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와 함께 장마 비슷한 비가 짓궂어도, 결국 방류가 되어도, 저희는 아침에 일어나 몽테뉴를 읽습니다.
그래도 바람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는 냄새가 납니다.
길게 이어지는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에서 이번 주에 읽은 범위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 짓게 됩니다.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느껴질만큼, 동물들의 탁월한 능력을 아주 박학하고도 세심한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머리로 동물들의 감춰진 속내의 움직임을 안단 말인가?"
"짐승들만이 가진 특별한 것에 대해 우리가 뭘 아는가?"
이런 급진적인 물음들을 던지며, 동물들의 의식, 언어, 학습, 도구 이용, 정의, 살림능력, 고결함 등을 열거합니다.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주장을 이어갑니다.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을 방불케 할 만큼의 탈-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가진 몽테뉴.
저는 이것이 건강한 르네상스적 지식인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평등'의 사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몽테뉴의 기분 좋은 문장들을 필사로 확인해보실까요!
스봉은 이 훌륭한 연구에 진력하여, 세상의 어느 한 조각도 저를 만든 제조자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주가 우리의 믿음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신의 선의를 훼손하는 일일 것이다. 하늘, 땅, 원소들, 우리 육신과 영혼 등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에 협력한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만 알아내면 된다. 우리가 들을 줄만 안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가르친다. 이 세상은 지극히 거룩한 사원이요, 인간은 태양, 별들, 물과 땅 등의 조상(彫像)들을 보고 명상하라고 이 사원 안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192쪽)
천상궁륭의 저 경탄스러운 운행, 그의 머리 위로 저토록 고고하게 회전하는 횃불들의 영원한 빛, 저 무한한 대양의 가공할 움직임들이 그의 편익을 위해, 그에게 봉사하기 위해 세워져서 그토록 오래 계속되고 있다고 누가 그에게 가르쳤는가? 자기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며, 온갖 것들에 의해 해를 입을 수 있는 이 가련하고 초라한 피조물이 우주의 주인이요 제왕이라고 자처하는 것보다 더 가소로운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주를 지배하기는커녕 우주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해독할 능력이 없는 자가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저만 이 위대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부분들을 알아볼 수 있으며, 저만 그것을 지은 이에게 감사할 수 있고, 세상에서 들고 나는 것들을 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특권, 누가 그 특권장에 도장을 찍어 주었단 말인가? 그 훌륭하고 위대한 임무의 사령장을 우리에게 보여 다오.(197쪽)
자만심은 우리의 본성적이고 본원적인 병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상처 입기 쉽고 취약한 것이 인간이요,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가 세상의 진창과 똥 가운데 살며, 우주에서 가장 활기 없고 무기력한 가장 나쁜 부분에 매여 못 박혀 있고, 하늘의 궁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계단에서 세 가지 조건 중 가장 나쁜 조건을 가진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지각하고 안다. 그러면서도 상상으로 자기를 달의 궤도에 올려놓고,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바로 그 상상력의 허영으로 인간은 자기를 하느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자신에게 신성한 조건들을 부여하며, 자기만 따로 떼어 다른 피조물의 무리에서 분리시키고, 자기의 동료요 동무인 동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잘라서 좋을 성부른 대로 이런저런 기능과 능력을 분배하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 머리로 동물들의 감춰진 속내의 움직임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동물들과 우리를 비교해서 동물들이 어리석다고 단정 짓는가? 내가 고양이와 놀 때,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지 아니면 고양이가 날 데리고 소일하는지 누가 아는가?(200~201쪽)
짐승과 우리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결함이 어째서 짐승들만의 결함이고 우리 결함은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게 누구 책임인지는 따져 봐야 할 일이다. 짐승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짐승들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저들을 여기는 만큼, 저들도 똑같은 이유로 우리를 짐승으로 여길 수 있다. 우리가 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별로 희한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바스크인이나 혈거인도 이해하지 못한다.(201~202쪽)
침묵도 소망과
생각을 알릴 수 있다.
_타소
손으로는 어떤가? 요구하고, 약속하고, 부르고, 내보내고, 위협하고, 기원하고, 애원하고, 부정하고, 거절하고, 묻고, 감탄하고, 셈하고, 고백하고, 후회하고 겁내고, 부끄러워하고, 의심하고, 가르치고, 명령하고, 자극하고, 격려하고. 맹세하고, 증언하고, 비난하고, 단죄하고, 사면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도전하고, 분개하고, 아부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경멸하고, 조롱하고, 화해하고, 권하고, 흥분시키고, 축하하고, 즐기고, 동정하고, 슬프게 하고, 낙담시키고, 놀래고, 고함 지르고, 입 다물고, 또 무엇인들 못할까, 혀가 샘낼 지경으로 다양하고 다채롭게 구사한다.(203~204쪽)
모든 동물들 중에서 인간만이 사유의 번다하고 무절제한 자유를 가져서, 있는 것, 없는 것, 원하는 것, 그른 것, 그럼직한 것 등을 그에게 죄다 떠올려 준들, 그것은 너무 비싸게 얻은 장점이고, 별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 병, 변덕, 번민, 절망 등 그를 짓누르는 불행의 주된 원천이 거기서 생겨나기 때문이다.(212쪽)
오만에서 나온 허영심 대문에 우리는 우리 능력이 자연의 관대함보다 우리가 지닌 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습득한 자질들을 내세워 우리를 영광되고 고귀하게 만들려고, 천성적인 자질들을 다른 동물들에게 풍성하게 부여하며 양보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단순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남에게 구걸하거나 배워서 얻은 것들과 똑같이, 순전히 내 것이요 천성적인 장점들도 소중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는 하느님과 자연의 은혜로 받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바람직한 것을 얻을 수 없다.(213쪽)
디오게네스는 자기 부모가 자기를 종의 신분에서 풀어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말하곤 했다. “저분들은 돌았어. 나를 부양하고 먹이는 자가 나를 섬기는 자인데.” 그러니 짐승들을 키우는 자들은 짐승들의 봉사를 받는다기보다 짐승들을 섬기고 있다고 해야 옳다.
