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가을비가 옵니다!
연구실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4학기 세미나들과 이런저런 글쓰기가 겹쳐서 열기가 뿜뿜합니다!
<에세> 2권도 어느새 끝이 보이는데요.
몽테뉴는 짧은 호흡의 글들로 다채롭고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이번 주에는 몽테뉴 자신의 글쓰기-시도가 자신을 만들었다며, 자기자신을 위해서만 쓴다는 일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에세>는 정말 솔직한 문장들로 넘치지만,
역자가 달아놓은 주석을 보면 국가나 교회의 압력을 의식하여 돌려쓰거나 삭제한 구절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18장의 이런 구절들이 재미있습니다.
"
나는 내 몽상들에 귀를 기울인다. 예법과 도리 때문에 내놓고 비난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보고 부아가 치밀 때, 얼마나 여러 번 여기에다 그것을 쏟아 놓았던가!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심사도 없지 않았다!"
특히 27장에서는 비겁함과 약함이 끊임없이 잔인한 복수와 살생을 만들어낸다는 기막힌 분석을 해내는데요.
가슴 답답해지는 전쟁의 소식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럼 이번 주의 필사들을 보실까요.
18장 거짓말하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아무도 내 책을 읽어 주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많은 한가한 시간을 이렇게 유익하고 즐거운 사색에 바친 것이 시간 낭비인가? 나 자신을 본떠 이 모습으로 주조하면서, 나를 뽑아 내기 위해 너무도 자주 나를 손보고 다듬어야 했기 때문에 나라는 원본이 확고해졌고, 어떤 점에서는 만들어졌다. 타인을 위해 나를 그리다 보니, 내가 원래 갖고 있던 색깔보다 더 선명한 색깔로 나를 채색했다. 내가 책을 만든 만큼 책이 나를 만들었다. 이 책은 작가와 동질동체다. 오직 내게만 전념하는 내 삶의 일부이다. 다른 책들처럼 제삼의 외적 관심과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그처럼 끊임없디, 그처럼 세심하게 나 자신을 알아 간 것이 시간 낭비였을까? 그저 생각과 말로만 잠깐 지나치듯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연구, 자기 작품, 자기 직업으로 삼아 온 정성, 온 힘을 기울여 꾸준히 기록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만큼 그렇게 깊이 자기를 검토하고 통찰할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가장 감미로운 쾌감은 당연히 속으로만 음미된다. 그것들은 흔적을 남기기를 피하며, 여러 사람뿐 아니라 단 한사람의 눈에 띄는 것도 꺼린다.
얼마나 여러 번 이 일이 나를 성가신 생각에서 돌이키게 해 주었는가? 하찮은 생각은 모두 성가신 생각으로 쳐야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홀로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부는 사회에 빚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빚지고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를 자주 사유로 초대한다. 꿈같은 생각이라도 어떤 질서와 계획에 따라 하도록 내 공상을 정돈하고, 바람 부는 대로 길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것을 막아 보려면, 그 공상에 떠오르는 수많은 자잘한 생각에 구체화해서 기록해 두기만 하면 된다.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몽상들에 귀를 기울인다. 예법과 도리 때문에 내놓고 비난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보고 부아가 치밀 때, 얼마나 여러 번 여기에다 그것을 쏟아 놓았던가!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심사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과연 시의 회초리 자국은,
눈깔에 딱, 주둥이에 딱!
저 원숭이 같은 놈의 등짝에 딱!
_마로(558~560쪽)
오늘날 우리의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남이 잘 믿어주는 것을 의미한다.(560쪽)
이 점에 대해, 나는 우리가 가장 많이 오염되어 있는 결함을 가장 열렬히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비난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흥분하는 것으로 우리는 과오의 짐을 얼마간 벗는 것 같다. 실제로는 그 결함을 갖고 있을망정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을 단죄하니까.(561쪽)
19장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여러 파당들로 하여금 자기네 견해를 펼치도록 고삐를 풀어주는 것, 일면 그것은 분열을 퍼뜨리고 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열의 진행을 누르거나 막기 위해 어떤 법적 방책이나 제재도 강구하지 않으니, 그것은 분열을 증폭시키는 데 손을 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파당들에게 자기들 견해를 개진하도록 고삐를 풀어 주는 것은 안일함과 용이함을 통해 그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느슨하게 만드는 일이요, 희귀성, 새로움, 역경 때문에 더욱 예리해지는 침을 무디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570쪽)
20장 우리는 순수한 어떤 것도 맛볼 수 없다
나 자신을 세심하게 성찰해 보면, 나는 내가 지닌 최상의 선마저 악에 물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플라톤도 그가 보여 준 엄격한 도덕(나로 말하자면 그의 덕과 그런 유의 덕목들을 누구 못지않게 진실로 변함없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지만)에서, 그가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는 사실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는데), 인간적인 것이 혼합된 뭔가 삐뚤어진 것, 하지만 그 자신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렴풋한 색조를 간파하지 않았을까 두렵다. 인간은 어떤 일에서나, 어디서나 얼룩덜룩한 존재, 짜깁기된 존재일 뿐이다.
