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고 있고, 저희는 몽테뉴의 지혜 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오늘 든 생각은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참 따뜻한 회의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심하고 확신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감을 달리하는 앎들을 품을 수 있는 넓은 그릇입니다.
몽테뉴에게서는 고대의 사상이나 발견들, 논박되고 개선된 지혜와 경구들도 모두 제 나름의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의 학문을 최고로 여기지 않기에, 과거의 지혜에도 미래의 지혜로도 열려 있습니다.
이런 건강한 회의주의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역시 그의 진솔함인 듯 합니다.
이런 문장들은 담백하지만 눈부십니다.
한 사람이 실패한 것에 다른 자는 도달하고, 어떤 시기에 모르던 것을 다음 세기가 밝혀 내며, 지식과 기술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마치 곰이 꾸준히 핥아 새끼들의 모습을 다듬어 주듯 조금씩 매만지고 손질해야 형태를 갖게 되고 모양이 잡힌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힘으로 밝혀 내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고 시험하기를 그치지 않는다.(385쪽)
나 자신이 쓴 글에서조차 처음 생각했을 때의 기분을 늘 상기하진 못한다.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나았던 처음 생각을 놓쳐 버리고 고쳐서 새로운 의미를 주려고 손가락을 물어뜯는 일이 잦다. 나는 오락가락할 뿐이다. 내 판단력은 늘 전진하진 않는다. 허공을 떠다니고 표류한다.(394쪽)
진솔함이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재미난 관찰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경직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화났을 때 우리 의견을 더 열렬히 옹호하고 마음에 새겨 넣으며, 지각이 냉철하고 침착할 때보다 훨씬 뜨거운 동의로 그 사상을 품어 안는다.(395쪽)
나는 저 밀레토스의 여자아이를 기특하게 여긴다. 그 애는 철학자 탈레스가 줄곧 하늘을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항상 눈을 치뜨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다니는 길에 어떤 물건을 갖다 놓아 발에 차이게 했다. 자기 발밑에 있는 것부터 알고 난 후 구름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색을 즐기라는 경고였다. 하늘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346쪽)
사람들은 모두가 믿는 것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 이 진리를 그것의 모든 기초와 거기 달려 있는 모든 논거며 증거들과 함께, 더 이상 흔들 수 없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견고한 물체처럼 받아들인다. 왈가왈부는커녕 저마다 그렇게 받아들인 신념에 회를 덧바르려고, 그것을 더욱 강화하려고 자기가 가진 이성의 힘을 총동원해서 다툰다. 그런데 이성이란 마음대로 휠 수 있고, 무슨 모양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말랑말랑한 도구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잡담과 거짓으로 채워지고 그것에 푹 절여진다.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들을 결코 시험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류와 약점이 깔려 있을 뿌리 쪽은 전혀 파헤쳐 보지 않고, 가지들만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그것이 참인가는 묻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만 따진다. 갈레노스가 귀담아들을 만한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말했는지 저렇게 말했는지만 따진다. 이러니 우리 판단의 자유에 대한 굴레와 속박, 우리가 지닌 신념들의 전제적 지배가 철학 학파들과 기예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349쪽)
공인된 토대 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짓는 것은 아주 쉽다. 기초로 주어진 원칙과 규정에 따라 나머지 부분들을 축조하는 것은 모순 없이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논리가 탄탄하다고 여기고, 아주 편하게 사설을 늘어놓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공리(公理)로 미리 신임을 얻어 두는 기하학자들식으로, 우리 스승들도 자기들이 원하는 바대로 결론을 내리는 데 필요한 우리 신뢰를 선점해 잡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바치는 우리의 찬성과 동의가 우리를 왼쪽 오른쪽으로 끌며 그들 마음대로 공중제비를 돌게 할 수단을 준다. 우리가 누군가의 전제를 믿으면 그는 우리의 스승이요 신이다. 그는 널찍하고도 용이한 발판을 얻을 것이요, 그것에 힘입어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구름 위에도 올라가게 할 것이다.
