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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으면서 당위로 다가왔던 도덕, 비합리적으로 느꼈던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착해야 한다.’, ‘덕 있는 사람이 되자.’, ‘나눔을 실천하자.’, ‘반드시 약속은 지켜야 한다.’ 등 윤리와 의무에 대해 배우고 계속 얘기를 들어오고 있지만, 왜 실천이 안 되는 걸까요? 아무리 훌륭한 덕목이더라도 금과옥조 같은 말이더라도 우린 생각보다 잘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키지 않고 있지요. 왜 당위로는 사람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가에 대하여 베르그손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윤리와 종교는 지성 이하의 힘과 관념 이상의 초지성적인 힘과 함께 작동하는데요. 이 두 힘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용하지만, 지성의 장에서 투사됩니다.
“질서에 관한 의무는 그것이 원래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지성 이하의 것이다. 호소의 효력은 이전에 일깨워졌고, 아직도 그러하거나 앞으로도 그러할 수 있을 감동의 능력에 기인한다. 이 감동은, 그것이 단지 관념들로 무한히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관념 이상이다. 그것은 초지성적인 것이다. 이 두 힘은 영혼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용하면서 중간적 장 위에 투사되는데, 이 중간적 장이 지성의 장이다.”(121~122p)
저는 상기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두 힘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작용한다면 이들이 서로 만나 섞이기 어려울 텐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지성이라는 거지요. 이 두 힘은 그 자체로 직접 부딪히는 게 아니라 이들의 투사물에 의해 대치되면서 서로 섞이고, 상호 침투합니다. 이런 작용에 의해 질서들과 호소들은 순수 이성의 용어로 전이되는데요. 질서들과 호소들이란 베르그손이 121p에서 얘기한 문명화된 인류가 받아들인 도덕의 일반적 형식 2가지를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비인격적인 사회적 요구들에 의해서 강요된 질서들의 체계, 두 번째는 인류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대표하는 인격들에 의해서 우리 각자의 의식 속에 던져진 호소들의 전체를 말하지요. 저는 이런 측면에서 윤리와 종교에서 지성의 역할을 봤습니다. 이들이 섞이고 상호 침투할 수 있는 중간적 장이 된다는 측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왔거든요. 한편 민호샘은 이에 대하여 도덕성이 어떻게 동질적으로 되면서 비교가 가능하고, 동일하게 측정될 수 있는지에 관한 설명과 연결되므로 여기에서 지성은 어떤 힘들을 언어화하고 해석하는 힘이라기보다는 도덕을 합리주의 및 공리주의 등과 연결하는 것으로서 봤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맥락상 이렇게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네요. 베르그손은 이 부분에서 지성주의 윤리학, 공리주의 윤리학을 비판하거든요. 그는 지성의 관점에서 위치하는 윤리학을 넘어가고자 했지요.
그렇다면 왜 지성으로는 윤리에 도달할 수 없는 걸까요? 1~2주차에도 계속 얘기된 부분인데요. 의무, 도덕적 동기들에서 중요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충동과 매력이었습니다. 전자는 사회적이고 후자는 초사회적인 것으로 베르그손은 사회를 넘어 생명, 인류 전체로 뻗어나갈 수 있는, 즉 열린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 감동과 매력을 말했습니다. 지성은 개인이 삶의 역경들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데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능력으로 이기주의적인 해결로 이끕니다. 즉 이기적이란 얘기지요. 그런데 지성은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하는 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성은 이렇게 자신을 설득합니다. 나의 이기주의를 위해 모든 다른 이기주의들에도 그들의 몫을 남겨놔야 한다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공리주의가 떠오르지 않나요? 우리는 윤리를 이런 측면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지요. 법이든 윤리를 마음이 울려서 지킨다기보다는 그렇게 안 하면 손해를 본다는 측면이 강합니다. 내 이익이 뭔가를 지키지 않는 편이 크면, 서슴없이 선을 넘어가기도 하고요. 지성이 발달하고 강조되면 더 합리적이고 질서가 잘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베르그손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이런 고정관념과 상식이 깨집니다.
지성은 우리를 이기적인 걸 선택하도록 하기에 이것이 더 확대되면 사회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등장하는 것이 본능이지요.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에 기반하여 양적이고 계산적인 것과 함께 작동하는데 자본주의가 왜 반생명적인 것인지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생명의 진화는 두 주요한 노선 위에서 사회적 삶의 방향으로 완성되었고, 생명은 유기적 작용이기에 생명 활동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연합이며, 그때부터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의 전이들에 의해서 한 유기체의 세포들 사이의 관계들로부터 사회 속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들에로 이행한다.”(136p)라고 베르그손이 말한 것처럼 생명에게 고립된 개인은 특이한 상황이며 이기주의 또한 생명에 어긋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상기 인용문장이 인정되면 의무에 관한 이론은 쓸모가 없는데 의무는 삶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라고 의견을 개진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리 존재했던 의무의 정당화는 지성의 눈으로 재구성한 것일 뿐입니다.
