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게 되네요!
'꾸준히'와 '함께'의 힘은 셉니다! 어느새 저희는 몽테뉴의 <에세>2권을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 그러기 위해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몽테뉴의 문장들은 철학의 기둥들 사이를 미끄러지면서 반짝이는 사유를 열어줍니다. 이런 문장들은 정말 빛이 나죠.
공부를 해야 한다면 우리 조건에 알맞은 공부를 하자. 그렇게 늙고 쇠약해진 마당에 그런 공부는 뭐 하러 하느냐는 물음에 “더 낫게, 더 내 뜻대로 떠나려고.”라고 대답했던 사람처럼 대답할 수 있도록.
배움에 대한 이런 감동적인 문장들 뒤로, 기형, 용기, 분노, 위인들과 의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나게 펼쳐집니다.
그러면서도 솔직함은 얼마나 와닿던지요.
큭큭거리게 하고 밑줄 긋게 하는 것. 이것이 몽테뉴와 함께 한 아침의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함께 읽고 함께 웃고 함께 감동할 샘들이 줌 화면 너머에 계셨던 덕에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이었지만요.
그럼 여기서 줄이고, 필사로 남겨진 문장들을 함께 보실까요!
28장 모든 일에는 제때가 있다
젊은이는 준비를 해야 하고, 늙은이는 누려야 한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천성에서 주목하는 가장 큰 악덕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사는 것을 새로 시작한다. 우리의 호기심과 욕망은 좀 늙음을 느끼기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았는데, 우리의 욕망과 계획은 늘 태어나기만 한다.
그대는 죽을 날이 다 됐건만 대리석만을 다듬으라며,
무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집들을 지으라 한다.
_호라티우스
내 계획은 가장 긴 것도 일년을 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끝낼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희망이나 계획은 모두 치워 버렸다. 나는 이제 남겨 두고 떠나려는 모든 곳에 작별을 고한다. 매일매일 내가 가진 것들과 이별한다.
“오래전부터 난 잃지도 따지도 않았다. 가야 할 길보다 비축금이 더 많이 남아 있다.”(세네카)
나는 다 살았다.
운명이 정해 준 그 길, 모두 답파하였다.
_베르길리우스(617~618쪽)
공부를 해야 한다면 우리 조건에 알맞은 공부를 하자. 그렇게 늙고 쇠약해진 마당에 그런 공부는 뭐 하러 하느냐는 물음에 “더 낫게, 더 내 뜻대로 떠나려고.”라고 대답했던 사람처럼 대답할 수 있도록.(619쪽)
그[소 카토]가 그 공부를 한 것은 자기 죽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중대한 결심을 하는 중에도 잠조차 거르지 않은 사람으로서, 상황에 맞춰 특별히 무엇을 고르거나 변경한 바 없이, 사는 동안 늘 하던 다른 활동들과 더불어 하던 공부를 계속했을 뿐이다.
집정관 선거에서 떨어진 날 밤을 그는 놀이로 보냈다. 죽을 작정이던 그 밤은 독서로 보냈다. 생명을 잃는 것이나 공직을 잃는 것이나 그에게는 똑같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던 것이다.(619쪽)
29장 용기에 관하여
전 생애에 걸친 끊임없는 성찰, 그것이 이런 기적을 만든다.
FATUM(숙명)에 관한 논쟁도 우리의 여러 다른 논쟁거리 가운데 섞여 든다. 그리고 미래의 일들과 우리의 의지까지 결정적이고 불가피한 필연성에 결부시키려고 우리는 여전히 해묵은 논리에 의지한다. “의당 그러시듯 하느님은 모든 일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므로, 모든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는 논리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 신학자들은 이렇게 응답한다. “우리가, 또 하느님도 마찬가지로(하느님에겐 모든 일이 현재이니 그분은 예견한다기보다는 보신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것이지, 우리가 보기 때문에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건은 그렇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다르게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예지 안에 들어 있는 일들의 원인 목록에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들, 또 당신이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긴 자유에 의한 ‘의지적 동기’들도 기록해 두셨으며, 우리가 과오를 저지르길 원함으로 인해서 과오를 저지를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신다.”(626쪽)
30 어느 기형아에 관하여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하느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분은 무한무변한 당신 작품에서 당신이 거기에 포함시킨 무한무량한 형태들을 보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 형상은 사람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일한 유(類)와 관련된 어떤 다른 형태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분의 완전한 예지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고, 보편적이며, 정상적인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조화와 관계를 볼 줄 모른다.
