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이 언급하고 있는 역동적 종교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태적 종교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태적 종교는 자연 현상을 신으로 여기지요. 예컨대 정령 신앙, 토테미즘도 자연에서 일어나는 비인격적인 힘에 대한 숭배 의식에서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정태적 종교는 자연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즉 인간을 의기소침하게 하고, 사회를 와해시키는 것에 대항하는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신이 개입하지 않고 있지요.
역동적 종교는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신비주의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집니다. ‘혹시 이것이 정태적 종교와 관련이 있는가’라는 생각도 살짝 듭니다. “종교 속에는 어느 정도 마법이 존속하고, 특히 마법 속에는 어느 정도 종교가 존속”하고 있다는 말처럼 마법 같은 정태적 종교에 인격성을 부여한 것이 역동적 종교인 듯 보입니다. 베르그손은 “완전한 신비주의는 행동이고, 창조이고, 사랑일지 모른다”고 언급하고 있지요. 그리스 신에서도 인도의 요가에서도 그리고 불교에서도 완전한 신비주의는 없다고 합니다.
완전한 신비주의는 결국 위대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주의이다. 잠깐 그들의 기독교를 제쳐두고, 그들에게 있어서 내용이 없는 형식만을 생각해보자. 그들 대부분은 고대 신비주의의 다양한 도달점들을 닮고 있는 상태들을 통과했다는 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를 단지 지나갔을 뿐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노력에 긴장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은 제방을 무너뜨렸다. 생명의 거대한 흐름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팽창한 생명력으로 에너지, 대담함, 비범함 착상과 실현의 능력이 자유롭게 되었다. 행위의 영역에서 성자 바울, 성녀 테레사, 성녀 카드린 드 시엔, 성자 프랑스아, 성녀 잔 다르크, 그리고 다른 많은 성자들이 수행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충분하고도 남을 행적들은 거의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다(332~333)
기독교가 완전한 신비주의라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주의는 또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탁월한 신비가들은 “행동하고자 하는 취향, 유연함과 결합된 확고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예견적 분별력, 복잡함을 이겨내는 단순성의 정신, 결국 탁월한 양식에 의해서 현시합니다.” 이러한 양식은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인간적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지요.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환상들, 그들의 황홀경들, 그들의 법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때론 비정상적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지적인 건강함에서 나온 것이지요.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인간적 의지에만 머물지 않고 신적인 의지와 일치하는 지점을 향해 가고자 합니다. 신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그리고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곳에 신적인 삶이 있는 것일까요?
성자 바울, 성녀 테레사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노력에 긴장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집중함으로써 제방을 무너뜨렸다고 하는데요, 이때 제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신적 의지와 일치하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닫힌 영혼에서 열린 영혼으로의 변양을 원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인간적 의지인 닫힌 영혼은 가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인류애를 배제하는 정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배타성에서 벗어나고자 했지요. 신적 의지인 인류애로 전환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거대한 흐름을 느꼈고 그것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생명력은 팽창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기독교에 감전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조이자 사랑입니다’라고 성자들이 말하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나 요가가 완전한 신비주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요. 물론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의견이 분분했지만요.
이번 주에 읽은 '역동적 종교'는 혼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네요... 토론에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창조적 진화>에서 지성과 본능이 어디에서 더 나아가고 어디에서 멈췄는지 세세하게 더듬어 본 것처럼, 이번 부분에서는 약동(신비적 약동/신비주의)이 어디에서 불충분했고 어디에서 도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책을 펼쳐보니, '정태적 종교가 "자연 속에 이미 예고된 것"이라면, 역동적 종교에서는 "자연 너머로의 도약"을 발견한다'는 문장도 눈에 들어오네요. 마저 읽고 더 얘기나눠보아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