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를 몰고오며 휘리릭 지나가고 있긴 하지만, 하늘 색깔만큼은 속 시원한 가을입니다!
이제는 해가 늦어져 에세를 낭송하고 있노라면 점점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연휴 기간 두 번을 쉬고 보니, 그 길었던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도 끝이 났고 다시 짧은 장들이 등장했습니다.
키득거리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며 함께 읽은 많은 멋진 문장들 중에서 저는 왠지
15장 '우리 욕망은 난관을 만나면 커진다'라는 챕터의 통찰이 흥미로웠습니다.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원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 장애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결핍되었다는 인식이 욕망을 키운다는 것.
분석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고 증명도 아니지만,
경험과 경구를 엮으며 도덕을 넘어 인간의 마음장을 거닐어보는 글쓰기가 재밌으면서도 묵직했습니다.
“무엇을 잃어서 겪는 고통이나,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겪는 고통이나 고통은 똑같다.”(세네카)
"허용된 것은 매력이 없다. 금지가 욕망을 불붙게 한다."(오비디우스)
"다나에가 청동 탑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결코 주피터의 자식을 낳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오비디우스)
"도둑은 자물쇠에 끌린다."(세네카)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무시하고, 달아나는 것을 잡으려 애쓴다."(호라티우스)
이런 경구들을 모으며 눈이 빛났을 몽테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잠자며 깨어 있고, 깨어서 자고 있다. 나는 잠 속에서 그리 선명하게 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도 결코, 깨어 있음을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깊은 잠은 때로 꿈까지 재우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깨어 있는 상태는 우리의 꿈, 뜬눈으로 꾸는 꿈이요, 꿈보다 더 나쁜 꿈인 그 꿈들을 깨끗이 치우고 흩어 버릴 만큼 그렇게 각성되는 법이 결코 없다.
우리의 이성과 영혼은, 왜 잠들었을 때 생겨나는 생각과 견해를 받아들이고, 낮에 행하는 행동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 꿈의 행동들을 인정해서 권위를 부여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또 다른 꿈꾸기가 아닌지 우리의 깨어 있음이 일종의 잠이 아닌지는 왜 의심하지 않는가?(446쪽)
여기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
어떤 것에는 양분이 되는 것이 다른 것에는 맹독이 된다.
흔히 뱀은 인간의 침이 묻으면
기운을 잃고 제 살을 물어 뜯는다.
_루크레티우스
침의 성질을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를 기준으로 삼을까, 아니면 뱀을 기준으로 삼을가? 둘 중 어느 것으로 우리가 찾는 침의 진실한 본질을 확인할까? 플리니우스가 말하기를, 인도에는 우리에게 독이 되는 바닷고기들이 있는데, 우리 또한 그것들에게 독이 되어서 우리가 건드리기만 해도 죽는다고 한다. 어느 쪽이 진짜 독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그 물고기인가? 어느 쪽이 독이 된다고 생각해야 할까? 물고기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물ㄹ고기가? 공기의 어떤 성질은 인간에겐 해로운데 황소에게는 전혀 해롭지 않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유독한 성질인가?(447쪽)
동물들의 눈 색깔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틀림없이 물체의 모습을 각각 제 눈 색깔로 볼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 작용을 판단하려면 우리는 우선 짐승들과 일치해야 할 것이요, 그런 다음 우리끼리 일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 사람이 저 사람과 다르게 듣고 보고 맛보는 것을 가지고 매번 입씨름을 벌이며, 다른 것들에 대해 논쟁하는 만큼이나 감각들이 우리에게 보고하는 영상의 상이함 때문에 논쟁한다. 어린아이는 당연히 서른 살짜리와 다르게, 서른 살짜리는 육십 대 노인들과 다르게 듣고 보고 맛본다. 어떤 사람에겐 감각이 보다 모호하며 흐릿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더 열려 있고 날카롭다. 우리는 사물들을 다르게, 우리 자신에 따라, 우리에게 그럼직해 보이는 데 따라 다르게 본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럼직한 것은 너무도 불확실하고 논박 가능한 것이어서, 눈이 희게 보인다고 고백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진실로 백색인지 증명하려면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대도 더 이상 놀라울 것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기초가 흔들려 버리니 세상의 모든 지식이 필연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449~450쪽)
그런데 우리 상태가 사물들을 제게 맞춰 제 식으로 변화시키니, 우리는 어느 것이 사물의 진정한 상태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무엇이건 우리 감각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컴퍼스, 각도기, 자가 바르지 못하면 그것들로 측정한 모든 비율, 그것들로 재서 세운 모든 건축 또한 불충분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감각의 불확실성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든다.(452쪽)
