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 공기가 선선해지고 있습니다! 해 뜨는 시간도 조금씩 늦어지고 있고요~
더위가 몰려가고 나니, 아침도 더 맑게 느껴집니다!
<에세>는 이제 핵심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좌우명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길어올린 회의주의철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규정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철학 학파들의 지적 오만을 꿰뚫으며, '판단 유보'(epoche)의 고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몽테뉴의 서재에는 에포케의 그리스어 εποχη가 새겨져 있다고 하죠.
그런 몽테뉴적 철학하기의 자세를 한번 보실까요? 빵빵한 필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엔 대체 어떤 허영심이 들어 있길래 우리가 흉내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을 우리 아래로 낮춰 보며 경멸조로 해석하는가?
우리와 동물들이 다를 것도 없고 피차 상통한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어가 보자. 우리의 영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특권, 즉 제가 생각한 것은 모두 자기 고유의 본성으로 돌리고, 제게 주어진 모든 것에서는 덧없고 육체적인 성질을 다 떼어 버리며, 제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겐 영혼 자신의 영원불멸하며 영적인 본성에 알맞도록, 그것들이 지닌 부패하기 쉬운 고유성을 다 벗고 떼어 내라고, 두께, 길이, 깊이, 무게, 색깔, 냄새, 거칠음, 매끈함, 단단함, 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것은 불필요하고 쓰잘 데 없는 외피인 양 치워 버리라고 강요하는 그 특권이 짐승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내 마음에 간직한 로마나 파리, 내 상상 속 파리를 떠올릴 때, 면적도 돌멩이도 회반죽도 나무도 없는 도시를 떠올리고도 그것을 수긍하는 식으로 말이다. 전투 나팔, 소총, 전투에 길든 말이 마굿간 건초 위에 누워 자면서도 마치 한창 전투 중인 것처럼 몸을 비틀고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면, 분명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도 부대도 없는 군대를 제 영혼 속에서 떠올리고 있는 게 확실하니 말이다.(246~247쪽)
나른하게 누워 자던 사냥개들이
갑자기 다리를 떨며 낑낑대고
드디어 찾아낸 야생 동물의 자취에다 하듯,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흔히는 잠 깨서도,
환상이 흩어져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허깨비 사슴을 쫓으며, 그것이 달아나는 것을 본다.
_루크레티우스
우리는 집 지키는 개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꿈속에서 으르렁거리다가 진짜로 짖으며 소스라쳐 깨어나는 것을 자주 본다. 개의 영혼이 본 그 낯선 사람, 그는 크기도 색깔도 존재도 없는 인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비물질적 인간이다.(248쪽)
신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하자면,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우리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미(美)가 무엇인지 모르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미의 무슨 본래적 형태가 있다면 불이 뜨겁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 가능할 터인데, 우리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에도 가지각색의 형태를 상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 멋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한다.(248쪽)
최상의 미를 플라톤은 구형에 주었지만,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것을 차라리 피라미드형 아니면 사각형에 부여한다. 공 모양의 신이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250쪽)
게다가 우리는 벗고 있으면 자기 짝까지 불쾌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물이요, 우리의 본능적인 행위를 동족에게 감춰야 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점을 주목하자. 이 방면의 대가들이 사랑의 열병에 대한 치료제로서, 갈구하는 대상의 몸을 샅샅이 맘껏 보라고 처방하는 것, 애착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실컷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진실로 새겨 볼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251~252쪽)
