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점점 선선해지기 시작합니다.
슬슬 가을로 들어서는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아침에 앉아 맞이한 몽테뉴의 구절들은 너무나 멋집니다.
회의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문장들, 드디어 몽테뉴의 좌우명이 등장했습니다.
"내가 뭘 아는가?" 나는 이 질문을 저울 그림과 함께 새겨 지니고 다닌다.
흥미롭게도, 몽테뉴는 세계의 본질을 각자의 개념으로 표현한 고대철학자들이 그들의 앎을 확신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훈련 중입니다. 추측하고 그 추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세계를 보는 틀을 만드는 연습을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를 세워 보려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 공부의 훈련 삼아 하는 일이다."
정말로 놀랍고도 다정한 시선입니다.
또한 한참 신들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인 표상을 지적합니다.
그는 벼룩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신들은 한 다스나 만들어놨다고 풍자하며, 이렇게 단언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신을 숭배하는 것은 우리를 만든 분을 숭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가요? 몽테뉴의 사유는 정말로 건강한 기운이 흐릅니다. 회의주의가 이렇게 멋진지 몰랐습니다.
그럼 이제 샘들이 남겨주신 필사를 보실까요?
사유의 대상들을 다양한 각도로 다루는 것은 단일한 시각으로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고, 오히려 더 좋기까지 하다. 더 풍부하고 유용하게 다루는 것이니까. 우리 자신을 예로 들어보자. 판별문은 독단적이고 결정적인 어법의 궁극점이다. 우리 재판소들은 가장 모범적인 판결문들, 주로 재판하는 인물들의 능력에 달린 재판소의 권위에 대해 백성들에게 마땅히 품어야 할 경의를 키워 주기 적합한 판결문들을 사람들 앞에 제시한다. 그런데 그 판결문들의 진미는, 판사들에겐 진부한 일이어서 누구라도 내릴 수 있는 판결 자체보다, 온갖 상반된 추론들이 부딪히는, 사법 분야가 허용하는 토론과 동요에서 나온다.
그리고 한 학파가 다른 학파를 상대로 싸울 때 가장 많은 비난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양쪽 모두 제각기 발목이 잡혀 있는 모순과 의견의 불일치들이다. 어떤 문제를 다루건 인간 정신은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들추어서건, 아니면 저도 모르게 사물의 근본적인 유동성과 모호성에 몰려서건 말이다.
“미끄럽고 유동하는 자리에선 우리의 신념을 유예하자.”라는 후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우리피데스가
신의 활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곤란에 빠뜨린다.
_아미오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의 인용
고 했듯이, 엠페도클레스가 그의 책에서 자주 거룩한 분노에 뒤흔들리고 진리에 승복한 듯, “아니,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겐 불가사의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확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그 후렴은 “인간의 생각은 애매하고, 그의 예견과 고안은 불확실하다.”는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온다.(295~296)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이 느껴지는 무화과를 먹고 나서 불현듯 어째서 전에 없던 단맛이 나는지 궁금해졌다.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 그 무화과를 딴 자리를 살펴보러 갔다. 하녀는 그가 그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를 듣고 웃으면서 그걸 가지고 더 이상 고심할 것 없다고 했다. 바로 그녀가 그 열매들을 꿀단지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그는 탐구해 볼 기회를 박탈당하고 호기심 거리를 빼앗긴 것에 분통이 터졌다. “물러가라, 꼴 보기 싫다. 그래도 난 그것이 본래 그런 것처럼 여기고 원인을 찾아볼 테다.” 그리고 이 그릇된 가정 위에 세운 가짜 현상의 다소 그럴싸한 원인을 기어이 찾아냈다.(296~297쪽)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오락 때문일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맛있는 것이 모두 늘 영양가 있고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다. 그와 꼭 같이 학문에서 우리의 정신이 끌어내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양분이나 유익함은 없을망정 여전히 쾌락은 준다.(297쪽)
“이 체계들은 각 철학자의 천재성이 만들어 낸 허구이지, 그들이 발견한 결과는 아니다.”(세네카) 철학 합네 하면서 정작 견해를 내놓을 땐 별로 철학적이지도 않다고 비난받은 한 고대인은 그게 바로 철학하는 일이라고 대꾸했다.(298쪽)
이 학파는 진리를, 저 학파는 효용성을 더 추구했음을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더 명성을 누리는 쪽은 후자이다. 인간 조건의 골칫거리는 흔히 우리 생각에 가장 진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보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대담한 학파들, 에피쿠로스파, 퓌론파, 신아카데이마파도 종국에는 국가의 법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다.