결국 우리의 존재에도, 사물들의 존재에도, 항존하는 실체란 없다. 우리도, 우리의 판단도, 그리고 모든 필멸의 자와 판단받는 것이 끊임없이 흐르고 굴러간다. 이렇게 판단하는 자와 판단받는 것이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와 다른 것 사이에 확실한 무엇이 수립될 수 없는 것이다.(454쪽)
에피카르모스는 전에 돈을 빌린 사람은 지금 그 빚을 지고 있지 않고, 전날 밤 아침을 먹으러 오라고 초대받은 사람은 이젠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죽게끔 되어 있는 실체는 두 번 다시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없는데, 빠르고도 가벼운 변화에 의해 어떤 때는 흩어지고 어떤 때는 모이기 때문에 왔다가는 곧 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태어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존재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태어나는 것을 완수하지도, 멈추지도 않으면서 그런 상태로 끝에 이른다. 그렇게 종자 때부터 항상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하고 탈바꿈하며 간다. 인간의 정자로부터 우선 어머니의 배 속에 형태 없는 열매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엔 형태 잡힌 아이가 만들어지고, 다음엔 배 밖으로 나와 젖먹이가 되고, 다음엔 소년이 되고, 이어 청년이 되고, 이어 성년, 이어 장년, 마지막엔 늙어 빠진 노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이, 그리고 이어지는 생성은 언제나 먼저 것을 해체하고 파괴한다.(456쪽)
실로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어느 것에서든, 한 상태에 필히 다른 상태가 이어진다.
저 자신과 닮은 채로 존속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바꾸니,
자연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변하도록 강요한다.
_루크레티우스
그런데 우리만이 어리석게도 한 종류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벌써 수많은 다른 죽음을 거쳐 왔고, 거쳐 가는 마당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던 것처럼 불의 죽음은 공기의 탄생이요, 공기의 죽음은 물의 탄생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명백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노년이 닥치면 장년은 죽어 사라지고, 장년의 개화에서 청년기는 끝나고, 소년기는 청년기에서, 유년기는 소년기에서 죽으며, 어제는 오늘에서 죽고, 오늘은 내일에서 죽을 것이다. 늘 그대로 머물러, 항상 여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456쪽)
그런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영원히 있는 것, 다시 말해 출생한 일도 없고 결코 끝도 없는 것, 시간이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시간이란 움직이는 사물이기에, 결코 안정되어 영속적으로 머무는 법 없이, 항상 흐르고 유동하는 질료와 더불어, 마치 그 그림자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전’과 ‘후’, ‘있었던’ ‘있을’ 등, 즉각 그것이 있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들이 따라붙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이미 존재하기를 그친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명백한 거짓일 테니까. 그리고 ‘현재’, ‘순간’, ‘지금’ 같은 단어들로 말하자면, 주로 그 낱말들 덕분에 우리가 시간에 대한 인식을 세우고 지탱하는 것 같다. 이성은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당장 부숴 버리기 때문이다. 이성은 즉시 시간을 쪼개어 미래와 과거로 나눈다. 필시 그것을 둘로 나눠 놓고 봐야겠다는 듯이 말이다. 자연을 측정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 측정되는 자연에게도 일어난다. 자연에도 머무르는 것, 지속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도 모든 것이 태어났거나, 내어나는 중이거나, 죽어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존재인 하느님에 대해서 ‘계셨다’거나 ‘계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일 것이다. 그런 말들은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의 변화, 과정, 변천 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458쪽)
13장 타인의 죽음을 판단하기
내 생각엔 소크라테스의 생애 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명령을 곱씹어 볼 시간이 꼬박 삼십 일이나 주어졌지만, 그가 그 생각의 무게 때문에 긴장하거나 격앙되기보다는 오히려 가라앉고 초연한 언행으로 동요나 번민 없이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죽음을 감내했다는 것보다 더 눈부신 일은 없다.(466쪽)
14장 우리 정신은 얼마나 스스로를 방해하는가
똑같은 무게의 두 욕망 사이에서 완전히 평형을 이룬 정신을 생각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상상이다. 한편으로 기울거나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가치의 불균등을 전제로 하는 만큼, 결코 어느 편도 취하지 못하리라는 게 확실하니 말이다. 마시고 싶은 욕구와 먹고 싶은 욕구가 똑같을 때 우리를 술병과 햄 사이에 놓아둔다면 분명 갈증과 굶주림으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책이 없을 것이다.