학문의 이런 실행과 흥정에서 “각각의 전문가는 자기 기술(art)에서 신뢰를 얻어야 한다.”라는 퓌타고라스의 말을 우리는 현찰처럼 받아들였다.(350쪽)
인간이 제시하는 모든 전제 공리, 모든 명제는 이성이 그것들을 구별해 주지 않는 한 모두 똑같은 권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들 모두를 저울질해봐야 한다. 우선 보편적인 것들, 그리고 우리를 억압하는 것들을. 확실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광증이나 극도의 불안을 드러내는 지표이다.(351쪽)
대지와 대양, 심원한 하늘,
신이 어디나 가득 채우고 있으니,
크고 작은 짐승과 인간, 들짐승까지,
결국 모든 존재는 그에게서 정묘한 생명의 요소들을 빌려서 태어난다.
그러다 일단 해체되면 그 모든 요소들은 돌아가 그에게 귀의하니,
죽음을 위한 자리란 없다.
_베르길리우스(362쪽)
영혼의 힘과 효력이 고찰되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에게서다. 여기서 발휘되지 않는 다른 모든 장점은 모두 헛되고 쓸모없다. 영혼의 불멸성은 그것의 현상태에서 인정되고 주어져야 하며, 오직 인간의 삶에서만 현금 가치를 지닌다. 영혼에게서 수단과 힘을 박탈해 무장 해제시켜 놓고서, 포로가 되어 감금되었던 나약하고 병들었던 시간, 어쩔 수 없이 강제되어 속박받았을 시간에서 무한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의 심판과 판결을 끌어내는 것, 아마도 한두 시간, 기껏해야 한 세기밖에 안 되고 무한에 비하면 한 순간밖에 되지 않는 너무도 짧은 시간만 집중해서 고려하는 것, 이 사잇순간을 가지고 영혼의 온 존재를 결정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365쪽)
인간은 자기 존재를 연장하려고 노심초사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준비해 두었다. 신체의 보존을 위해서는 무덤이 있고, 이름의 보존을 위해서는 영광이 있다.
타고난 운수를 참지 못하는 그는 머리를 쥐어짜서 자기 패를 바꿔 보려 하고, 온갖 술책으로 자기 자신을 후원하려 했다. 영혼은 근심과 유약함으로 인해 제 발로 서 있을 수 없어서 사방에서 위안을 찾는다. 들러붙어 뿌리를 박을 곳, 희망과 든든한 기반을 찾을 수 있는 다른 환경은 어디 없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경박하고 꿈같은 것일망정 공상으로 그런 환경을 꾸며 보여주면, 영혼은 저 자신보다 거기서 더 안심하며, 더 기꺼이 평안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 정신의 불멸성이라는 그토록이나 정당하고 명백한 신념을 가장 완고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그것을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 입증하는 데는 얼마나 턱없이 부족하고 무능력한지 놀랄 지경이다. “그것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몽상이지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 아니다.”(키케로)라고 어느 고대인은 말한다. 이 증언을 통해 인간만이 그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운수와 우연의 덕택이었음을 시인할 수 있다. 진리가 그의 손에 떨어졌을지라도, 그에게는 그것을 파악하고 유지할 수단이 없고, 그의 이성은 그 진리를 이용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사유와 능력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은 옳건 그르건 간에 불확실성과 논쟁에 매여 있다. 하느님이 바벨탑에 혼란과 혼동을 야기한 것은 우리의 오만을 벌하고, 우리의 비참과 무능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그분의 도움 없이 우리가 도모하는 모든 일, 그분 은총의 등불 없이 우리가 보는 모든 것, 그것은 허망이요 망상일 뿐이다. 운수 덕택에 진리를 소유하게 되어도, 우리는 한결같고 영속적인 진리의 본질 그 자체를 우리의 허약함으로 부패시키고 타락시킨다. 인간이 제 딴으로 어떤 길을 취하든, 하느님은 인간이 항상 그 같은 혼란에 봉착하게 하신다. 그로써 그분은 당신이 니므롯의 오만을 꺾고, 자기를 위해 피라미드를 지으려던 헛된 시도를 흩어 버림으로써 보여 주셨던 그 정당한 벌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현자들의 지혜를 부수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코린트1> 1장. 19절) 그분이 바벨탑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한 방언과 언어의 잡다성이란, 인간의 지식이라는 허망한 건축물을 따라다니며 그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쟁, 사상과 논리의 불일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한 톨의 지식이라도 갖게 된다면 무엇이 우리를 말릴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에 대한 지식을 감추는 어둠은 겸손에게는 훈련이요, 오만에게는 재갈”(아우구스티누스)이라고 말한 성인은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우리의 맹목과 어리석음은 대체 어느 정도의 오만방자함까지 우리를 끌고 갈 것인가?(372~373쪽)