누구는 왼쪽으로 누구는 오른쪽으로, 그들이 키질하듯 까부르는 다른 문제들도 있는데, 저마다 옳건 그르건 무슨 모양새를 주어 보려고 애쓰고 있다. 말해 주고 싶지 않을 만큼 비밀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통찮고 어리석은 억측들을 꾸며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그들 자신도 그 억측을 토대 삼아 어떤 진리를 세워 보려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 공부의 훈련 삼아 하는 일이다. “그들은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주제의 난해함을 이용해 자기 정신을 훈련시키려고 글을 썼던 것 같다.”(쿠인틸리아누스)(299~300쪽)
인간 정신은 그 무한한, 형체 없는 관념들 속을 계속 떠다니며 유지될 수 없다. 형체 없는 생각들은 인간 자신을 견본 삼아 어떤 형상으로 정리해줘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존엄성은, 어떤 점에선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형상적 한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의 초자연적인 천상 성사(聖事)에는 우리의 지상적인 조건들의 표지가 붙여졌다. 하느님에 대한 숭배는 보고 들을 수 있는 예배와 언어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믿고 기도하는 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301~302쪽)
하지만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다 알 텐데도, 인간 조건을 지닌 신들을 만들어 욕망, 분노, 복수 결혼, 생식, 혈연 관계, 사랑과 질투를 부여하고, 우리의 사지와 뼈, 우리의 열병과 쾌락, 우리의 죽음, 우리의 무덤 등을 주는 것은 인간 오성의 놀라운 자기 도취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다.(307쪽)
세상의 풍속과 관계들이 하도 혼잡하고 보니, 우리 것과 다 가지각색의 풍습과 사고방식도 내게는 불쾌하기보다는 교훈이 된다. 그것들을 비교해 보며 나는 오만해지기보다는 겸손해진다. 내게는 하느님의 손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닌 선택은 어떤 것이든 특별히 우월할 것이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본성에 반하는 해괴한 생활 양식은 논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나라들의 통치 방식은 이 문제에서 철학 학파들 못지않게 상반된다. 여기서 우리는 운수조차 우리의 이성보다 더 잡다하고 가변적이지 않으며, 더 몽매하고 분별없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307쪽)
“사람들은 신들의 얼굴, 나이, 입성, 치장을 잘 안다. 그들의 혈통, 결혼, 동맹 등 모든 것이 인간의 결함을 모델로 해서 제시된다. 신들에게 마음의 혼란까지 부여하니 말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들의 열정, 비탄, 분노 따위를 이야기해 준다.”(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의 인용) 성실, 미덕, 명예, 조화, 자유, 승리, 경건뿐 아니라 쾌락, 기만, 죽음, 시기, 노쇠, 가난, 공포, 열병, 불운과 덧없이 쇠망하는 우리 인생의 온갖 풍상에까지 신성을 갖다 붙였듯이.(308쪽)
“그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쾌락이 내가 이승에서 느낀 그런 것들이라면, 그것은 무한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나의 타고난 오감 전부가 환희로 가득하고 내 영혼이 바라고 갈망할 수 있는 최대의 만족감에 사로잡힌다 해도 우리는 안다. 그 역시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는 것을. 내 것인 뭔가가 있다고 해도 거기에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 우리가 지닌 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멸할 인간의 모든 만족은 멸할 수밖에 없다.(310쪽)
그럴 수 있게 해주려고 누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말하는 그 ‘정화’를 통해), 그것은 너무도 극단적이고 총체적인 변화일 것이므로, 자연학의 학설을 따르자면 더 이상 우리가 아닐 것이다.
격전의 한복판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스의 말에 끌려다닌 그 시신,
그것은 더 이상 헥토르가 아니었다.
_오비디우스
하느님이 준비하신 보상을 받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무엇일 것이니,
변화가 일어날 땐 해체가, 따라서 죽음이 있다.
각 부분은 이탈하여 원래 자리에서 옮겨진다.
_루크레티우스(311쪽)
우리가 죽은 후에 시간이
우리를 형성했던 질료를 다시 모아
오늘의 상태로 복원해 주고,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돌려준다 해도,
한번 기억의 실이 끊어진 다음엔
그조차 우리와 전혀 관계없을 것이다.
_루크레티우스(312쪽)
이처럼, 눈구멍에서 뽑혀 몸에서 분리된 눈은
그 어떤 사물도 볼 수가 없다.
_루크레티우스
왜냐하면 이런 점에서 볼 때, 내세의 보상을 향유할 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우리 자신이 아닐 테니까. 우리는 본질적인 두 주요 부분으로 만들어졌고, 그 두 부분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요 파괴이니까.(312~313쪽)
그것은 우리와 아무 관계 없다.