다를 것 없는 두 가지 사물 중 하나를 우리 마음이 골라잡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두 똑같아서 선호할 만한 거리가 없는 수많은 금화 중에서 어느 하나를 취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이 물었을 때, 이런 난처함에 대비하기 위해 스토아주의자들은 마음의 그런 움직임은 상궤를 벗어난 비정상적인 것으로, 돌발적이며 우연한 외부의 충동 때문에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아무리 경미할망정 어떤 차이가 있지 않다면 무엇이건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고,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하더라도 시각이건 촉각이건 항상 우리를 더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어디나 다 똑같이 질긴 노끈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중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서부터 끊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전체가 한꺼번에 끊어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용적보다 그 안에 담긴 부피가 더 크고, 중심이 원주만큼 크다고 견고한 증명을 통해 결론짓고, 무한히 접근하는 두 선이 결코 만날 수 없음을 발견한 기하학의 명제들, 이론과 경험이 너무도 상치하는 ‘현자의 돌’이나 원의 정방형 면적 문제 등까지 더하면, 아마도 거기서 플리니우스의 저 대담한 말을 옹호할 논거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 “불확실성 이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보다 더 가련하고 오만한 것도 없다.”(470쪽)
15장 우리 욕망은 난관을 만나면 더 커진다
“무엇을 잃어서 겪는 고통이나,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겪는 고통이나 고통은 똑같다.”(세네카)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면 삶을 진정으로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 보배에 안심할 수 없고 빼앗길까 두려워할수록 더욱 그것에 애착을 느끼며, 더 단단히 움켜쥐고 끌어안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추우면 불기운이 더 잘 느껴지듯, 우리의 의지도 반대에 부딪히면 더 날카로워지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다나에가 청동 탑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결코 주피터의 자식을 낳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_오비디우스
또 안일함에서 오는 포만감만큼 저절로 우리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 없고, 희귀하거나 곤란한 것처럼 우리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다. “무슨 일에서나, 그 일을 멀리하게 해야 마땅할 바로 그 위험 때문에 쾌락은 더 커진다.”(세네카)(472~473쪽)
장애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474쪽)
뭔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내맡기는 것은 그것을 경멸하게 만드는 일이다. 결핍과 풍요는 결국 똑같은 골칫거리가 된다.(475쪽)
16장 영광에 관하여
세상에는 이름과 사물이 있다. 이름, 그것은 사물을 가리키고 의미하는 소리이다. 이름, 그것은 사물의 일부도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첨부된 별개의 조각이요, 사물 밖에 있는 것이다.(482쪽)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용감한 행위가 유리한 목격자가 나타나기 전에 증인 없이 묻힐 것이다. 연단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항상 돌파구의 최정상, 대대의 선두, 장군의 시야 안에 있을 수는 없다. 울타리와 구덩이 사이에서 기습을 당한다. 닭장처럼 허술한 요새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 헛간에서 네 명의 허접스러운 소총수를 끌어내야 한다. 필요한 순간에 혼자 부대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주의해서 보면 경험으로 알게 되리라. 가장 덜 눈부신 경우가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시대에 겪은 전쟁에서는 사람들이 훌륭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전투에서, 위엄 있고 명예로운 장소보다 어떤 허술한 요새의 접전에서 더 많이 죽었다는 것을.(489쪽)
자기 의무로 여겨 전쟁에 나가고, 숨겨진 일일지라도 모든 훌륭한 행위에 따르기 마련인 보상, 덕스러운 생각만 해도 반드시 얻게 되는 보상을 기대하며 임해야 한다. 반듯한 양심이 선행 자체에서 얻는 내적인 만족감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기 마음을 운수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리에 둔다는 장점을 위해 용감해야 한다.