“자주 보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 원인을 모를 때도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본 적이 없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키케로)
우리는 관습에 위배되는 것을 자연에 위배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이건 자연에 따르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이성이, 처음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그릇된 생각과 정신적 동요를 우리에게서 멀리 쫓아 주기를.(633~634쪽)
31장 분노에 관하여
분노란 저 혼자 장구 치고 북 치며 부풀어 오르는 정념이다. 그릇된 이유로 흥분한 나머지, 누가 우리에게 정당하게 반박하거나 변명을 제시해도, 진실 자체에 대해, 그리고 엉뚱한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641쪽)
그래서 그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엄혹하게 자제해야 한다. 그런데 나로 말하자면, 감추고 참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정념을 알지 못한다. 나는 지혜의 값을 그렇게 높게 메기고 싶지 않다.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는가보다, 더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를 더 중시한다.(643쪽)
사람들은 분노를 감춤으로써 그것이 자기 몸 깊이 배어들게 한다. 선술집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데모스테네스를 보고 디오게네스가 “뒤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현명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자기 기분을 갑갑하게 가두기보다 차라리 약간 시의적절치 않더라도 하인의 뺨을 한 대 갈겨 주라고 나는 권한다. 나라면 괴로우면서도 억지로 내 기분을 누르고 있기보단 차라리 밖으로 표출하고 싶다. 정념은 밖으로 표출됨으로써 약화된다. 감정의 화살촉이 안을 향해 꺾이게 하기보다 밖으로 작용하게 하는 편이 낫다. “밖으로 드러나는 결함은 가장 가벼운 것들이다. 그것들이 건전한 척하는 외양 뒤에 섬어 있을 때 제일 위험하다.”(세네카)(641~642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가 때로는 용덕과 용기에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그럴듯한 말 같다. 그러나 그의 말을 반박하는 자들은 그것이 괴상한 용도의 무기라고 재미있게 응수한다. 다른 무기들은 우리가 움직이지만 이 무기는 우리를 움직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손이 그것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손을 조종한다. 그것이 우릴 쥐고 있지 우리가 그것을 쥐고 있을 수가 없다.(646쪽)
32장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변호
다른 데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기에 믿음직하다거나 믿음직하지 않다는 것을 가지고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남이 했다는 것조차 좀처럼 믿지 못하는 것은 큰 잘못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잘 빠진다.(보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연의 모범적 형태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시금석 삼아 다른 모든 형태를 연관시켜 본다. 그러고는 자기와 맞지 않는 행동은 위장이요, 가식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야만적인 우매함인가!
나로 말하자면, 어떤 인간들은 나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고대인들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건 솔직히 인정하지만, 눈으로는 끊임없이 그들을 좇으며 그들을 그토록 높이 들어 올리는 원동력, 내 안에서도 싹이 감지되는 그 힘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극도로 저열한 정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놀라거나 못 미더워하지 않는다. 나는 고대의 인물들이 스스로를 들어 올리기 위해 쓰는 방법들을 보고, 그들의 위대함에 경탄한다. 이 도약을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며 내 품에 얼싸안는다. 내 힘은 비록 거기에 이르지 못할망정 내 판단은 매우 기꺼이 그것에 동조한다.(653~654쪽)
하지만 수많은 국면을 지닌 일들을 한 가지 측면으로만 판단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플루타르코스가 그들을 비교할 때, 그들을 동등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보다 더 명료하게, 더 세심하게, 그들의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656쪽)
플루타르코스는 그들을 통째로 저울에 올리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누가 우월하다는 것은 없다. 그는 부분들과 상황들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견주어 보고 개별적으로 판단한다.(657쪽)
33장 스푸리나의 이야기
몸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격정이 감퇴하고 약화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욕망은 포만 상태에 이를 수 있고, 물리적인 치료법도 있기 때문이다.(658쪽)