결국 우리 딴의 생각에서 우리가 동물들 몫으로 돌리는 자연의 혜택들 자체가 동물들을 우리보다 아주 유리하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여기는 자산이란 공상적이고 허황된 것, 지금은 없는 미래의 것으로,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거나, 이성, 지혜, 명예처럼 사실과 달리 우리 멋대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들이다. 그러고서 우리는 실제적이고 사용 가능하고, 구체적인 장점은 동물들 몫으로 돌린다. 평화, 평안, 안전, 순진, 건강, 그렇다,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진 선물인 건강을 말이다.(252쪽)
“술이 환자에게 좋은 법은 드물고 해로운 경우는 아주 많다. 그러니 확실치 않은 치료를 기대하며 명백한 위험을 무릅쓰게 하기 보다는 아예 술을 주지 않는 것이 낫다. 마찬가지로 자연은 우리에게 그토록 관대하고 넉넉하게 베풀어 준,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그 사고 활동, 그 혜안, 그 통찰력을 아예 주지 않았던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많은 사람에게 치명적이요, 극히 소수에게만 유익하기 때문이다.”(키케로)(255쪽)
이런 따위의 상상에 노예가 된 한 인간의 삶을 농부의 삶과 비교해 보라. 농부는 본능적인 욕구에 순응하면서 지식이니 예측 같은 것 없이 오직 당장 느끼는 감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정말 병에 걸렸을 때만 앓는다. 반면 전자는 신장이 아니라 마음에 담석을 가진 경우가 많다. 병에 걸리고 나서 아프면 너무 늦다는 듯 그는 상상으로 앞당겨 앓으면서, 병을 맞이하러 달려 나간다.(262~263쪽)
나는 자유롭고, 충만하고, 완전한 건강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즐기려고 내 욕구를 연마한다. 요즘은 그런 건강이 내게 덜 일상적이고 더 귀한 것이 되고 보니 더더욱 그렇다. 새삼스럽게 생활 방식을 억압적으로 바꾸어 그 불편함으로 내 건강의 안정과 편안함을 흩뜨리다니 어림없는 일이다. 정신의 동요가 얼마나 많은 병을 유발하는지는 짐승들의 경우가 충분히 보여 준다.
브라질 사람들은 늙어서만 죽고, 그것은 그들이 고요하고 평온한 환경에서 살아서라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해서라고 본다. 문자도 법도 왕도 없이, 그 무슨 종교 같은 것도 없이, 감탄스러운 단순성과 무지 속에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라, 긴장을 주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감정, 사고, 의무 따위를 짐지지 않은 탓에 말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일로, 가장 천하고 둔중한 자들이 사랑의 행위에는 더 견실하고 바람직하며, 노새꾼의 사랑이 흔히 한량의 사랑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은, 후자에게선 마음의 동요가 육체의 힘을 교란해 꺾고 지치게 하기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마음이 늘 마음 자체를 지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듯이 말이다. 마음 자체의 기민하고 예리하고 유연한 성질, 결국 마음 자체의 힘 말고 무엇이 마음을 흩뜨리며 습관처럼 미친 생각에 빠뜨리겠는가? 가장 교묘한 망상이 가장 교묘한 지혜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지겠는가? 가장 깊은 우정에서 가장 큰 적의가 나오고, 정력적인 건강에서 치명적인 병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가장 희귀하고 활발한 움직임에서 가장 엉뚱하고 일그러진 광상이 나온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면 나사를 반 바퀴만 돌리면 된다.(263~264쪽)
그대는 한 인간이 건전하길 바라는가? 그가 균형 있고, 견실하고 확고한 태도를 갖고 있기를 바라는가? 그에게 무지와 한가함과 둔중함을 입혀라.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려면 바보로 만들고, 우리를 이끌어 가려면 장님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통과 불행에 대해 냉정하고 둔감한 감각을 갖는 것의 편리함이 결과적으로 즐거움, 행복, 쾌락에 대한 감각을 덜 예민하고 무덤덤하게 만드는 불편함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참한 조건에는 즐길 것보다는 피할 것이 더 많고, 우리는 최상의 열락이라도 가벼운 고통만큼 깊이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은 고통보다 쾌감을 덜 느낀다.”(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완전한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못 느낀다.
