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Seminar Board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마지막 세미나였는데요. 매 시간 안개를 헤매는 느낌이어서 세미나 후기를 쓰는 것도 꽤나 막막합니다만, 논의한 키워드 중심으로 최대한 정리해 보겠습니다 ^^
우선, 베르그손이 말하는 자연 혹은 자연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맥락에 따라 조금씩 의미가 다르게 읽히긴 하지만 토론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얘기가 나왔는데요. 하나는 본능, 어떤 것을 그냥 두면 그렇게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뉘앙스의 의미로서의 본능입니다. 예를 들어, 417쪽 ‘자연적 사회와 전쟁' 부분에서 베르그손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제작적 지성이 소유권의 문제와 연결되며 ‘인류는 그의 구조에 의해서 속성이 미리 정해져 있기에 전쟁은 자연적이다.’라는 구절에서의 자연적이라는 뜻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또 하나는, 429쪽 ‘경향들의 진화' 파트에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시계추 운동/ 나선 운동이 이끄는 힘인데요.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430) 사람들은 종종 역사에서 관찰되는 밀물과 썰물의 교대들에 대해 말해왔다. 한 방향으로 진행된 모든 작용은 반대 방향으로의 반작용을 이끌고 올 것이다. 그리고 이 반작용은 다시 그렇게 할 것이고, 시계추는 무한히 왔다 갔다 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시계추는 기억을 타고났으며, 중간의 경험으로 비대해졌기에 갈 때와 되돌아 올 때가 더는 같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가끔 일깨워주었던 나선 운동의 이미지가 시계추의 흔들거림의 이미지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이때 베르그손이 말하는 운동은, 계속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총체적인 힘이 분기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서로 반대 방향의 힘들을 감싸 안아 다시 합치고 또다시 분기하는 것의 반복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책에 종종 ’자연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총체성을 담지한 채 왕복 운동을 하는 것, 그게 자연인데 그러한 자연이 예상하지 못한 지점은 지성이 분기한 힘들을 뒤돌아 보며 멈추는 것 없이 앞으로만 내달린다는 점이 아닐까? 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성의 그러한 내달림으로 물질적 장애물이 거의 없어진 이 지점에서 베르그손은 지성은 더 이상 나아갈 게 아니라 생명이 멈춘 지점에서 스스로를 멈추고, 방향 설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책의 말미에는 강력하게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죠.
이어서, 세미나 중/후반부는 448쪽부터 시작되는 ‘기계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 파트와 관련하여 주로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우선 신체-기계주의에 대한 얘기가 오갔습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신체는 우리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도구, 나아가 기계주의와도 연관되는데, 문제는 이 방면에 있어서 자연이 예상치 못한 속도로 엄청나게 빠른 성장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456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56) 그런데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이 신체 속에 영혼은 그것이 있었던 대로 머물러 있기에, 이제는 신체를 채우기에 너무 작고, 신체를 이끌기에 너무 약하다. 거기에서부터 신체와 영혼 사이의 간격이 비롯되고, 거기서부터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인 가공할 문제들이 비롯되는데, 이 문제들은 이 간격에 대한 그만큼의 정의들이며, 오늘날 이 간격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많은 무질서하고 효과 없는 노력들을 야기하고 있다.
앞서 ’자연적인 것‘을 얘기하며 언급한 지성의 특성과도 연결되는데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자연이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제작적 능력을 부여하면서 우리의 확장을 준비했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물질적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주었지만 그렇게 비대해진 신체를 영혼은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주의라고 하면 우리 머릿속에 이상하게 부정적인 편견이 먼저 올라와서 자칫 잘못하면 베르그손이 기계주의를 말할 때 그가 여기에 반대한다고 먼저 넘겨짚고 해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베르그손은 말하길 ‘기계주의' 자체에 원인이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451) ‘사람들이 기계주의를 비난할 때, 사람들은 본질적인 불만을 소홀히 한다. 사람들은 우선 기계주의가 노동자를 기계의 상태로 환원하고, 그러고 나서는 예술적 감각을 질식시키는 생산의 획일화에 이르게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만일 기계가 노동자에게 상당히 많은 휴식 시간을 얻게 한다면, 그리고 만일 노동자가 이 여분의 여가를, 잘못 이끌어진 산업주의가 모든 사람의 능력 범위에 놓았던 이른바 향락들과는 다른 것에 사용한다면, 노동자는 기계를 제거한 후에 항상 제한된 한계들 안에서 도구로의 회귀가(하기야 불가능하긴 한데) 그에게 가져올지 모르는 발전에 만족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성에다 그가 선택했을 발전을 주었을 것이다.