우리는 영육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단일체이기에
_루크레티우스(313쪽)
인간은 저 자신 이외의 것이 될 수 없고, 자기 능력에 준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314쪽)
우리의 비탄으로 신의 호의를 사려 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었다. 라케데모니아인들이 디(다이)아나신에게 아부하려고 젊은 청년들을 때려 가며 고문해 자주 죽이기까지 했던 것처럼 말이다. 건축가를 즐겁게 하려고 그가 지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죄 없는 자를 벌하여 죄 지은 자 때문에 내릴 벌을 면하려 하다니 참으로 야만적인 생각이다. 가련한 이피게네이아가 아울리스 항구에서 죽어 제물이 되어 그리스군이 신에게 저지른 죄과를 속죄하고,
그리하여 그 순결하고 불행한 처녀는
바로 자기의 혼인날
아비의 죄 많은 손에 제물이 되었다.
_루크레티우스
데키우스 부자, 아름답고 용감한 영혼을 지닌 그 두 사람이 로마의 승리를 위해 신의 호의를 얻으려고 죽기 살기로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던 것 역시 야만적이다. “그 같은 인물의 목숨을 희생시켜야만 한다. 로마인들을 봐주시다니, 신들이 그 정도로 불의하단 말인가?”(키케로) 게다가 언제 어떻게 매질당하는지 죄인이 결정할 바가 아님도 덧붙이자. 그것을 정하는 것은 재판관이고, 재판관은 자기가 명하는 고통만을 형벌로 친다. 벌받을 자가 제 마음대로 집행하는 형을 재판관이 벌에 속한다고 여길 리 없다. 신의 보복은 그의 정의와 우리의 고통, 그 모두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아야만 성립된다.(316~317쪽)
오 인간이여, 그대가 여기 이승에서 그분 활동의 몇몇 자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치자. 그대는 그분이 당신의 능력 전부를 거기에 사용했고, 당신이 구상한 모든 형태와 당신의 사상 전부를 이 작품에 담아 놓았다고 생각하는가? 설령 그대가 볼 수 있다 한들 그대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동굴의 구조와 질서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이 관할하는 재판소는 그것을 훌쩍 넘어 무한히 펼쳐져 있다. 그 전체에 비하면 이 작은 조각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늘, 땅, 바다, 그리고 만물, 이 모든 것도
저 거대한 전체의 광대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_루크레티우스
그대가 내세우는 것은 지방법에 불과하니, 그대는 보편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는 그대가 속한 것에 전념하라, 하느님 일에 참섭하지 말고. 하느님은 그대의 동업자도 동포도 동료도 아니다. 하느님이 조금이라도 그대와 소통하는 것은 그대의 왜소함에 삼켜지기 위해서도, 그대에게 당신의 능력을 관장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의 몸은 구름 위까지 날아갈 수 없다. 그것이 그대에게 적용되는 법이다. 태양은 쉬지 않고 정해진 궤도를 달린다. 대양과 육지의 경계는 섞이지 않는다. 물은 유동적이고 견고하지 않다. 틈이 없는 벽으로는 단단한 물체가 통과될 수 없다. 인간은 불길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한꺼번에 하늘과 땅, 그리고 수많은 장소에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그대를 위해 그런 규칙을 제정했다. 그 규칙들은 바로 그대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면 그런 규칙 모두를 뛰어넘으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 주셨다. 사실 무엇 때문에 그분처럼 전능하신 분이 당신의 능력을 어떤 기준에 매어 두셨겠는가? 누구를 위해 당신의 특권을 포기하셨겠는가? 다른 일에서도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그대에게 납득시킬 때 이상으로 참되고 견실할 수 없다.
땅, 태양, 달, 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일하기는커녕 무한수로 존재한다.
_루크레티우스
과거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우리 시대의 어떤 이들도 인간 이성으로 볼 때 그래 보이므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눈으로 보는 이 건축물에는 유일하고 하나인 것이 하나도 없고,
사물 전체 안에 자기 종의 유일자로 존재하는 것,
단독으로 태어나 단독으로 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_루크레티우스(320~321쪽)
우리가 자연에 만들어 붙인 그 멋진 규칙들에 어긋나는 것들이 우리가 아는 것 중에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하느님까지 거기에 갖다 붙일 셈인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자연에 반하는 일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개개인과 각 나라가 그 무식한 정도에 따라 하는 일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신비로운 속성이며 불가사의한 진수를 만나는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란 우리의 지력이 따라갈 수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해할 만한 일일 뿐이요,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괴상하고 기이한 것이기 때문이다.(323~324쪽)
자연에는 오직 의심만이 있을 뿐이라고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우시파네스는 우리 눈에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들 중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유일한 확실성은 불확실성뿐이라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보편적인 것은 없고 ‘하나’만이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제논은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고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가 존재한다면 그 자체에, 또는 다른 것에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에 존재하면 둘이 될 것이다. 그 자체에 존재한대도 품고 있는 것과 담긴 것이 있으니 여전히 둘이다. 이런 이론을 따라가자면, 세상은 가짜이거나 공허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325쪽)
나는 퓌론파 철학자(회의주의자)들이 어떤 어법으로도 그들의 전체적인 사상을 표명하지 못하는 까닭을 잘 안다. 그러자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할 것이다. 사실 우리 언어는 모두 긍정적인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긍정 명제는 그들의 사상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는 의심한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그들의 멱살을 잡아서, 적어도 의심한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는 걸 고백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의술의 비유 속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비유가 아니면 그들의 성향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모른다.” 또는 “나는 의심한다”고 말할 땐 마치 대황이 나쁜 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하면서 저 자신도 몸 밖으로 나와 버리는 것과 꼭 같이, 그 명제 자체도 다른 것들과 더불어 부정된다고.
