보의 감정, 전진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키는데 종교의 창시자들과 개혁가들, 신비가들과 성자들을 통해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은 도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감동을 전파한다.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3요소로 꼽은 것 중 에토스, 설득에 있어서 화자의 인품, 인격이 중요하다고 한 부분이 떠올랐다. 현란한 말솜씨를 지닌 사람보다는 말하는 이의 인품 자체에서 감동을 받고 그 모습을 닮아가고 싶어 기꺼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들 말이다.
열려지는 영혼
베르그손은 열린 영혼의 예로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이에 앞서 열린 영혼에 대해 설명하면서 열린 영혼은 물질적인 장애를 부정(否定)함으로써 단번에 전체를 거부한다고 말한다.(이 부분은 여전히 어렵다!)그리고 장애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발생되는 것 같지만 의도를 고려하면 모순은 사라진다고도 말한다. 베르그손은 복음서의 도덕을 예로 들어 부(富)가 악(惡)이라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눠줌으로써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모순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도다. 아름다운 것은 가난하거나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을 느끼지 않는 것(84쪽)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예수가 ‘부’와 ‘가난’의 구도를 단번에 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열린 영혼은 이러한 정신성을 통해 장애를 넘어가는 자들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성은 특권적 개인, 천재적 인간들에게만 가능한 것인가?
후기를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부분은 ‘열려지는 영혼’이라는 구절이었다.(91쪽) 앉아 있을 때의 부동성과 달릴 때의 운동 사이에 있는 일어남, 몸을 일으킬 때 취하는 태도, 이 중간적 상태를 ‘열려지는 영혼’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명쾌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 일어남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닫힌 영혼(자연에 의도된 것, 습관, 지성 이하의 것)과 열린 영혼(천재적 인간이 가져온 것, 열망, 직관, 감동, 초지성적일 것) 사이에 지성이 존재한다는 설명에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됐다. 지성은 닫힌 영혼의 도덕을 지배했지만, 지성은 열린 영혼의 도덕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거나 오히려 창조하지 못했다.(92쪽) 지성의 태도가 일어남의 결과인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작용하는 두 가지 힘, 충동과 매력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은폐하는 지성성에 만족하고 있다고 베르그손은 지적한다. 충동(압력)과 매력(열망)의 힘을 끌어내는 대신 적당히 이들이 녹아들어 있는 도덕적 개념 이외에 더는 보지 못하고 결국 지성주의 도덕들의 실패를 확인할 뿐이라고 말이다. 결국 지성이 열망을 어떻게 끌어내는가가 지성의 일어남, 열려지는 영혼의 상태를 좌우할 것이다. 지성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닫힌 영혼에서 열린 영혼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도덕적 위인들의 정신성에 가닿을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
자존심에 담긴 그들의 호소
봉우리 하나하나를 넘는 느낌이 든다^^ 이제 자존심이라는 봉우리. 어떠한 맥락에서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이 여기에 놓여 있는 걸까. 정직한 사람(도덕적)이 자존심에 의해 행동한다고 할 때 이때의 자존심이란 인간들 사이에서 뛰어난 자아로서의 인간이 되는 자아에 대한 존경심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명예’의 감정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존심의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때 사회적 자아가 추구하는 존경심이라는 것이 작동한다는 것인데 자존심이 사회적 감정이라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그런데 (사회적 압력을 가져오는 모든 것에 의무를 부과하는) 이 자존심만으로 위대한 도덕적 인물의 행위와 그들의 호소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설명할 수 있을까. 베르그손은 우리의 존경심이 향하는 것은 이상적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위대한 도덕적 인물들이 우리를 이상적 사회로 이끌고 간다고 했다. 우리 영혼의 심층에서 응답하게 하는 그들의 호소는 이상적 사회,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한다면 그들의 옛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그런 사회(115쪽)로 이끌고 가는 도덕적 창조자들의 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자신 안에 이 도덕적 창조자들의 이미지를 지니고 그와 섞이기를 열망하는 존경받는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내 안의 감동, 열망, 닮아가기를 열망하는 존경의 인격, 이상 사회에 대한 이끌림은 그 이끌림이 시작될 때 알아채기보다 한참 이끌려간 뒤에 발견하게 되곤 했다. 베르그손을 읽어가면서 그 이끌림의 과정에서 지성을 작동할 수 있게 한다면, 지성이 작동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기대된다!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현미밥알 같은 베르그손의 글!^^ 지난 시간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저도 우리가 아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표상에 선행하고 표상의 원인이 되는 감동'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해보게 되네요... 흥미진진한 베르그손의 논의로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담 시간도 기대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