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어느새 몽테뉴와 함께 하는 아침이 세 번째 계절로 접어들었습니다.
아침이 쌀쌀해지고 해가 점점 늦게 뜨는 게 느껴지네요!
<에세> 2권도 반을 넘겼고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도 슬슬 마무리 되어가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우직한 질문으로 회의주의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성에 충실한 플라톤주의도 감각에 충실한 에피쿠로스주의도 넘어서 가는 몽테뉴.
그는 이성은 감각의 효과이며, 동시에 감각 또한 언제나 감각된다는 한계 안에 있음을 명시합니다.
"
우리 능력을 초월하는 동물들의 여러 행동은 우리에겐 없는 어떤 감각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 때문에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보다 더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아는 게 뭔가?"
라고 물으며, 감각에서 기원하든 이서에서 기원하든 우리에게 정리된 앎을 되묻는 고귀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번에도 유럽 너머의 세계를 묘사하는 재미난 이야기들도 넘치구요!
필사로 획인해주세요!
철학이 인간들을 평가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광분해 정신이 나갔을 때 가장 위대하고 신성에 가까운 업적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좀 대담한 면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성이 제거되거나 마비되었을 때 개선된다. 신들의 방에 들어가 우리 숙명의 흐름을 예견하는 두 가지 자연스러운 길은 광기와 잠이다. 이것은 재미있는 고찰거리이다. 정념 때문에 이성이 떨어져 나가면 우리는 유덕해진다. 광기나 죽음의 영상이 이성을 뽑아내 버리면 우리는 예언가나 점쟁이가 된다. 철학이 한 말 중 내가 이보다 더 기꺼이 믿는 것은 없다. 신성한 진리가 철학적인 정신에 불어 넣는 바로 그런 신기(神氣)가, 철학으로 하여금, 철학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철학이 우리 영혼에게 줄 수 있을 고요하고 차분하며 가장 건강한 상태가 우리 영혼의 최상 상태는 아님을 실토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각성 상태는 잠 잘 때보다 더 잠들어 있다. 우리의 지혜는 광증보다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의 꿈이 우리의 논리보다 낫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자리는 바로 우리 안에 있다.
한데 철학은 이 점은 생각하지 않는가? 즉 정신이란 인간을 벗어나면 매우 통찰력 있고 위대하며 완벽하지만, 인간 안에 있을 때는 엄청 세속적이고 무지하고 깜깜하다고 주장하는 그 소리, 그것 역시 세속적이고 무지하고 깜깜한 인간의 일부인 정신에서 나오는 소리요, 그래서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는 소리임을 간파할 만한 지력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398쪽)
내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정념[젊은이들의 정열]이 태어나 자라고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눈에 띄게 펄펄 살아서 나를 사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나는 느꼈다.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사물의 모습이 여느 때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갈망의 대상이 지닌 장점들이 상상의 바람에 의해 점점 더 커지고 자라나고 두터워지고 부푸는 한편 실행의 난관은 수월하고 밋밋해지며, 이성과 양심도 뒤로 물러나는 것을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이 불길이 흩어지자, 마치 번개가 번쩍한 것처럼, 일순간 내 영혼은 다시 다른 눈, 다른 상태,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번엔 후퇴의 어려움이 도저히 감당 못할 만큼 크게 여겨지면서 동일한 것들이 정욕의 열에 들떠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맛과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 둘 중 어느 편이 더 진실한지? 퓌론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한순간도 병들어 있지 않은 때가 없다. 열병은 제 열과 냉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정렬의 효과로 붕 떴다가 냉정의 효과로 다시 떨어진다.
앞을 향해 몸을 던진 만큼 나는 뒤로 튕겨 돌아온다.
그렇게 바다는 주기적인 움직임으로
때론 해안을 향해 달려와 바위를 물거품으로 뒤덮으며
모래사장의 마지막 주름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때론 빠르게 몸을 굴리던 조약돌을 썰물로 휩쓸며
수면을 낮추어 해변을 버리고 달아난다.