이 사상은 “내가 뭘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더 잘 표현될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을 저울 그림과 함께 새겨 지니고 다닌다.(326~327쪽)
자연은 연관된 사물에서는 동일한 관계가 성립되게 한다. 그러므로 죽을 인간의 수효가 무한하다는 것은 영생불멸의 존재들의 수도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죽이고 해를 끼치는 것들이 무한히 많다는 것은 보호하고 돕는 것들도 그만큼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혀도, 눈도, 귀도 없는 신들의 혼령이 그들끼리 각자 다른 신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각을 판단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졸음 또는 어떤 혼탈에 의해 육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땐 육체와 섞여 있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을 점치고 예언하며 본다는 것이다.(330쪽)
가엽게도 우리 자신이 꾸며 낸 원숭이 짓에 우리가 넘어가서,
자기가 상상한 것에 겁을 먹다니,
_루카누스
마치 동무의 얼굴에 제 손으로 색칠을 하고 검댕을 묻히고서 바로 그 얼굴에 질겁하는 어린애들 같다. “자기 망상에 노예가 된 인간보다 더 가련한 것이 어디 있는가?”(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만들어 낸 신을 숭배하는 것은 우리를 만든 분을 숭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331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가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감각을 가졌다. 감각을 가졌다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에게 육체가 없다면 영혼도 없을 것이요, 따라서 행동도 없다. 육체를 가졌다면 그는 멸할 것이다. 이만하면 이긴 것 아닌가?”(332쪽)
“영혼도 이성도 없는 것은 그 무엇도 이치를 따질 줄 아는 생명체를 생산할 수 없다. 우주는 우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우주는 영혼과 이성을 갖고 있다.”(333쪽)
“참으로 인간들은 자기가 알 수 없는 신을 떠올린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떠올릴 뿐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 신이 아니다. 그들은 신을 신이 아니라 저 자신에 빗대어 생각한다.”(아우구스티누스)(334쪽)
대제사장 스카이볼라와 대신학자 바로가 그들 시대에 이 문제를 고찰하면서 이렇게 변명한다. 민중은 많은 진실을 모르고 많은 허구를 믿을 필요가 있다고. “민중은 자기를 해방시켜 줄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들의 종교는 그의 안녕을 위해 속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우구스티누스)(341쪽)
학문이 하늘에만 밧줄과 기계와 톱니바퀴를 던져 보는 것은 아니다. 학문이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구조에 대해 하는 말을 좀 살펴보자. 그들이 이 가련하고 작은 인간의 몸을 두고 꾸며 낸 것보다 더한 역행, 요동, 접근, 후퇴, 반전은 하늘의 별들과 천체의 운행에도 없다. 진실로 이 점에서 그들은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할 만했다. 인간을 꿰맞춰 만드는 데 그렇게도 많은 조각과 모습을 사용했으니. 인간이 보여주는 동작들, 우리가 의식하는 다양한 기능과 역할에 맞춰 보려고 그들은 얼마나 많은 부분으로 우리 영혼을 나누고, 얼마나 많은 부위로 잘라 놓았는가? 자연스럽고 지각 가능한 만큼을 넘어 얼마나 많은 단계와 층으로 이 가엾은 인간을 분해했던가? 얼마나 많은 직무와 직분으로? 그들은 이 인간을 공상적인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그들이 손에 쥐고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각자 제 멋대로 인간을 해체하고, 정리하고, 조합하고, 채워 보도록 전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간을 손에 넣지 못했다. 현실뿐 아니라 공상 속에서도 그들은 인간을 장악할 수 없다. 아무리 공상적인 인조 조각들을 수없이 이어 붙여 거창하기 그지없는 건축물을 만들어도 반드시 거기서 빠져나가는 어떤 박자, 어떤 음이 있기 때문이다.(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