덕은 부끄러운 실패를 모른다
그것은 오점 없는 광채로 빛난다.
그것은 속인들의 변덕에 따라
집정관의 채를 들었다 놓았다 하지 않는다
_호라티우스
우리 영혼이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은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혼은 우리 자신의 눈 이외에 어떤 눈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내부, 우리 안에서 제 역할을 한다. 거기서 영혼은 죽음, 고통, 나아가 수치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거기서 자식들의 죽음, 친구와 재산의 상실 앞에서도 굳세게 견딜 힘을 주고, 기회가 되면 전쟁의 모험으로도 이끈다. “어떤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덕 자체의 명예를 위하여.”(키케로)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내리는 호의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 명예나 영광보다 이 이득이 훨씬 위대하고 훨씬 바람직한 것이다.(490~491쪽)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근심하는 만큼 남에게 어떤 자로 보이는가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빌려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것으로 부자이고 싶다. 남들은 외적인 사건들과 겉모습만 본다. 누구나 속으로는 열이 치밀고 공포로 가득하면서도 밖으로는 좋은 낯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내 마음을 보지 못한다. 내 태도만 볼 뿐이다. 사람들이 전쟁 중에 드러나는 위선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에서 몸을 빼면서, 마음속은 물러 터진 주제에 사납고 지독한 놈인 척하는 것이 약삭빠른 인간에겐 얼마나 쉬운 일인가?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을 남모르게 피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어떤 위험한 경지에 발을 들여놓기에 앞서 천 번이라도 세상을 속일 수 있다. 또 위험에 걸려들었더라도, 속으로는 두려운 마음에 덜덜 떨면서도 즉석에서 평온한 얼굴과 자신 있는 말투를 꾸며 우리의 속마음을 얼마든지 감출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손가락에 끼고 있다가 손바닥 쪽으로 돌리면 낀 사람을 안 보이게 해 준다는 플라톤의 반지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나서야 할 곳에서 흔히 몸을 숨기고, 부득이 자신만만한 척하고 있지만 실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낭패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94쪽)
덕행은 그것의 고유한 가치 이외에 다른 보상을 바라기엔, 특히 허망한 인간적 평가에서 보상을 추구하기엔 그 자체로서 너무나 고귀한 것이다.(500쪽)
17장 오만에 관하여
내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벌써 뭔지 모르게 허황되고 어리석은 자만심을 드러내는 태도와 몸짓이 있다고 사람들이 지적했던 것이 생각난다. 우선 나는 스스로 느끼고 인식할 수 없을 만큼 체화된 고유한 특징과 성향이 있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동의하지 않는 그런 천성적인 성향의 주름을 간직하고 있다.(506쪽)
오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과 남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로 말하자면 나의 경우,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불공정하고 성가시기까지 해서 불쾌한, 어떤 정신적 결함의 압박을 내가 느낀다는 것을 말이다. 고치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뿌리째 뽑는 것, 그것은 못한다. 그 결함이란 내가 가진 것은 내가 가진 것이라서 평가절하하고, 생소하고 내게 없고 내 것이 아닐수록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분은 아주 멀리까지 확대된다. 자기의 처자식에 대한 특권의식 때문에 남편들이 아내를 못되게 경멸하고, 많은 아비들이 자식들을 부당하게 무시하듯이, 나도 그렇다. 비슷한 두 성과가 있으면 나는 항상 내 것보다 남의 것을 더 쳐줄 것이다. 더 나아지고 개선되고 싶은 욕심이 내 판단을 흩뜨려서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게 해서가 아니라,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그것을 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체제나 풍습은 나를 경탄하게 한다. 언어들도 그렇다. 아이들이나 속인들에게 그렇듯이, 라틴어는 그 권위 때문에 실제 가치 이상으로 나를 홀린다. 내 이웃의 살림살이, 집, 말은 내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내 것이 아니라서 내 것보다 나은 것 같다. 내가 집안일을 도통 모르니 더 그렇다. 나는 할 줄 아는 것, 할 수 있다고 장담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데, 내게는 내가 가진 재원의 정리된 목록이 없다. 쓰고 난 뒤에야 그것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도 의심한다. 그래서 어쩌다 어떤 일을 잘 처리하게 되면 내 능력보다는 운이 좋았던 탓으로 돌린다. 무슨 일이든 우발적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하니 더욱 그렇다.(508쪽)