정신은 보호 감독 하에 두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분별 있게 잘 사용할 줄 모르면 정신은 그 소유자 자신에게도 위험한 칼입니다. 제 발걸음 앞만 보도록 시선을 비끄러매고 관습과 법률이 그려 주는 궤도 밖으로 이탈하여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의 눈가리개 같은 것을 씌워 주기에 사람보다 적합한 짐승은 하나도 없습니다.(383쪽)
한 사람이 실패한 것에 다른 자는 도달하고, 어떤 시기에 모르던 것을 다음 세기가 밝혀 내며, 지식과 기술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마치 곰이 꾸준히 핥아 새끼들의 모습을 다듬어 주듯 조금씩 매만지고 손질해야 형태를 갖게 되고 모양이 잡힌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힘으로 밝혀 내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고 시험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새로운 재료를 다시 주물러 매만지고 휘젓고 데워서 내 뒤에 오는 이가 좀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게 보다 편한 길을 열어주고, 보다 부드럽게, 또 다룰 만하게 만들어 준다.
휘메토스의 밀랍이 햇볕에 물러지고
엄지손가락에 이겨져서
여러 형태를 갖추고
쓸수록 더 유용해지듯이.
_오비디우스
다음 사람은 세 번째 사람에게 똑같은 일을 해 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렵다고 해서 절망할 것도, 나의 무력에 낙담할 것도 없다. 그것은 나의 무력함일 뿐이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못하듯이 무엇이건 할 수 있다.(385~386쪽)
사물이 제 모습, 제 본질 그대로 우리 안에 깃들지 않으며 제 힘과 권위로 거기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한다. 만일 그 자체로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테니 말이다. 술은 병자의 입에나 건강한 자의 입에나 같은 맛일 것이다. 손가락이 트거나 곱은 사람도 나무나 쇠를 달룰 때 다른 사람과 똑같이 딱딱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외부의 사물들은 우리의 처분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에 맞추어 우리 안에 깃든다.
그런데 만일 우리 편에서 어떤 것을 변질 없이 받아들인다면, 인간에게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고 확고하다면, 그리고 그 방법들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면, 그 진리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이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믿는 것이 세상에 있는 이 많은 사물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논쟁이나 논박의 대상이 될 수 없거나 논쟁과 논박일 수 없는 명제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타고난 판단력이 무엇을 파악해도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내 판단력은 자기가 파악한 바를 내 친구의 판단력이 받아들이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는 내가 그것을 나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자연적인 능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파악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다.(388~389쪽)
우연이 우리의 입장을 500번이나 바꿔 놓아도, 그것이 하는 일이란 게 마치 항아리에 담듯 우리 믿음에 이런저런 견해를 채워 넣었다 비웠다 하는 것뿐인데도, 언제나 지금, 이 마지막 견해가 확실하고 오류 없는 견해이다. 그 견해를 위해서는 재산, 명예, 생명, 구원,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마지막 착상이 앞선 것들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정나미 떨어지게 한다.