야망, 탐욕 등처럼 온통 영혼에 속해 있는 정념들은 이성을 훨씬 더 애를 먹인다. 이 경우에 이성은 기댈 것이 이성 자체의 수단밖에 없고, 이 욕망들은 포만을 모를 뿐 아니라 즐길수록 더 격해지고 커지기까지 하기 때문이다.(659쪽)
사회 생활에서 한 사람을 빈틈없이 성실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평범한 의무들이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까다로운 규칙들을 피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리 엄혹한 짓을 한들, 내 생각으로는 멋들어지게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잘 살아가는 노고를 피하려고 죽는 것과 같다. 그런 자들은 다른 상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상, 그 상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역경 속에서, 자기 몫의 모든 책임에 응답하고 충족시키며, 밀어닥치는 세파 한가운데서도 꼿꼿이 처신하는 것을 능가하는 무엇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여성과의 관계를 딱 끊고 사는 것이 아내와 함께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보다 아마 더 쉬울 것이다. 꼭 알맞게 처신하는 것보다 아마 더 쉬울 것이다. 꼭 알맞게 절제하며 풍요 속에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때 더 근심 없는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쓰는 일이 아주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고달프다. 절제는 고통을 겪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덕목이다. 소(小)스키피오의 ‘잘사는 법’에는 수천 가지 방법이 있다. 디오게네스의 잘사는 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디오게네스의 방식은 순결성에서 평범한 삶을 능가하지만, 수천 가지 면에서 탁월하고 완벽한 삶은 유용성과 힘에서 디오게네스의 삶을 능가한다.(668~669쪽)
34장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병법에 관한 고찰
이런 인물들은 자기 운에 대해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신뢰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업(大業)은 숙고가 아니라 투신을 요한다고 말하곤 했다.(677쪽)
37장 자식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시작한 이래 칠팔 년 더 나이를 먹었다. 그동안 새롭게 얻은 것이 없지 않다. 세월의 후의로 나는 결석증과 사귀게 되었다. 세월과의 오랜 교류가 이런 결실도 없이 쉬이 흘러가진 않는다. 세월이 저와 오래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여러 선물 중에서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선물을 골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끔찍하게 여기던 것을 선물할 수는 없었으련만, 이건 노년에 겪는 언짢은 일 중에서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가 너무 멀리 가는구나, 이렇게 멀리 가다간 결국 불쾌한 일에 걸리고 말겠구나 수없이 생각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외과 의사들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잘라 낼 때 적용하는 법칙에 따라 ‘싱싱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생명을 잘라 내야 한다고, 자연은 제때에 생명을 반납하지 않는 자에게 호된 이자를 물게 하는 버릇이 있다고 나는 충분히 인식했고 또 주장했다. 그러나 헛된 제안이었다. 아직 그럴 준비가 한참 덜 된 십팔 개월쯤 전에, 나는 이런 불쾌한 상태에 놓이게 되어, 어느새 그것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어느새 이 결석증과 어울려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나를 위안할 거리도 찾고 희망도 찾는다. 인간이란 자기의 비참한 존재를 그다지도 애지중지하기에, 아무리 혹독한 조건인들 그 안에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받아들이지 못할 게 없다!(708~709쪽)
적어도 나는 내 결석증에서 한 가지 이득은 끌어낸다. 죽음과 화해하고 친해지기 위해 내가 아직 스스로는 하지 못했던 것을 그것이 해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압박하고 괴롭힐수록 죽음은 내게 덜 무서운 것이 될 테니까. 벌써 얻은 바도 있어서, 나는 이제 오직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711쪽)
그렇지만 나는 늘 의젓한 몸가짐과 경멸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고통을 참아 내라고 너무 준엄하고 엄격하게 명령하는 가르침은 지나치게 형식적이라고 봤다. 실체와 실재에만 관여하는 철학이 왜 그런 외양에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염려일랑 우리의 몸동작을 몹시도 중시하는 희극 배우나 수사학 선생에게 맡겨라. 심장이나 위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저 비겁한 목소리를 과감히 병 탓으로 돌리고, 그 제지할 수 없는 탄식을 자연이 우리의 통제력 밖에 심어 준 한숨, 흐느낌, 헐떡임, 창백해짐 따위의 부류로 치부하라.