베르그손은 도덕과 종교도 생명의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이런 방식이 놀라웠습니다. 그의 이전에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개념들을 사회적으로 확대하고 윤리와 종교까지 펼쳐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에게는 왜 의무가 필연적일까요? 이와 함께 생명은 그것에 만족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열린 사회와 인류 일반에게로 나아가려고 할까요? 베르그손은 “집단으로 살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했던 도덕적 형체를 인간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연은 아마도 종을 위해 자연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한 것이다.”(137p)라고 말합니다. 당위적 차원도 아니고 이익의 관점도 아닌 생명의 차원에서 도덕과 종교를 얘기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살면서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고 생명의 본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와 우리의 모습을 보면 자연과 괴리되고 생명에 어긋난다는 느낌이 드네요.
필연적인 의무로는 닫힌 사회가 될 수 있기에 베르그손은 감동 자체인 영혼의 고양, 창조적 노력을 대변하는 특권적 개인들을 강조합니다. 의무는 훈육을 통해 주입할 수 있지만, 영혼의 고양은 신비성의 길을 통해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신비주의는 황홀경과 관련된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 높이 고양될 수 있다고 베르그손은 말하네요. 훈육을 통해서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신과 세계에 대한 각종 개념들과 이론들을 통해서도, 즉 지적인 차원에서도 그 세계를 뚫고 갈 수 없습니다. 도덕의 종교적 기초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베르그손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요. 아 계속 도덕에 관한 고정관념이 깨져 나갑니다.^^ 그렇게 철학과 종교 교리를 오래 공부하고 훈육을 받아 훌륭한 습관을 터득하더라도 고매한 영혼이 되지 못하는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체험, 인간의 삶을 다른 음조로 옮겨 놓을 수 있는 감동이 된 사랑, 사람들의 영혼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열게 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과학이 완전히 개화한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추론들이 일개의 경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본다. 어떤 것도 사실에는 저항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지성이 초기에 개인과 사회에 대해 위험스런 비탈 위에서 자신을 유지시켜야만 했다면, 그것은 단지 허울뿐인 확증들에 의해서, 사실들의 환영들에 의해서 그리할 수 있었다. 실제적인 경험이 없기에, 경험의 위조물을 불러일으켜야만 했다. 가상은, 만일 영상이 생생하고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곧바로 지각을 모방하여, 그것에 의해 행동을 방해하거나 변형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 진실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낸 귀결들 속으로 너무 멀리 가려는 순간에, 체계적으로 거짓된 경험이 지성 앞에 나타나 지성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57~158p)
제2장 정태적 종교에서 주로 나눴던 얘기는 미신, 우화적 기능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세계는 인간의 추론과 계획에 항상 어긋나며 작동하지요. 가장 훌륭한 추론들조차 예측 불가능한 경험 앞에서 무너지는데요. 물론 지성은 이를 보완하여 더 완벽성을 기하려고 하지만 개선된 이론과 관념은 또 새로운 경험 앞에서 오류가 됩니다. 상기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지성은 경험의 위조물을 불러일으켜서, 표상을 통해 유지되었고요.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있는 선입견, 관념, 이미지 등은 거의 경험의 위조물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숫자, 과학적인 원리와 법칙도 표상과 관련됩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질적인 면을 보는 부족에게는 이런 균질적인 수치와 어디서든 작동하는 법칙이야말로 미신처럼 여겨질 것이고요. 지성과 경험의 위조물과의 관계에 기반하여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하죠. “지성은 형성되자마자 미신에 의해 침범되었고, 본질적으로 지성적인 존재는 자연적으로 미신적이 된다는 것, 그리고 단지 지성적 존재들만이 미신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158p)
지성은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추동하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지성의 특성상 사회의 응집력을 파괴하며 위협할 수 있는데요. 발명에 중요한 개인적 창의력은 사회적 규율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도를 지나치는 순간 거짓된 경험이 지성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존속하려면 지성에게 하나의 평형추가 있어야 하며, 평형추가 본능 자체가 될 수 없다면, 본능의 잔재와 같은 효과가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성 자체를 매개로 하여 지적인 작업을 거역하는 데 성공할 ‘상상적 표상’이 우화적 기능입니다. 이것은 유령이나 신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술작품이나 허구적 인물이 우화적 기능을 할 수도 있고요. 지적인 작업을 멈추게 하는 거짓된 경험, 픽션, 이미지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지성의 힘이 크게 작동하니 우화적 기능을 하는 거짓된 경험도 그 이상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를 나눴는데요. 번외로 사이비 종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고도화된 사회가 되어도 끊임없이 사이비 종교가 등장하지요. 이런 종교에 대해 선악의 구도로 비판하기보다는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 나왔는지, 또한 이것의 힘은 무엇인지 통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 대해 다들 잘 이해되지 않았고 어려웠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화두로 삼으며 계속 밀고 나가보아요.^^ 생명의 차원에서 종교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궁금하고, 앞으로 읽게 될 정태적 종교 나머지 부분과 동태적 종교의 논의가 무척 기대됩니다.
베르그손이 설명하는 지성과 본능의 작동 방식은 정말 놀랍고 흥미로워요! 한 쪽이 너무 내달린다 싶으면 다른 한 쪽이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려고 하면 더 멀리 나아가라고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이번 부분은 특히 <창조적 진화> 2편 같은 느낌이어서, 앞으로 생명의 차원에서 도덕과 종교를 어떻게 풀어낼지 더 궁금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