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을 읽자’ 시즌2가 시작되었습니다(너무나 늦어버린 후기 죄송합니다!!). 텍스트는 올해 초에 강의를 들었던 <창조적 진화>입니다. 다소 평범한 제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창조’와 ‘진화’를 함께 말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혁신이기도 한데요. <시론>에서 지속을 사유하며 인간 의식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물질과 기억>에서는 기억을 사유하며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을 해체했다면, <창조적 진화>에서는 지속으로서의 생명을 사유하면서 진화의 역사에서 지성의 발생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렇게 요약을 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것 보니 역시, 강의를 들어서만은 불충분하고 세미나를 하며 과제를 써야 뭐가 남는다는 것을 알겠네요^^ 서문과 1장의 일부를 읽고 모인 저희는 두 가지 구절을 중심으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흔적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와 업(業, karma)의 두 갈래
우리 삶의 각 순간들은 일종의 창조이다. 그리고 화가의 재능이 그가 만든 작품의 영향으로 형성되거나 왜곡되고, 어쨌든 변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각 상태들도 우리로부터 나오는 동시에 우리가 방금 형성한 인격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달렸다고 말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잘 따져 볼수록 그만큼 더 완벽해진다.(29쪽)
베르그손은 지속이라는 것을 더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매순간은 영화의 필름 이미지처럼 단절된 낱낱의 상태들의 합계가 아니라, 다양한 질적 차이들이 상호침투하고 물들이며 이어지는 분할불가능한 연속 흐름입니다. 우리 자신의 지속은 <물질과 기억>에서 충분히 소개했던 ‘기억’과 ‘과거’ 개념을 생각하면 훨씬 쉽습니다. “과거는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보존된다. 과거는 아마도 그 전체로서 우리를 따라온다.”(25쪽) “지속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전진하면서 부풀어가는 부단한 과정이다.”(24쪽) 이렇게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계속 갱신되는 과거-기억이 현재와 만나고 있기에(그것들은 “경향의 형태로 남김없이 우리에게 나타난다.”(26쪽)) 우리의 현재는 결코 ‘차이 없는 반복’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삶의 각 순간은 창조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헷갈리는 지점은
“이러한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을 잘 따져 볼수록 그만큼 더 완벽해진다”(29쪽)는 문장이었습니다.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란 무엇이며, 그것이 완벽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 즉 인간의 행위들을 잘 따져볼 때를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들 각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것’ 즉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잘 따져볼 때를 말하는 걸까요? 저희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는, 그냥 매번 차이 나는 채로 반복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의 현재(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우리의 성격으로서의 역사(우리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반대로 말하는 것, 우리의 기억과 가치관과 습관과 생리가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주도하고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을 평가할 때 그의 과거, 배경, 이력을 떠올리지요. 하지만 베르그손은 그 반대도 참이라고 말합니다. 즉 지금 현행적으로 나타난 ‘자기’의 행위, 생각, 모습이 우리의 과거와 성격과 신체를 만들고 있다고요. 화가의 재능은 지금 만든 작품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합니다. 즉 현재가 과거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내가 무엇인가’가 달렸다는 얘기죠. 이것이 (현재)‘자기’에 의한 (전체)‘자기’ 창조인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불교의 ‘업’(業) 개념과도 닮았습니다. 흔히 상식적으로 이야기되는 업은, 과거의 행실이 영향으로 남아 현재의 작용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업을 받아야 한다, 업보다, 라는 말은 일종의 인과응보나 숙명론처럼 사용하곤 합니다. 실제로 힌두교 문화에서는 업을 그렇게 사용해 카스트를 옹호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불교에서 업의 인과법은 과거->현재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업은 기본적으로 ‘행위’라는 뜻으로 그것은, 현재에서 넘겨받는 과거의 행이기도 하지만, 미래로 넘겨질 현재의 행이기도 합니다. 즉 지금의 행위는 과거의 결과인 동시에 미래로 넘겨지는 원인이며, 그렇기에 다음 순간에서는 과거(전체 역사)를 창조-갱신하고 있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행위는 너무나 중요하죠. 그것은 지난 행위들의 자장 안에 있지만 거기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지만은 않습니다. 조건 속에서 우리가 힘쓸 수 있는 여지, 공을 들여 가꿔갈 수 있는 자리는 바로 현재의 행위인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문제의 설탕물 : 나의 조바심은 우주의 조바심!