뒤에 보충하는 내용들과 함께, 기계주의에 대한 베르그손의 생각은, 기계주의가 산업주의와 맞물려 사치와 향락의 길이라는 잘못된 선로로 빠지지만 않았어도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베르그손이 455쪽에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 ’기계적인 것이 기차 선로를 바꾸는 전절기의 사고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보다는 일정한 사람들을 위한 지나친 안락과 사치가 있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은 기계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언급하는데요. 그는 기계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경향이 모두 어떤 열망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발명의 정신을 추동하는 힘이었다고 봅니다. 특히 이 열망에서 민주주의가 기계주의에 덧붙인 것은 이 발명의 정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나아가게 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 열망은 앞에서부터 반복하고 있는 신비주의 (본질을 인류애적인 사랑에 두는) 적인 것으로서 베르그손은 이 힘이 기계주의의 태동에 있으며 그것은 결국 (455) ‘인간이 물질로부터 벗어나기 바란다면, 물질을 힘주어 딛고 일어서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신비적인 것은 기계적인 것을 부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베르그손은 기계주의의 출발이 결국 인간이 물질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열망이며 그러한 것이 산업주의와 더불어 사치와 향락의 잘못된 경로로 빠졌지만, 여기서 멈추고 다시 본래의 기계주의의 열망- 모든 인류 전체를 물질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의 지점으로 되돌아가서 나아가는 것에 앞으로의 힘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대부분 의견들도, 산업주의 문명의 극단에 온 현재의 시점에서 베르그손의 생각에 수긍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생각이 상당히… 어쩌면 너무 긍정적이지 않나…? ^^ 였는데요. 한편 저는, 오래전에 세미나를 통해 읽은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 에서 시몽동이 기술에 대해 갖는 입장과 유사하다고도 느꼈습니다. 그는,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로 보았는데요.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 민호샘께서 이런 질문도 주셨죠. 우리가 흔히 기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가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베르그손의 기계주의에 대한 위와 같은 입장은 어떻게 다를까?
뭔가 다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말로 잘 정리하지 못한 채 세미나를 마무리하였네요 ^^
난희샘께서도 지난 후기에 적어 주셨지만, 지난주 세미나 때 느낀 점은, ‘아! 이 책이 베르그손 식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였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최근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감명 깊게 본 이후 베르그손의 어조가 한층 더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인데요. 1932년 저작인 이 책은, 2차 대전 이전에 쓰였지만, 마치 그것의 비극을 미리 감지하고 어떻게든 그 흐름을 막아 보려는 시도 혹은 ‘부정’을 생각하지 않는 베르그손 식의 강력한 외침, 결단을 촉구하는 외침으로 읽힙니다. 저는, 베르그손의 다른 저작들이 품고 있는 부드러운 어조에 비해 이 책은 그 톤이 훨씬 강렬하고, 긴박하며 단호하다고 느꼈습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서양 사유의 발생적 메커니즘을 뿌리 깊게 연구한 베르그손에게 그것의 한계와 위험은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필연적 재앙으로 예견될 수 있었기에.. 그 외침이 더 간절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저희의 무지막지하고 SF적인 생각의 조각들은 다음 주 채운 선생님의 강독으로 어케어케 각자 나름 정리가 되길 바라며… 2023년 즐거웠던 베르그손 함께 읽기의 세미나를 마칩니다 ^^
'자연이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서의 지성적 혁신들을 말할 때, '자연'의 의미가 헷갈려지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분기와 수렴의 나선 운동을 뚫고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진보의 방향을 말하려는 것인가... 확실히 화석연료로부터 동력을 끌어내는 도구를 제작해 문명을 추진시키는 건 자연(이전까지의 진화) 쪽에서 보면 불연속적인 것 같기는 합니다. 더구나 원자력 같은 경우라면 더 그렇고요.
베르그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성과 낙관은, 기계주의에 대한 상식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만일 기계가 노동자에게 상당히 많은 휴식 시간을 얻게 한다면, (...) 자신의 지성에다 그가 선택했을 발전을 주었을 것이다." 물질적 제약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기술문명의 가치를 보는 일, 그것을 '잘 이용하면 된다'는 구도는 언제나 문제가 많아왔었는데요. 왠지 맑스가 그린 공산주의 후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도 떠오르고, 이런저런 우려도 따라붙고...
그럼에도 베르그손의 말이 열에 들뜬 진보주의자와는 다르게 들리는 건 아마도, 그가 그 기계주의가 불러온 참사인 1차대전을 겪은 후에 말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철학자로서(그러나 철학의 경계를 밀고나가면서), 종교지도자처럼 '그대들 이렇게 살아라'라고 펼쳐보이는 게 아니라, 끝까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열어두고 있는 모습이 왜인지 뭉클합니다!!
드디어 베르그손의 마지막 저작까지 읽었군요. 열에 들떠서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산을 오른 기분입니다. 차분히 더듬어 내려갈 일이 남았고 숙성 발효되기를 열망합니다.
베르그손의 기계주의는 일단, 민호샘의 질문처럼 기계는 쓰기 나름이라는 그 기계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흔히 기계에 대한 긍정부정의 용법을 말하며 부정적인 것은 줄이고 긍정적인 면을 살리자고 할 때, 이 관점은 기계와 인간주체의 분리가 전제되고 수동과 능동이 분리되는,전형적인 근대적 관점이 아닐까요? 일리치가 기계와 기술에 대한 이런 관점을 엄청 비판했죠.
베르그손의 기계주의는 정신과 물질,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것이 작동한다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키워드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관없는 신체'즉 기계는 부분과 전체가 분리되지 않은 채 삐거덕거리며 작동합니다. 저는 베르그손이 기계주의를 '극복'하는데 신비주의를 갖다붙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들었어요. 삐거덕대며 오작동하는 작동 그 자체가 신비가 아닌가 ᆢSF 소설을 써봅니다.
베르그손 동지들!! 수고 많으셨고 열나 감사했습니다~~
저도 뒤로 갈수록 베르그손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여운이 오래 남았어요.. 결단을 촉구하는 마지막 외침...!
"인간이 물질로부터 벗어나기 바란다면, 물질을 힘주어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말은 기계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의 관계뿐 아니라 정태적 종교와 역동적 종교, 직관과 지성의 관계에도 해당되는 것 같네요. 베르그손이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한 일도 결국 이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2023년 즐거웠던 베르그손 함께 읽기의 세미나" 샘들과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제 베르그손이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전해준 씨앗들을 각자 잘 싹 틔우는 일만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