_루크레티우스(390쪽)
아주 가벼운 상황에 자극을 받아 그리도 쉽게 쏠리고 뒤틀리는 것들이니만큼, 이 연장들이 자기 판단을 번복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 판단, 그리고 우리 영혼의 여러 기능이 대체로 신체의 동작이나 변화에 영향을 받으며, 그 변화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확실하다. 병에 걸렸을 때보다 건강할 때 우리 정신은 더 또렷하고, 기억력은 더 신속하고, 사고는 더 싱싱하지 않은가? 기쁘고 유쾌할 때는 슬프고 우울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 영혼에 제시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던가? 카툴루스나 사포의 시가 혈기 방자한 젊은이에게처럼 인색하고 시무룩한 늙은이에게도 재미있을 것 같은가?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가 병에 걸렸을 때, 친구들은 그의 기분이며 생각이 평소와는 딴판이라며 나무랐다. 그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왜냐하면 나는 건강할 때의 내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이니까 생각과 견해도 다르지.”(391쪽)
열병이나 술, 큰 사고만이 우리 판단을 뒤집어엎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일들이 우리 판단력을 돌게 한다.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계속되는 열병이 우리 영혼을 때려눕힌다면, 간헐적으로 열이 나는 학질도 정도에 비례해서 영혼에 어떤 손상을 입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뇌졸중이 우리 지성의 눈을 완전히 감기고 사라지게까지 한다면, 감기가 그것을 눈멀게 할 리 없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평생에 단 한 시간이라도 우리의 판단력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신체는 계속해서 너무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으므로 어느 때건 탈 난 것이 하나도 없기란(이 점에서는 의사들을 믿는 바이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392쪽)
나는 각자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는 논리 비슷한 것을 여전히 이성이라 부르고 있다. 같은 주제를 둘러싸고 백 가지 상반된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성, 그것은 늘이고 구부려서 어떤 관점, 어떤 척도에나 적응시킬 수 있는 납과 밀랍으로 된 도구이니, 그것을 주물러 꿰맞출 능력만 있으면 된다. 재판관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자기 마음을 잘 챙기지 않으면(그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정, 인척 관계, 미모, 복수심에 기우는 마음, 또 그다지 비중이 큰 일이 아니라도, 이것을 저것보다 선호하게 만들어, 이성의 허가 없이 비슷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우연한 충동이나 그 비슷하게 헛된 기미까지도, 소송 사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암시를 그의 판결에 스며들게 해 저울대가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393쪽)
책을 읽노라면 어떤 구절에서 지극히 우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명받지만, 다른 때에 다시 그것을 읽게 되면 아무리 돌려 보고 훑어 봐도, 접어 보고 만져 봐도, 처음 보는 허접스러운 뭉치일 따름이다.
나 자신이 쓴 글에서조차 처음 생각했을 때의 기분을 늘 상기하진 못한다.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나았던 처음 생각을 놓쳐 버리고 고쳐서 새로운 의미를 주려고 손가락을 물어뜯는 일이 잦다. 나는 오락가락할 뿐이다. 내 판단력은 늘 전진하진 않는다. 허공을 떠다니고 표류한다.(394쪽)
내가 곧잘 하게 되는 일로, 연습 겸 재미 삶아 내 의견과 반대되는 견해를 주장하다 보면 내 정신은 거기에 몰두해 그편으로 돌아서며 나를 얼마나 잘 그쪽에 갖다 붙이는지, 내가 왜 첫 번째 의견을 가졌더랬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어 그것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요컨대 나는 어떤 쪽이건 내가 몸을 기우는 쪽으로 쏠려 나 자신의 무게에 딸려 가는 것이다.(395쪽)
설교가들은 말하면서 일어난 감정이 자기들을 더욱 열렬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화났을 때 우리 의견을 더 열렬히 옹호하고 마음에 새겨 넣으며, 지각이 냉철하고 침착할 때보다 훨씬 뜨거운 동의로 그 사상을 품어 안는다.
그대가 변호사에게 단순히 어떤 소송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고 하자. 그는 망설이며 자신 없게 대답한다. 그대는 느낀다. 그로서는 이쪽을 변호하건 저 쪽을 변호하건 상관없다는 것을. 그가 흥분해서 그 소송을 덥석 물 만큼 충분한 돈을 지불했는가? 그가 그 사건에 얽혀 들기 시작하고 그의 의지가 달궈지기 시작했는가? 그러면 그의 이성과 그의 지식도 달아오른다. 드디어 명백하고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그의 오성 앞에 나타난다. 그는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광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확신한다.
권위나 위기 상황의 압박과 폭력에 대항하는 울분과 고집에서 나온 격한 감정, 또는 평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사람을, 친구들과 자유롭게 있을 때라면 손가락 끝도 지지게 하지 않았을 사상을 화형대까지 불사하며 지지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3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