우리는 살갗이 조금만 긁혀도 아파하면서,
건강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나는 늑막염이나 통풍을 앓지 않는 것이 기쁘지만
그뿐,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것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라 보에시
우리의 행복이란 불행이 없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 때문에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삼은 철학 학파조차 행복을 단지 고통 없는 상태라고만 정의했다. 불행하지 않은 것, 그것이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265~266쪽)
그래서 나는 말한다. 단순함이 우리를 불행 없는 곳으로 이끄는 것이라면, 우리 조건으로는 최상의 행복 상태로 이끄는 것이기도 하다고. 그렇지만 단순성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둔중한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266쪽)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이 무감각 상태를 전혀 찬양하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만일 병에 걸렸다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싶다. 또한 누가 내 살을 지지고 찢으면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사실 고통에 대한 인식을 뿌리 뽑는 자는 쾌락에 대한 인식 또한 뽑아 버릴 것이요 결국 인간 자체를 무화할 것이다. “그런 무감각은 비싼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 정신의 둔화와 육신의 마비라는 대가 말이다.”(키케로)
불행도 인간에게 약이 된다. 고통이라고 항상 피할 것이 아니요, 쾌락이라고 항상 쫓을 것이 아니다.(267쪽)
“우리 불행들을 영원한 망각 속에 파묻는 것도, 좋았던 시절의 감미로운 추억을 일깨우는 것도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간직하며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키케로)는 거의 진실이다.(269쪽)
우리 중에서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자들은 가련하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들에게 성경은 말한다. “진흙과 재여, 네가 자랑할 무엇을 가졌느냐?” 또 다른 데서는 “하느님은 인간을 그림자 비슷하게 만드셨다. 빛이 멀어져 그림자가 사라지면 누가 그것을 판단하랴?”라고 했다. 실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힘으로 신의 숭고함을 알아보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 창조주의 작품들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그분의 특징을 가장 잘 지니고 있으며 가장 확실하게 그분에게 속한 것들이다. 믿을 수 없는 무엇과 만나는 것, 그리스도인들에겐 그것이 바로 믿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이 인간의 이성에 위배될수록 그만큼 더 이치에 맞는 것이다. 이성에 합치되는 것이라면 이미 기적이 아니니까. 또 전례가 있는 일이라면 이미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무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된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275~276쪽)
우리는 권능, 진리, 정의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것은 위대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낱말들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우리는 전혀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 염려하고, 하느님이 노여워하고,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불멸의 것들을 필멸의 어휘들로 표현하며.
_루크레티우스(276~277쪽)
지혜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인데, 지혜가 어떻게 어떤 악도 가 닿을 수 없는 그분과 어울리겠는가? 하느님에게 희미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희미한 것들을 명백하게 보기 위해 사용하는 이성과 지성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정의란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사회와 인간 집단을 위해 생겨난 것인데, 그것이 어찌 하느님 안에 있겠는가? 절제가 어떻게? 그것은 하느님의 신성 안에 결코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육체적 쾌락의 조절인데? 고통, 노고, 위험을 견디기 위한 용기 역시 이 세 가지가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과는 거의 무관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덕에도 악덕에도 똑같이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본다.(277쪽)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우리의 추론이나 이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부과된 권위와 명령에 의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우리 판단력의 힘보다는 허약성이, 우리의 통찰력보다는 우리의 맹목성이 도움이 된다. 우리의 지식보다 우리 무지의 중개로 우리는 이 거룩한 학문의 학자가 된다. 우리의 자연적이고 지성적인 수단들로서 이 초자연적인 천상의 지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복종과 순종을 바치자.(278쪽)
내가 알아봐야 할 것은 결국 인간에게 그가 찾는 것을 발견할 힘이 있는가, 그토록 오랜 세기를 두고 거기에 바친 탐구의 결과로 인간이 어떤 새로운 능력이나 견고한 진리를 얻어 부유해졌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양심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오랜 추구에서 얻어 낸 것이라고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줄 알게 된 것뿐임을 고백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안에 본래적으로 있는 무지, 그것을 우리는 오랜 연구로 확인하고 증명했다.(279쪽)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진리를 알았다거나 진리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사물들을 알아낸다기보다는 열어보는 것이요.”[페레키데스](280쪽)
뭔가를 찾는 사람은 그것을 찾았다거나, 그것이 찾아지지 않는다거나, 또는 아직도 찾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다. 모든 철학은 이렇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철학의 목표는 진리, 지식, 확실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파, 에피쿠로스파, 스토아파 등은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학문들을 세우고 그것을 확실한 지식으로 다루었다 클리토마쿠스파, 카르네아데스파, 그리고 아카데미아파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탐구에 절망해 진리란 우리가 가진 수단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결론,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이요 무지이다. 이 파는 가장 많은 신봉자, 가장 고상한 신봉자들을 거느렸다.