내가 보기에는 어느 누구도 나만큼 자기를 낮게 평가하기란, 더욱이 나를 나만큼 낮게 평가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가 평범한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내가 나 자신을 평범한 부류로 여긴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나는 가장 천하고 속된 결함을 가진 죄는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변명한 죄는 없으며,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내게 오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요, 내 기질 탓에 내 안에 스며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일 뿐, 내 판단 앞에 출두할 만한 실체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물을 맞은 것이지 거기에 물든 것은 아니다. 사실 정신이 만들어낸 것들로 말하자면, 어떤 식의 것이든 내게서 나온 것이 전적으로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내 취향은 비위 맞추기 힘들게 까다롭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부인한다. 내가 유약해서 어디서나 떠 있고 휘어진다고 느낀다. 내 판단을 만족시킬 만한 점이 내겐 하나도 없다. 충분히 명확하고 정확한 안목을 갖고 있지만, 막상 그것을 써먹으려면 혼란에 빠진다. 특히 시에서 역력히 그것을 경험한다. 나는 시를 아주 좋아한다. 남의 작품은 꽤 잘 알아본다. 그러나 내가 손을 대 보려 하면 사실 어린애 장난감이 되어 버려 내가 쓴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데서는 얼마든지 어리석은 소리를 할 수 있어도, 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신도 인간도
시를 써 붙이는 기둥도
시인에겐 졸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_호라티우스
우리의 출판사마다 건물 전면에 이 문구가 있어, 그 많은 운문 제작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형편없는 시인만큼
자신감 넘치는 자도 없다.
_마르시알리스(509~510쪽)
내게 필요했던 것은 만족하는 능력뿐이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 능력은 어떤 조건에서건 유지하기 힘든 마음의 규범으로, 일반적으로 풍요로움보다는 결핍 상황에서 더 쉽게 발견되는 능력이다. 아마도 우리의 다른 정념들이 진행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재물에 대한 욕심은, 재물의 결핍보다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더 맹렬해지고, 절제의 미덕은 인내의 미덕보다 더 희귀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고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오직 하느님께서 너그러이 내 손에 쥐여 주신 재물을 고요히 즐기는 것뿐이었다.(523쪽)
항상 전부 말할 필요는 없다. 그건 바보짓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생각 그대로여야 한다. 아니면 악한 의도를 지닌 말이다.(531쪽)
진실에 불성실한 자는 거짓에도 불성실하다.(532쪽)
내가 고백한 이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은 내게 흉이 될 다른 일들까지 상상하리라. 하지만 나를 어떻게 알려 주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게 해 주기만 한다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이다. 나아가 이토록 비속하고 하찮은 일들을 감히 글로 쓴다는 것을 민망해하지도 않는다. 소재 자체가 비속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원한다면 내 의도는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전개하는 방식을 나무랄 수는 없다. 아무튼 남이 지적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무게도 가치도 없고 내 계획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내 판단력이 편자 빠진 말처럼 비틀대지만 않으면 그만이니, 이 글들은 그것의 시험(essais)일 따름이다.(539쪽)
하지만 생각을 아주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 반대 견해에도 같은 약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찬동하는 습성 자체가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인다.”(키케로) 특히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선동과 논쟁이 만발할 소지가 많다.
