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이 전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가정, 국가, 인류
며칠 전 미야자기 하야오 감독의 복귀작이자, 아마 정말 은퇴작이 될지도 모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심판 일색으로 도배된 토막 리뷰들, 저로서는 베르그손의 <두 원천>을 읽고 있었기 때문인지 ‘애국심’의 가면을 쓴 집단 이기주의로 다가오더군요. “주인공을 군수공장네 아들로 설정해 놓고..일본제국주의 역사의 상징인 제로센 전투기를 멋지다고 하질 않나..지들 잘못으로 일어난 도쿄대공습을 일반 화제로 퉁쳐버리고 끝내 평화타령만 하고 앉았네..지겹다. 저기요, 대체 왜 평화의 메시지를 왜 군수공장 아들내미가 하세요?” “감독 당신은 어떻게 살 건데?” 모두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아쉬운 것은 잘잘못을 따지는데 머물러서는 7년간이나 공들인 작품을, 그것도 노년의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을 어떤 메시지를 해석해볼 기회조차 놓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르그손이 <두 원천>을 써야겠다는 ‘결단’의 배경에도 아마 그 시대의 아우성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요.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는 과학적 지식의 발달과 함께 싹튼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희망으로 충만했었죠. 인간 지성에의 믿음이 낙관적 진보사관을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의 경험은 그런 인간의 이성, 지성주의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성은 과연 문명의 발달과 정비례해서 성숙하는가? 이게 베르그손의 <두 원천>의 베이스를 이루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복귀작 또한 나는 이 시대의 아우성에 대한 응답이라고 여겨졌어요.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베르그손은 “인류는 자신이 이룩한 진보들의 무게에 반은 짖눌려 신음하고 있다”(468쪽)면서 “인류는 계속 살기를 원하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때 ‘인류’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먼저 ‘나는 인류인가?’를 물어봅니다. 우리는 지구 인구를 인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일부 관객들에게 뭇매를 맞는 것도 ‘그대들’을 바로 나, 혹은 사회집단으로 환원하는 데서 생기는 잡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국가주의에 매몰된 각국 사람들을 다이렉트로 꽂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제게는 감독의 ‘그대들’은 베르그손에게 ‘인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은 ‘인류’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베르그손은 가족애와 조국애의 확장이 자연스레 인류애로 인도해줄 거라는 우리의 상식을 돌아보게 합니다. 즉 “우리의 공감이 계속된 진보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하여, 마침내 인류 전체를 포용하기에 이를”(42쪽)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애와 조국애는 “직접적”이지만, 인류애는 “간접적이고 획득된 것이고 우회를 통해서만 이르게 되”(43쪽)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같은 이기주의가 부분이며 이를 확대하면 인류애 같은 이타주의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르그손의 저작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성의 차이” 라는 말이었습니다. 가족애와 조국애 그리고 인류애 사이에는 바로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성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의무의 뿌리엔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 있다
<두 원천>을 읽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지점이 앞부분이었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베르그손은 기존의 철학에서 도덕을 말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었을 때와 같은 충격파를 맞는 것 같았습니다. 도덕률은 절대적 진리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필연성을 띤 것도 아닙니다. 막시류(개미나 벌)는 종의 보존을 위해 무리를 지어 제 역할을 수행하며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것은 본능입니다. 인간도 생물종으로서 그 보존을 위해 막시류와 같은 본능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 보존하기 위한 규율을 강제합니다. 인간의 경우 교육에 의해 그 규율을 습득시키지요. 베르그손은 의무와 도덕의 뿌리가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 있다고 규정합니다. 전통적 철학에서 도덕의 뿌리가 이성에 있다고 할 경우 (‘실천 이성’을 떠올려 주세요) 아는 만큼 행하게 된다는 ‘지행합일’ 같은 논의가 펼쳐지게 마련이죠. 이때 무지는 곧 악입니다.