퓌론과 다른 회의주의자들 또는 신중론자들―많은 고대의 저자들은 이들의 학설이 호메로스, 칠현, 아르킬로코스, 에우리피데스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며, 거기에는 제논, 데모크리투스, 크세노파테스도 연결시킨다―은 아직 진리를 찾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진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무한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확언하는 두 번째 단계에도 역시 건방진 허영이 있다고 판단한다. 우리 역량의 척도를 세우고 사물의 난제를 알고 판단하는 것, 그것 자체가 대단한, 최고의 지식인데 인간에게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확언할 수 있을지도 알지 못한다.
_루크레티우스
자기를 알고,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가 무지하다고 판결할 수 있는 무지는 완전한 무지가 아니다. 완전한 무지이려면 무지 자체도 몰라야 한다. 그래서 퓌론파는 망설이고, 의심하고, 묻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정신의 세 가지 기능, 즉 인지력, 감지력, 판단력 중에서 처음 두 가지는 용인하지만 마지막 것은 보류하고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벼운 일이라도 이쪽이건 저쪽이건 어느 한편으로 기울거나 동의하지 않고 말이다.(282~283쪽)
자신의 판단에 대한 퓌론파의 이런 입장, 즉 판단도 동의도 없이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는 곧고도 단호한 태도는 그들을 아타락시아(평정)로 이끈다. 이 아타락시아는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견해와 지식이 주는 인상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동요에서 벗어난, 평화롭고 고요한 생활의 조건이다. 그 동요에서 두려움, 인색, 시기심, 무절제한 욕망, 야심, 오만, 미신, 새것에 대한 애호, 모반, 불복종, 고집, 그리고 육체적인 악이 대부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입장 때문에 그들의 학설이 불러일으킬 경쟁심에서도 벗어난다. 그들은 아주 물렁한 방식으로 논쟁하기 때문이다.(284쪽)
“나는 아무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 또는 그렇지도 이렇지도 않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디서나 다 똑같다. 맞다고 하건 아니라고 하건 매일반이다. 참처럼 보이는 것치고 거짓으로 보일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섹스투스 엠피리쿠스)
그들의 금과옥조는 ‘에포케(epoche)’, 즉 ‘나는 유보한다, 움지기잊 않는다.’이다. 이것, 그리고 같은 내용의 말들이 그들의 후렴구이다. 그들의 목표는 순수하고 완전 완벽한 판단 정지, 판단 유보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성을, 확정하고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하고 논박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어떤 경우에나, 끊임없이 무지를 고백하고, 기울거나 쏠림도 없이 판단하려는 입장을 상상해보면 누구나 퓌론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역량껏 이 사상을 설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여기고, 이 학파의 저자들 또한 좀 모호하고 번잡스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287쪽)
그는 돌멩이나 나무 토막이 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성찰하고 추론하고, 자연이 부여한 모든 쾌락과 편익을 즐기며, 육체와 정신의 모든 기능을 올바르고 유용하게 사용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고자 했다. 진리를 좌지우지하고 포고하고 수립한다는, 인간이 멋대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그 망상적이고 공상적인 가짜 특권, 그것을 그는 진심으로 포기하고 버렸을 뿐이다.(288쪽)
지적 활동 중에는 지식보다 가정에 의지한다고 공언하는 것, 옳으냐 그르냐를 결정짓지 않고 그저 그럴 것 같은 것을 따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퓌론주의자들은 말한다. 세상엔 참과 거짓이 있고, 우리에겐 그것을 탐구할 능력은 있지만 그것들을 판정할 시금석 같은 것은 없다고. 따지고 들 것 없이 세상의 질서가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겨 두는 편이 우리에겐 더 낫다. 편견에서 벗어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평정을 향해 놀라운 진전을 이룬 것이다. 자기의 판관들을 판단하고 검사하는 사람들은 결코 제대로 순응하는 법이 없다. 종교의 율법에서나 정치적인 법률에서나, 거룩한 명분이며 인간적인 명분을 감찰하며 교사연하는 사람들보다는 단순하고 호기심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순하고 이끌기 쉬운가!(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