정의의 법률들조차 얼마간 불의가 섞이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플라톤은 <법률>에서 불편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자들은 히드라의 대가리를 자르려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본보기로 내리는 모든 처벌은 개개인에게는 얼마간 불공정하나, 공공의 이익으로 보상된다.”라고 타키투스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나 공공 업무에서도 우리 정신의 순수성과 예리함에 지나침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날카로운 명징성은 지나치게 치밀하고 정확할 수 있다. 사례와 실제에 적응하도록 그것을 둔하고 무디게 만들고, 지상에서의 이 난해한 삶에 어울리게 탁하고 흐릿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평범하고, 덜 팽팽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는 데 더 적절하고 유리하다. 고상하고 세련된 철학의 견해들은 실생활에 부적합하다. 뾰족하고 욱하는 마음이나 조금하고 재빠른 달변은 우리의 교섭을 방해한다. 인간사는 좀 거칠게, 건성으로 다루어서 많은 부분을 운수 소관으로 남겨 둬야 한다. 일들을 너무 깊이 까다롭게 살필 필요가 없다. 상반되는 국면과 다양한 형태를 다 고려하다가는 길을 잃고 만다. “상반되는 동기들을 너무 저울질한 나머지, 그들의 정신은 마비되고 말았다.”(티투스 리비우스)(575쪽)
23장 나쁜 수단을 좋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요즘 우리 사이에 만연해 있는 흥분된 감정이 이웃 나라와의 전쟁으로 방향을 틀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 식의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간, 우리 몸뚱어리를 지배하는 이 지독한 체액들을 다른 곳으로 배출해 버리지 않으면 우리 열이 계속 펄펄 끓게 만들어 결국 우리를 완전히 파괴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외국과의 전쟁은 내란보다는 훨씬 견딜 만한 불행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편하자고 남을 공격해서 싸우겠다는, 그토록 정의롭지 못한 계획을 하느님께서 도우실 리 없다고 생각한다.(588쪽)
25장 병자를 흉내내지 말 것
우리는 이렇게 말하네. 나는 야심가가 아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야심가가 아니고선 살아갈 수 없다. 나는 낭비가가 아니다, 하지만 도시 생활에는 큰 돈이 든다. 내가 화를 잘 내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여태껏 견실한 생활 방식을 세우지 못한 것은 젊음 탓이다…….
우리 밖에서 우리네 병을 찾지 마세나. 병은 우리 안에, 우리 내장에 들어 있네. 게다가 우리가 병든 줄도 모른다는 것이 치료를 더욱 어렵게 하네. 일찌감치 자신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 그 많은 상처와 병증을 고치겠나? 하지만 우리에겐 철학이라는 아주 감미로운 치료약이 있지. 다른 약들로는 치료된 후에나 기쁨을 느끼지만, 이 약은 기쁨과 치료를 동시에 주니 말일세.(세네카)(589쪽)
27장 비겁함은 잔인의 어머니
적을 죽이는 것보다는 굴복시키는 것에, 죽이는 것보다는 창피를 주는 것에 더 큰 용감성과 멸시가 있다는 건 누구나 잘 안다. (...) 왜냐하면 복수는 자기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 주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짐승이나 돌멩이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고 그것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앙갚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피난처로 보내는 일이다.(602~603쪽)
우리 조상들은 모욕을 받으면 한 번에 한 번씩, 그렇게 차근차근 되갚아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적이 모욕을 당한 채 살아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용감했던 것이다. 우리는 적이 두 발로 서 있는 것을 보는 한 공포로 떤다. 그 증거로, 오늘날 우리의 못난 행태는 우리를 모욕한 자뿐 아니라 우리가 모욕한 자 또한 죽여 버릴 때까지 쫓지 않는가?(605쪽)
자기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것이 아닌 용기와 힘을 끌어들이는 이 같은 행동은 비열하고 부당한 일인 데다, 자기 운수를 남의 운수와 얽히게 하는 것은 자신감이 확고하고 당당한 사람에게는 도리어 불리하다고 본다.(605쪽)
무엇이 폭군들로 하여금 그토록 살생을 좋아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기 안전에 대한 염려이다. 그들의 비겁한 마음은 저를 공격할 수 있는 자들을 죄다 몰살해 버리는 것 이외에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킬 다른 방법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들까지 할퀼까 봐 두려워서,
모두 다 무서워서, 모두 다 후려친다.
_클로디아누스
최초의 잔인성은 잔인성 자체로 인해 실행된다. 거기서 정당한 보복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그 공포가 이어지는 일련의 새로운 잔혹 행위를 유발한다. 하나의 잔혹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잔혹 행위를 행하면서 말이다.(6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