도덕적 의무가 이렇듯 한 사회의 집단적 습관의 소산인 한 그것은 순수히 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본성상 무의식적인 본능적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베르그손은 그것을 ‘지성 이하의 것’이라 정의합니다. 지성 이하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습관으로서의 도덕은 따라서 보편적인 선에 대한 이성적 성찰과는 거리가 멀죠. 그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 간의 조화와 전체의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규범 양식일 뿐입니다. 도덕적 비난이나 징벌의 의미는 무엇보다 우선 한 사회적 위험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집단적 방어의 성격을 띱니다. 하지만 사회적 유지 보존을 위해 도덕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식의 발상도 거부합니다. 사회적 습관으로서의 도덕은, 그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회에 종속시킴으로써 삶에 애착을 갖도록 하는 생물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로빈슨크루소, 범죄자가 갖는 회한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사회적 자아가 지니는 생명적 의미를 역설하죠. 삶은 그것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이며, 이때 우리의 삶에 대한 의욕은 상실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순수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삶의 충분한 의의와 목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 충전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해줍니다. 따라서 개인의 사회에의 복귀는 동시에 삶에의 복귀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적 존재는 더는 단지 현재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견 없는 반성은 없고, 불안 없는 예견도 없으며, 생명의 집착에 대한 순간적인 이완 없는 불안도 없다. 무엇보다도 사회 없이는 인류도 없는데, 사회는 개인에게 곤충이 그의 자동주의 속에서 자신에 대한 완전한 망각에까지 밀고 간 무관심을 요구한다. (306p)
이렇듯 인간의 사회성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질서와 와해의 위험 앞에 항상 직면해 있습니다. 지성은 무엇보다 반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자기 의식을 전제로 하므로 지성적 인간은 이기주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를 독립된 주체로 놓고 그것에 원초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사회적 습관의로서의 의무만으로는 이러한 지성의 이기주의를 완전히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의무는 요구만 할 뿐, 그 보상은 거의 생각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도덕에로의 결정적인 동기 유발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정적 종교는 지성의 해체적 능력에 대항하는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이다
이때 정적 종교는 신의 권위를 내세워 보상의 명목으로 이기적 개인을 위협하고 설득합니다. 정적 종교는 인간이 지성을 행사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삶에 대한 의욕 상실과 사회적 와해의 요인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176p)입니다. 그것은 지성의 “우화적 기능”을 매개로 표출된 가공의 세계죠. 이러한 정적 종교의 중요한 기능은 지성의 반사회적 작용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닫힌 사회의 닫힌 도덕과 정적 종교는 상응합니다.
보편적 선의 구현이 아니라, 한 사회의 보존과 이익을 지향하는 닫힌 도덕은 필연적으로 한 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에 갈등과 투쟁을 유발합니다. 일정한 집단의 이기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닫힌 도덕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이것의 표현이 바로 전쟁이죠. 인류가 누리는 일시적 평화 상태는 그것이 진정으로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본성상 불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력의 잠정적 균형에 근거한 이러한 일시적 평화는 언제고 상충된 이해관계에 의해 깨질 수 있는 허약한 것입니다. 베르그손은 이런 현상에서 “우리가 자연을 뒤찾기 위해 문명을 긁어내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전쟁 본능”(418p) 이라는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문명화된 인간에 있어서도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어떤 형태의 이성적 노력이나 국제 조약 등의 장치로도 이것을 순화하거나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베르그손을 전쟁을 경험하면서 통감합니다.
지성주의를 넘어 역동적 종교로
인간 지성이 영혼에로 향한다면? 지성은 내적인 삶에 대해서도 공간화된 표상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지성은 자신이 옛것에 대해 지녔던 이미지를 새로운 대상에다 펼친다. 거기에서부터 의식의 상태들의 상호침투성을 고려하지 않는 원자론적 오류들이 비롯된다. 거기에서부터 정신을 지속 속에서 찾지 않고도 정신에 도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의 무익한 노력들이 비롯된다. (462p)
베르그손은 지성주의를 지나치게 발동시키면서 문명화된 인류에게 희미한 빛을 던져주는 것은 직관력의 회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직관력을 “감수성의 작용”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베르그손은 <시론>에서도 지성주의를 넘어가는 것은 “본능이나 습관을 제외하고는 의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오직 감수성의 작용”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지성적 앎이 아닌 감수성의 차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 한 바 있습니다.
베르그손에게 ‘반지성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한 저의 생각은 그 ‘반지성주의’가 항간에 ‘모르쇠주의’ 같은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고등한 신경계를 획득한 인류에게 지성이란 자동주의를 반성할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동주의란 무의식적 행동, 즉 행동과 의식 사이의 거리가 제로인 상태를 의미하니까요. 오히려 베르그손의 ‘반지성주의’란 지성 일변도의 판단과 확신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지성의 빛과 더불어 어른거리는 가장자리까지를 알아차릴 때 열리는 세계는 “정태적 종교가 안전과 안정을 얻는 기능을 하는 것 못지 않게 신비주의는 영혼에다 안전과 안정을 뛰어난 형태로 보장”(311p)해 줄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 말이 성장담론에 따른 미래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때 ‘신비’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정신 현상’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특권적 영혼들에 의해 드문드문 꿈꾸어진 열린 사회는 창조들 속에서 매번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실현”했지만 예측 가능한 발전의 결과 끝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이해했습니다.
우와~~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써내려간 후기 같네요^^ 책 전체를 아우르며 공들여 써주신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론>에서 <두 원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직관'의 문제는, 써주신 것처럼 '신비'와도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