마음에 공포가 없고, 말에 절망이 없으면, 철학은 그것으로 만족하라! 우리가 사고를 비틀어 짜지 않는 한, 팔을 비틀어 짠들 어떤가! 철학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살려고 배우는 것이지 ‘그런 체’하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다. 우리의 오성 계발을 소임으로 삼았으면 그것을 감독하는 데서 멈춰라. 결석증의 발작을 겪는 중에도 자기를 인식하고, 고통의 발아래 수치스럽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버텨 내며, 그 싸움으로 흥분하고 달아오를지언정 지쳐서 엎어지지 않고, 늘 해 오던 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교류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일상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게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면 된다. 그렇게 지독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더러 그렇게 점잔을 빼라고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잘 싸우고 있다면 험상궂은 표정이야 별것 아니다. 앓는 소리를 내서 몸이 덜 괴롭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 흥분해서 좋을 것 같으면 마음대로 자기를 뒤흔들고 들쑤시게 하라. 들입다 소리를 내지르니(여자들이 해산할 때 그게 도움이 된다고 어떤 의사들이 말하듯이) 고통이 좀 날아가는 듯하면, 또는 그것이 고통을 좀 잊게 한다면 힘껏 고함을 지르게 하라. 그런 소리를 내라고 명령하라는 게 아니라 나오면 나오게 허용하자.(711~713쪽)
겸손에는 오만에서 나온 좀 묘한 종류의 겸손도 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할 때, 그리고 자연의 작품들 중엔 우리로서는 지각할 수도 없고 그 방식이나 원인을 알아낼 능력도 없는 어떤 특질과 조건이 있다는 것을 매우 격식을 차려 고백할 때가 그렇다. 이런 정직하고도 양심적인 선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를 믿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적이나 수수께끼 같은 기이한 일들을 추려 내려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보기엔 우리가 매일 보는 일들 가운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기적의 불가사의를 능가하는 기이한 일들이 있다.
우리를 탄생시킨 이 정액 한 방울은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신체적 형태뿐 아니라 선조들의 사고방식이나 성향의 유적까지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 물방울은 어디에 이토록 무수히 많은 형태를 담아 두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물방울들은 어떻게 그처럼 아무렇게나, 그처럼 불규칙한 경로로 저 유사한 모습들을 운반해 증손자가 증조부를, 조카가 삼촌을 닮게 하는가?(715쪽)
솔론은 먹는 것을, 다른 약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픈 병의 약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끌어다 사용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며, 자연의 힘과 풍요를,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곤돌매기와 제비도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수시로 본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학문, 기술이 고안해 내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위해 우리는 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을 버렸고, 그런 일에 절제와 한계를 지킬 줄 모른다.(719~720쪽)
내가 아는 바로는, 의학이라는 법원의 관할 안에 있는 족속보다 더 빨리 아프고, 늦게 낫는 족속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건강 자체가 건강 요법의 억압에 의해 변질되고 상한다. 의사들은 병을 다스리는 데 그치지 않고 건강을 병든 것으로 만든다. 사람들이 어느 계절에도 자기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단속하려고 말이다. 그들은 완전하고 지속적인 건강에서 미래에 중병이 걸릴 근거를 끌어내지 않던가? 나는 상당히 자주 아팠는데, 의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앓고(거의 모든 종류의 병을 경험했다.) 훨씬 빨리 낫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병에다 의사들 처방의 쓰라림을 섞진 않았다! 건강, 나는 그것을 자유롭고 온전한 상태로 누린다. 내 습관과 즐거움을 좇는 것 말고는 규칙도 없고 별다른 훈련도 없이. 어디 머무르거나 내게는 다 좋다. 내겐 아플 때도 건강할 때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다른 편의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의사가 없다고, 약사가 없다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안달하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 자체보다 고쳐 줄 사람이 없는 것을 더 괴로워하는 것을 본다. 뭐라고! 의사들 자신이 행복하게 장수하는 것을 보여 줘 자기네 학문의 다소간 명백한 효력을 증명해 주던가?
