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와 아침을 보낸 기간이 어느덧 두 계절을 넘어가고 있네요.
더위가 슬슬 지칠 때가 된 것 같은 여름의 후반기, 아침 낭송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여름 아침에도 꿋꿋이 낭송 자리를 지켜주시는 샘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 기운에 편승하게 됩니다!
이번 주에 만난 구절들은 극히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덕이 악덕에 의존하고 있는 역설을 밝히는 대목과
동식물과 인간 사이에 분리 불가능한 얽힘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온정을 베풀 상호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대목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에세>에서 가장 길고도 핵심적인 장인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가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장을 저희는 몇 주간 읽어가게 될 것 같은데요.
벌써 종교에 대한 몽테뉴의 회의주의적 고찰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그럼 이번 주의 필사를 함께 나눠 볼까요~
11장 잔인성에 관하여
덕이란 우리 안에서 생기는 선(善)의 경향과는 다른, 더 고상한 무엇인 것 같다. 저절로 잘 조절되고 천성이 훌륭한 사람들은 유덕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따르고 행동에서도 같은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덕에는 축복받은 천성으로 인해 온화하고 평온하게 이성이 이끄는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보다 뭔가 더 위대하고 더 능동적인 울림이 있는 것 같다. 타고난 온유함으로 모욕을 당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는 대단히 아름답고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급소를 찌르는 모욕으로 분이 솟아오를 때, 복수하고 싶은 맹렬한 욕망에 맞서 이성으로 무장하고 크나큰 갈등 끝에 마침내 자기를 제어한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훨씬 더 장하리라. 전자는 잘한 것이요, 후자는 덕을 실천한 것이리라. 한 행동은 선이라 불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덕행이라 불릴 것이다. 덕이란 명칭은 어려움, 그리고 상반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적수 없이는 행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은 선하시고, 강하시고 자유로우시며 정의롭다고 하지 유덕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분이 행하시는 바는 전적으로 자연스러우니, 애써 하시는 것이 아니다.(153쪽)
즉 덕은 수월함을 친구로 삼기를 거절하며, 좋은 천성에 의해 조절된 발걸음이 저절로 향하게 되는 쉽고 순한 경사로는 진정한 덕의 길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진정한 덕은 쓰라린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덕은 메텔루스가 겪은 것 같은, 그 꿋꿋한 행로를 좌절시키려고 운명이 즐겨 사용하는 외적 난관이나, 아니면 우리 본성의 무질서한 갈망과 불완전성이 야기하는 내적 시련을 원한다.
나는 아주 쉽게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불현듯 내가 아는 한 가장 완벽한 인간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내 말대로라면 별로 추천할 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인물에게서 나는 그 어떤 그릇된 욕망도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간 덕의 길에 무슨 난관이나 속박이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나는 할 수 없다. 그의 이성은 너무도 강력하고 너무도 자신을 잘 제어하므로 악한 욕망이 생길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처럼 고매한 덕에 맞설 만한 적수를 나는 떠올릴 수 없다. 그의 덕은 당당하고 호기롭게 그 어떤 저지나 방해도 받지 않고 장엄하고도 거침없이 행진하는 것만 같다.
만일 덕이 그것과 반대되는 욕망과 싸워서만 빛날 수 있는 것이라면, 덕은 악덕의 도움 없이 지낼 수 없고 악덕 때문에 신용과 명예를 얻었으니 악덕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또 덕을 무릎 위에 앉히고 느슨하게 기우면서 수치, 열병, 가난, 죽음, 고문을 장난감으로 주며 재롱을 피우게 하는 저 용감하고 호방한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만일 완벽한 덕이란 참을성 있게 고통과 싸우고 견딤으로써,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통풍의 고통을 참아 냄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쓰라림과 난관을 필수적인 상대로 덕에게 부여한다면, 단지 고통을 경멸할 뿐 아니라 즐기기까지 하면서 쿡쿡 수시는 복통을 간지러워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덕은 뭐라고 해야 할까? 에피쿠로스 학파가 목표로 세웠던 덕, 그들 중 여러 명이 행동으로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 덕이 그랬고, 그들이 가르친 계율마저 훌쩍 뛰어넘어 버린 다른 많은 이들의 덕이 그랬다.(155~156쪽)
괴상한 말이지만 그래도 말하겠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두고 보건대, 내 사상보다 내 행습에 더 절도와 질서가 있고, 내 이성보다 내 정욕이 덜 방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163쪽)
소크라테스는 그의 관상에서 악덕의 성향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사실 그것이 자기가 타고난 천성이었으나 수련을 통해 고쳤노라고 고백했다.(165쪽)
이집트인들은 비할 바 없이 경건했지만, 살아 있는 돼지 대신 돼지 그림을 신들에게 바침으로써 얼마든지 신성한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적 실체인 신을 그림과 그림자로 매수하려 하다니 대담한 생각이다.(170쪽)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 끊임없이 낡은 거처를 떠나 새 거처로 가서 거기 깃들어 살 뿐.
_오비디우스(172쪽)
이 모든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거리가 있다 해도, 우리를 단지 생명과 감정이 있는 짐승들뿐 아니라 식물들과도 묶어 놓는 어떤 배려, 인류로서의 어떤 보편적 의무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사람을 정의롭게 대하고, 선한 소질을 지닌 피조물에겐 선의와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짐승들과 우리 사이엔 어떤 관계가, 어떤 상호적인 의무가 있다.(175쪽)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
만일 우리가 살아 있는 신앙의 중재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당신에 의해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가 그처럼 거룩한 발판과 기반을 갖고 있다면 인간적인 상황들이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 댈 힘을 가지진 못할 것이다. 우리의 보루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공격에 항복하진 않을 것이요, 새 것에 대한 사랑, 군주의 억압, 어느 편이 유리해 보인다는 판단, 지각없고 우발적인 변덕 따위가 우리 믿음을 흔들고 변질시킬 힘을 갖진 못할 것이다.(182~183쪽)
그 점을 확인하고 싶은가? 우리의 행습을 이슬람교도나 이교도와 비교해보라. 언제나 그들보다 못할 것이다. 우리 종교의 장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특출하게,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빛나야 할 것이요, 사람들이 “그렇게 정의롭고, 인정많고, 착한가? 그렇다면 저들은 그리스도 교인들이다.”라고 말해야 할 텐데 말이다.(183쪽)
어떤 자들은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 더 많은 수의 다른 자들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알지 못한 채 자기가 믿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믿게 한다.(184쪽)
하느님은 당신의 놀라운 구원을 믿음과 종교에 베푸시지, 우리의 정념에 베푸시지 않는다. 여기서는 인간들이 판을 좌지우지하며, 거기에 종교를 이용한다. 반대로 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185쪽)
우리 종교는 악덕들을 뿌리 뽑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도리어 그것을 감싸고, 기르고, 부추긴다.(187쪽)
이 모든 것은, 다른 종교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우리 역시 그저 우리 식으로, 그리고 우리 손으로 우리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매우 분명한 증거이다. 우리는 우리 종교가 통용되는 나라에서 우연히 태어났거나, 또는 우리 종교의 오랜 역사나 그것을 옹호했던 사람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뿐이거나, 또는 불신자들에게 가하는 위협이 무섭거나, 또는 그것이 주는 약속을 기대하기 때문에 추종하는 것이다. 그런 동기들도 우리 신앙을 위해 쓰여야 하되 보조적인 것으로만 쓰여야 한다.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연결 고리일 뿐이다. 다른 지역, 다른 증언, 비슷한 약속과 위협이 동일한 방법으로 정반대의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