그러므로 양쪽 접시에 똑같은 무게가 실려 있으면,
저울은 어느 쪽으로나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다.
_티불루스(542쪽)
내가 우리 상황에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안정성이요, 우리 법률이 우리의 의복만큼이나 그 어떤 확정된 모양새를 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떤 정체의 불완전성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모두 불완전함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낡은 관습을 경멸하도록 민중을 선동하는 것은 쉽다. 그것을 시도해서 끝장을 내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파괴해 버린 것의 자리에 더 나은 질서를 수립하는 것, 그것을 시도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지쳐 낙담에 빠지고 말았다.(544쪽)
누군들 자기에게 판단력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그 자체 안에 모순을 품고 있는 명제일 것이다. 그것은 병증이 드러나는 곳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병이다.
이 병은 매우 끈질기고 강력하다. 그러나 태양의 시선이 불투명한 안개를 꿰뚫어 흩뜨리듯이, 병자의 시선이 일단 그것을 직시하면 흩어 버릴 수 있는 병이다. 이 문제에서는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 자기를 용서하는 일이 될 것이요, 자기를 단죄하는 것이 자기를 사면하는 일일 것이다. 일꾼이나 어리석은 여자조차 자기에게도 지각이 있을 만큼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남이 자기보다 더 용감하고, 더 체력이 강하고 경험이 더 많고, 더 잘생겼다고 쉽게 인정한다. 하지만 판단력이 우월하다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단순한 상식에서 나온 남의 논리는 그쪽을 쳐다보기만 했으면 찾아냈을 것같이 여긴다. 남의 작품에서 보는 학식, 문체, 여타의 장점들이 우리 것을 능가하면 우리는 쉽게 인정한다. 그러나 순전히 판단력의 산물인 것들에 대해서는 저마다 자기도 똑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필적할 수 없을 만큼 극도의 격차가 있어 간신히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무게와 난이성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 이 글은 영광이나 칭송을 바라기 어려운 일종의 수련이요, 이름을 낼 만한 것이 못 되는 일종의 시작(試作)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이 그것의 은총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게 나누어 준 것은 분별력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받은 몫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너머를 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 시야 이상을 보는 것일 게다. 나는 내가 올바르고 건전한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들 자기 견해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올바르고 건전한 견해를 가졌다는 가장 좋은 증거 중 하나는 내가 나 자신을 대단찮게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내 생각이 아주 확고하지 않았더라면 내 견해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기울이는 유별난 애착에 쉽사리 넘어갔을 것이다. 나는 거의 온 관심을 나 자신에게만 돌리고 그 외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다른 이들이 수없이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자기 명예, 자기 권세에 나눠 주는 애정을, 나는 오로지 내 정신의 평안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바친다. 나 말고 다른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 사유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잘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내 학문이기에.
_루크레티우스
그런데 내 견해, 그것들은 내 부족함을 규탄하는 데 한없이 과감하고 집요한 것 같다. 사실 그것 역시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내 판단력을 단련하는 목표이긴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바라본다. 나, 나는 내 눈을 내 안으로 돌려, 거기에 시선을 못박고 거기에 전념하게 한다. 나는 나 자신만을 상대하며,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고, 나를 점검하며, 나를 음미한다. 스스로 잘 생각해 보면 알 터인데, 다른 자들은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546~5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