의약 없이 여러 세기를, 특히 초기, 다시 말해 가장 살기 좋고 행복했던 초창기를 보내지 않은 나라는 없다. 이 세상의 10분의 1은 지금까지도 의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수한 나라들이 의약을 모르는데, 이곳에서보다 훨씬 건강하게 훨씬 오래 사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 중에도 평민들은 의약 없이 잘 살고 있다.(720~721쪽)
그냥 좀 놓아두자. 벼룩과 두더지를 돌보는 질서는 벼룩이나 두더지가 그 질서의 지배에 순응하듯 그런 참을성을 가진 인간도 돌본다. 짐수레꾼처럼 소리쳐 봐야 소용없다. 그래 봤자 목만 쉬지 앞으로 나가게 하진 못한다. 그것은 도도하고 비정한 질서이다. 우리의 공포, 우리의 절망은 그것을 짜증 나게 만들어 우리를 돕도록 초대하기는커녕 지체하게 만든다. 그 질서는 건강이 제 길을 가게 하듯 병도 제 길을 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의 권리를 침해해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따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더 이상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일 테니까. 순응하자, 결단코, 순응하자. 자연의 질서는 따르는 자들을 인도한다.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광분, 그들의 의약까지 한꺼번에 싸잡아 강제로 끌고 간다. 그대의 머릿속을 비워낼 설사약을 처방하라. 그대의 위장에 쓰는 것보다 나으리라.(722~723쪽)
의사들 중에서 나와 같은 성미를 가진 자, 자기를 위해서는 의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에게 처방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인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는 의사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아예 내놓고 농락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자기들의 생명과 건강이 우리 것보다 덜 귀하지 않을 테니, 자기 학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학설에 맞추어 살아갈 것 아닌가.
우리를 이렇게 눈멀게 만드는 것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공포, 아픈 것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 낫고 싶은 광적이고 과도한 욕망,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물러터져서 조종당하기 쉬운 것은 순전히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다수는 의학을 믿는다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의학에 대해 불평하며 우리처럼 말하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있나?”하면서 결정을 내린다. 여하간 안달이라도 하는 것이 참는 것보다 좀 나은 치료법이라는 듯이.
이처럼 가련한 예속 상태에 자기를 맡겨 버리는 자들 중에서 갖가지 사기에 넘어가지 않는 자가 하나라도 있는가? 낫게 해주겠다고 뻔뻔스레 장담하면 아무에게나 매달리지 않을 자가 있는가?(743~744쪽)
그리고 병이 치료되었다 해도 앓을 만큼 앓아서이거나, 우연의 결과이거나, 환자가 그날 먹거나 마시거나 만진 어떤 다른 것의 작용이거나, 환자의 할머니가 기도한 덕이 아닌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증거가 완벽했다 할지라도 그 행운과 우연의 다발, 그 기나긴 대열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에 하나의 규칙으로 결론짓는단 말인가?(747쪽)
이제 곧 사람들과의 교제를 포기해야 하는 때에 새로운 추천장으로 저들에게 나를 소개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일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재화는 전혀 값을 쳐 주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자이건, 종이가 안인 다른 데에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내 기술과 내 솜씨는 나 자신을 가치 있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내 공부는 행할 줄 알기 위한 것이지 글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모든 노력을 내 삶을 만드는 데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직업이요 내 업적입니다. 나는 그 무엇보다 책을 만드는 자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원했던 것은 현재의 편익을 얻기 위해서이지 모아 뒀다가 자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슨 장점을 지녔다면 그 장점을 자기 행동거지에서, 일상적인 언행에서, 사랑을 하거나 다툴 때, 놀음판, 잠자리, 식탁에서, 업무의 처리에서, 집안 살림에서 드러내 보일 일입니다. 추레한 반바지를 입고 좋은 책을 짓느라 애쓰고 있는 자들을 봅니다만, 그들이 내 말을 들었다면 우선 반바지부터 만들어 입었을 것입니다. 스파르타인들에게 훌륭한 군인보다 훌륭한 수사학자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십시오. 아니요, 만일 내게 밥을 지어주는 이가 없다면 나는 훌륭한 수사학자보다 차라리 훌륭한 요리사가 되겠습니다.(748~749쪽)
우리 의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들대로 훌륭하고, 위대하고 강력한 소견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 견해와 상반되는 견해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생각이 남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마음이 상하거나 나와 다른 노선, 다른 파당에 속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발길을 끊는 따위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반대로, 자연이 따랐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다양성이고, 특히 육신보다 정신에서 그러하므로(정신이 육신보다 더 유연해서 보다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기질이나 의향이 일치할 수 있는 경우란 훨씬 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 똑같은 두 견해가 있었던 적이 결코 없으니, 두 개의 털, 두 개의 낱알도 같은 법이 없는 것과 같다. 견해들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 그것은 ‘다양성’이다.(752~753쪽)
이제 마지막 권만을 남기고 있네요.
계묘년의 마지막까지 몽테뉴와 함께 아침을 빛내보아요!
11월 15일 수요일 아침 7시에 <에세> 3권과 함께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