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세미나로 혼자 분량을 읽을 때 생겼던 의문점들이 많이 해결됐고, 이야기 나눠주시고 도와주신 선생님들께 모두 감사합니다!
저는 마지막에 이야기 나왔던 '무와 부정을 구분할 수 있겠다'는 의견에 힌트를 얻어 7주차 후기를 쓰려 합니다.
무와 부재
베르그손은 절대 공백이 불가능한 점을 짚으면서 4장의 포문을 열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는 절대 공백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공백이 가능하다고 인정해 보자. 내가 일단 지워진 대상이 빈 자리를 남긴다고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공백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가정상 하나의 장소, 즉 정확한 윤곽에 의해 제한된 공백, 다시 말하면 일종의 사물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공백은 사실상 어떤 결정된 대상의 부재이다.”(418쪽) 그는 흔히 ‘무’ 하면 떠오르는 진공 상태, 공백의 상태가 제한된 테두리 안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힙니다.
또한 베르그손은 대상이 부재한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주체의 지각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억과 기대가 가능한 존재가 자신의 기대에 대한 실망을 나타내는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재가 “사유의 감정적 채색, 선호의 감정이나 대치의 관념 사이의 조합 또는 차라리 간섭과 다르지 않다.”(419쪽)고 말합니다. 이렇게 공백의 표상은 “모호한 대치의 관념이나 느껴지거나 상상된 욕망이나 회환의 감정”(420쪽)으로 분석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삭제하는 것이 대치에 불과하다면, 대상을 표상으로 환기하고, 지성으로 펜을 그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기는데요. 베르그손은 이것 또한 유효하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부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정
대상의 표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단 대상이 존재가 가정됐기에 그 이후의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에 베르그손은 부정이 더 많은 것을 내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상하는 대상의 관념 속에는 <존재한다>고 생각된 그 동일한 대상의 관념보다도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의 관념이기도 하며 게다가 이 대상을 현실적 실재 전체에 의해 밀어내는 표상도 더불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425쪽)
이 가능성은 긍정과 대조하여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긍정은 하나의 관념을 구성하는 데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완전한 행위인 반면 부정은 지적인 행위의 절반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절반은 [단지] 암시하고 있거나 아니면 차라리 비결정적인 미래로 넘기고 있는 것이다.”(427쪽) 이렇게 부정은 긍정과 달리 대상에 대한 확정적 진술이기보다는 오히려 판단에 근거한 판단. 즉, 대상에 대한 긍정문을 겨냥하며, 긍정문에 의존하여 대조를 공식화하고, 또 불완전한 형태로 대조를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무와 마찬가지로 부정 또한 ‘기억(과거)이나 기대가 불가능한’, ‘순전한 경험의 선을 따르는’ 존재에게는 성립하지 않는 관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는 “사실이 사실을 잇따르고, 상태가 상태에, 사물이 사물에 이어지는 것”(436쪽)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이 무와 구별되는 지점은 부정이 언표되면 하나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나타나고 교정되어, 부정은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교육적인 영역에서 작동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부정의 ‘비결정성(비결정적인 것이 내포하는 다른 가능성)’과 판단에 대한 판단이기에 ‘판단 밑에 깔려진 주체의 기대가 부정으로 인해 경유되어 표면 위로 나타나는 효과’ 두 지점이 들뢰즈 철학에서 발전, 계승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질문드렸던, 439쪽, 442쪽의 ‘전체의 관념’ 은 수업에서 같이 맥락을 살펴본 이후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조작은 어떤 사물 위에서나 행해지므로 우리는 그것이 각 사물 위에서 차례로 시행되면서 결국 모든 사물 전체에 미치는 것으로 가정한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절대무>의 관념을 획득한다. 이제 우리가 무의 관념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 전체의 관념임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것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무한히 건너뛰면서 한 곳에 있기를 거부하고, 이와 같은 거부에 자신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신의 현 위치를 자신이 방금 떠나온 위치와 관련해서만 결정하는 정신의 운동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포괄적이고 충만한 표상인 바, 이는 그것이 가장 밀접한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는 전체의 관념만큼이나 그러하다.”(439쪽)
“무의 관념이 모든 사물의 삭제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자기 파괴적 관념이고 단순한 말로 환원되리라는 것, 반대로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의 관념이라면 거기서 전체의 관념에서와 같은 만큼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442쪽)
이는 절대 무가 모든 사물의 삭제를 상정하는 데, 부정은 그 대상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만, 직전에 관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전체가 한꺼번에 삭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부정이 하나에 대한 관념이라면 수많은 비결정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의 관념과 같은 수많은 정보 값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7회차 수업을 통해 단어/표현에 대해 의문이 들면, 앞뒤 맥락을 넓게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혼란스럽던 무와 부정에 대해서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조적 진화>의 빛나는 구절들 중에서도 무와 부정에 대한 논의가 저에게는 왜인지 무척 와 닿았었습니다.
특히 무의 관념을 가능케 하는 부정의 기제가 지성을 진화시킨 인간적 존재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왜 인간만이 번뇌로운가 혹은 허무감(차라리 무를 욕망하는 지경)에 빠지는가에 대한 질문도 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사고가 갖는 귀중한 면인 사회적 교육적 실천적 요구들은 곰곰 생각해볼 부분인 것 같습니다.
판단에 대한 판단으로서 현실화되지 않은(혹은 아직 자신도 모르는) 비결정적 기대를 내비치는 부정(금지, 규제, 거부 등)에도 어떤 창조력이 있지 않을까 질문해봅니다.
저도 무와 부정에 관한 논의는 처음 읽었을 때부터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세미나에서 부정에 관한 다른 측면들을 생각해볼 수 있어서 더욱 흥미로워졌습니다. 다음 시즌에 읽을 책에서 이 논의가 어떻게 연결될지도 궁금하네요~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