게다가 짐승들에게는 더 고결한 면이 있으니, 용기가 부족한 탓으로 사자가 다른 사자의 노예가 되거나, 말이 다른 말에게 복종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우리가 짐승들을 사냥하러 가는 것처럼 호랑이와 사자들은 인간들을 사냥하러 간다. 짐승들 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개는 토끼를 쫓고, 메기는 잉어를 쫓고, 제비는 매미를, 매는 티티새와 종달새를 쫓는 것이다.(215쪽)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 기이한 일에 더 감탄하며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시간을 끌며 길게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누구라도 우리와 함께 사는 동물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보는 것을 가까이서 관찰하면 다른 나라 다른 세기에서 수집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운행은 언제 어디서나 여일하다. 그것의 현 상태를 충분히 이해한 사람은 모든 미래, 모든 과거에 어떠할지도 적확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224쪽)
우리는 우리에게 이상해보이는 것,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헐뜯는다. 짐승들에 대해 판단할 때 그러듯이. 짐승들은 우리와 비슷한 성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참고해서 우리는 어떤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짐승들만이 가진 특별한 것에 대해 우리가 뭘 아는가? 말, 개, 소, 양, 새 등 우리와 같이 사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리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지시를 따른다. 크라수스의 곰치도 그가 부르면 그에게로 오곤 했다. 아레투사의 샘에 있는 뱀장어들도 그렇게 한다. 그리고 나는 양어장에서, 양육사가 정해진 고함을 지르면 물고기들이 먹이를 먹으려고 달려오는 것을 많이 보았다.
놈들은 각자 이름을 갖고 있어서
저마다 주인이 부르면 달려온다.
_마르시알리스(224~225쪽)
발과 머리는 따뜻하게,
나머지는 짐승처럼 사시오.(229쪽)
카멜레온은 제가 앉은 자리의 색깔로 변한다. 문어는 제가 무서워하는 것에게서 몸을 감추거나, 제가 쫓는 것을 잡기 위해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꾼다. 카멜레온의 변화는 외부의 영향을 받은 변화이지만, 문어의 경우는 능동적 변화이다. 우리에게도 몇 가지 색깔 변화가 일어난다. 두려움, 분노, 수치, 그 밖의 여러 감정에 따라 얼굴색이 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멜레온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당한 결과이다. (227쪽)
욕망에는 마시는 것이나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이 있고, 여성과의 관계처럼 자연스럽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은 것도 있다. 또 자연스럽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것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거의 모두 이 마지막 종류에 속한다. 그것들은 모두 필요 이상의 것이요, 작위적인 것들이다. 자연(본성)이 만족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적고, 자연(본성)이 우리에게 욕망할 거리로 준 것도 얼마나 적은지 놀라울 따름이니 말이다. 우리네 부엌에서 차려 내는 요리들은 자연의 명령에 부응하는 게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한 사람이 생존하는 데 하루에 올리브 한 아리면 충분하다고 했다. 우리가 포도주 맛을 까다롭게 따지는 것은 자연의 가르침과 상관없고, 사랑의 욕망에 덧붙이는 조건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사랑을 위해 대(大)집정관의 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_호라티우스
행복에 대한 무지와 그릇된 견해가 우리 안에 불어넣은, 본성과 상관없는 이런 욕망들이 너무 많다 보니 본성적인 욕망을 거의 전부 몰아내 버린다.(231쪽)
황제의 영혼이나 구두 수선공의 영혼이나 같은 틀에 부어 만든 것이다. 왕공들이 하는 행위의 중요성이나 그 무게를 보고 우리는 그것이 그만큼 무게 있고 중요한 어떤 이유로 행해졋으리라 여긴다. 틀린 생각이다. 그들도 우리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동기로 오락가락한다. 우리가 이웃과 말다툼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왕들은 전쟁을 일으킨다. 우리로 하여금 하인을 매질하게 만드는 이유가 왕에게 떨어지면 그는 한 지방을 쓸어 버린다. 왕들이 바라는 것도 우리만큼 경박하지만, 그들은 더 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욕망이 진드기도 코끼리도 움직인다.(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