_베르길리우스
그런데 이런 나의 수다 번잡을 알게 되자 나는 어찌어찌 내 안에서 사고의 어떤 일관성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첫 생각들을 거의 바꾸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생각에 좋은 점이 있어 보여도 바꾸다 손해를 볼까 두려워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 것이다. 또 나는 선택할 능력이 없으므로, 남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나를 두신 자리를 고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끊임없이 굴러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가호로,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수많은 분파와 분열 속에서 양심의 동요나 혼란 없이 우리 종교의 오랜 신앙 안에서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399~400쪽)
현명한 사람도 틀릴 수 있고, 100명 또는 여러 나라 사람들, 아니 인간의 본성 자체가 수세기에 걸쳐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해 정도를 벗어나 헤매는데, 무슨 확신으로 가끔은 틀리지 않기도 한다고, 그리고 지금 이 세기엔 오류에 빠져 있지 않을 거라고 믿는단 말인가?(411쪽)
즉, 인간이란 욕심을 내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없으며, 향유는 그만두고 그저 상상과 소원으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더러 마음대로 자르고 꿰매 보라고 하라. 아마도 그것은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원할 줄도 모를 것이요, 저를 만족시키지도 못할 것이다.(411쪽)
하느님은 우리에게 부, 명예, 생명, 명예 건강까지 내려 주되, 어떤 때는 우리에게 해가 되도록 내려 주실 수도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 우리에게 언제나 이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병을 고쳐 주는 대신 우리에게 죽음 또는 병의 악화를 보내 주신다면, “당신의 막대와 회초리가 나를 위로하오니”(<시편> 22), 우리에게 마땅한 것을 우리보다 훨씬 확실하게 고려하는 그분의 섭리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413쪽)
숨어서는 얼마든지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는 감히 하려 하지 않는 우리가 ‘점잖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을 어리석음이라고 부른다. 또한 본성, 관습, 우리의 욕망이 행동을 통해 만방에 드러내는 것을 교묘하게 입 다물고 아닌 척 꾸미는 것을 악덕이라고 본다.(424쪽)
헤라클레이토스와 프로타고라스는 술이 병자에겐 쓰고 건강한 자에겐 달게 느껴지며, 노가 물속에서는 휘어 보이고 물 밖으로 나오면 곧아 보이며, 여러 사물이 그렇게 반대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에서, 모든 사물이 그같이 보일 원인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고 논증하며, 술에는 병자의 입맛에 가 닿는 어떤 쓴맛이 있고, 노에는 물 속에 있는 그것을 본느 사람에게 가닿는 어떤 굽은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따라서 어떤 것에나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곳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427쪽)
이 문제는 나를 우리의 가장 큰 근거이자 증거가 되는 감각에 대한 고찰로 이끌었다. 인식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인식의 기능에 의해 인식된다. 왜냐하면 판단은 판단하는 자의 정신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가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수단과 의지를 가지고 이 작용을 완수하는 게 당연하니까. 만일 우리가 사물들을 억지로, 그것들이 지닌 본질의 법칙에 따라 인식한다면 타인의 강압에 의해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식은 감각에 의해 우리 안에 들어온다. 감각이 우리의 주인이요,
인간의 가슴과 그 자신의 성소(聖所)에
직통으로 확신이 스며드는 길
_루크레티우스
인 것이다. 앎은 감각으로 시작되고 감각으로 끝난다. 어쨌든 우리는 소리, 냄새, 빛, 맛, 크기, 무게, 무름, 딱딱함, 거칠음, 빛깔, 매끈함, 폭,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돌멩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 지식 체계의 기반과 기본 요소들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 따르면 지식은 인지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나를 감각에 거역하게 만들 수 있는 자는 내 목덜미를 잡은 자이다. 그는 나를 그 이상으로 물러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은 인간 지식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대는 인정하리라, 감각이 우리에게 진리의 관념을 주었고,
감각의 증언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감각 아닌 무엇을 우리가 더 믿겠는가?
_루크레티우스(431~432쪽)
나는 많은 동물들이 어떤 것은 시각이, 다른 것은 청각이 없으면서도 완전하고 완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본다. 우리도 하나나 둘, 셋, 또는 여러 다른 감각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지 누가 아는가? 왜냐하면 어느 감각이 없다면 우리의 사고력은 그 결여를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의 마지막 한계라는 것이 감각의 특권이다. 감각 너머에서 감각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발견할 수도 없다.
청각이 시각을, 촉각이 청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또는 미각이 촉각을 면박할 수 있는가?
또는 콧구멍이, 또는 눈이
다른 것들더러 틀렸다고 할 것인가?
_루크레티우스
그것들 모두가 우리가 지닌 능력의 최종 한계이다.(432~433쪽)
혹시 인류에게도 어떤 감각이 없어서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 결여로 인해 우리가 사물의 면모 중 대부분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알 게 뭔가? 그 때문에 우리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알 게 뭔가? 우리 능력을 초월하는 동물들의 여러 행동은 우리에겐 없는 어떤 감각 능력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 때문에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보다 더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아는 게 뭔가?(434~435쪽)
결국 감각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고 그들은 단호히 말한다. 그러니 감각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차이와 모순을 설명할 이유들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하고, 감각을 비난하기보다는 다른 거짓과 잠꼬대를 꾸며 내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437쪽)
감각이 자기 앎의 최고 스승이라는 것을 인간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감각은 어떤 상황에서건 불확실하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결사적으로 싸우고, 나아가 정당한 수단이 없으면, 사실 그렇지만, 고집, 무모함, 뻔뻔함까지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4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