시간적 잇따름succession은 물질 세계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고립된 계들에 대한 우리의 추론이 그 계들 각각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가 부채 모양으로 한꺼번에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래도 이 역사는 마치 우리의 지속과 유사한 지속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설탕물 한 컵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해도[서둘러도] 소용이 없고,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작은 사실이 알려주는 바는 상당하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전체 역사가 공간 속에서 단번에 펼쳐질 때조차도 그것[물질계의 역사]에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는 저 수학적 시간은 아닌 것이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나의 조바심, 즉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도 없는 나의 고유한 지속의 몫과 일치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사유된 것이 아니라 체험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 속한다.(33~34쪽)
베르그손은 의식을 가진 한 지속으로서 존재하며 그것은 자신을 창조해내는 과정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러면]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30쪽)라고 물으며 무기체들의 지속을 사유합니다. 사실 물질적 대상들은 창조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당연히 물질도 변화하지만 “우리는 이 변화를 그 자체로서는 변화하지 않는 부분들의 이동”(30쪽)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들, 즉 쪼개질 수 있을 때까지 쪼개진 원자들의 배열 변경. 여기에는 기억도 역사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기에 계산 가능한 반복이 있을 뿐 창조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과학은 물질들의 추상적 시간t에 따른 위치변환의 함수로 정식화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마치 당구대 위의 당구공들처럼, 시간에 따른 역학적 예측이 가능해지고, “모든 과거, 현재, 미래가 공간 속에서 단번에 펼쳐진다고 가정할 수 있을지도”(33쪽) 모르게 됩니다. 완벽하게 기계적이고 결정적인 세계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시간은 동징적 물질들의 공간적 배열에 따라 발생하는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시간은 거기서 효력을 잃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76쪽)
하지만 이런 사고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대상 세계에 대응되는 수학적 시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분석 범위가 고립된 계로 제한되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립시키려고 해도 결코 기하학적 질서로 담을 수 없는 고유한 지속들이 섞여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베르그손은 ‘설탕물이 녹는 사건’을 살펴봅니다. 설탕물... 저는 이 유명한 예시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미나 시간에 집요하게 질문을 하다가(질문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만 너무 질질 끌게 되어버렸는데요(샘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질문의 요는, 왜 무기체의 지속을 설명하는 예시인데 거기서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리는 나의 조바심과 고유한 지속’이 등장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세미나 때에는 잘 모른 채로 끝나버렸지만 샘들이 해주신 말씀들이 나중에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르그손의 맥락은 물질 세계에서도 역사는 “우리의 지속과 유사한 지속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33쪽)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역학적으로 모델링 가능한 수학적 타임라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죠. 설탕물이 녹는 시간에는 조바심 혹은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 나의 시간이 얽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우리 자신의 심적 시간을 느낍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상대적인 시간, 혹은 심리적 상상이라고 간주하며 현실 시간, 즉 체험된 시간이 아니라 생각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객관적인 과학적 현실에 비해 부정확하고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착각’이나 ‘몽상’으로 평가절하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나의 조바심으로 물들어 있는 시간이야말로 설탕물이 녹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도 공상적인 것도 아닌 현실로 체험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수식으로 계산되는 수학적 용해 과정이야말로 추상이지요.
저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 지점에서 더 밀고 가야 할 것은, 여기서 베르그손이 설탕물 앞의 ‘나의 조바심’을 특권화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핵심은 물질 변화에서 수학적 시간을 정립할 만큼 고립되어 있는 계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설탕물이 녹는 사건에는 그것을 기다리는 이의 지속이 얽혀 들어가 있듯, 그 사건을 그 사건만으로 내버려두지 않는 온갖 지속들이 뒤섞이고 있습니다. 가장 외부 영향 없이 차단한 양자 실험실 내부조차도, 양자들의 거동에는 이미 그렇게 설계하고 관찰하려는 자의 의도 및 가정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포커스를 태양계 전체로 잡아도 마찬가지이지요. “고립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태양은 가장 멀리 있는 행성 너머로까지 열과 빛을 복사한다.”(35쪽) 설탕물이 녹을 때 주변에 아무 의식적 존재가 없어도 그 과정은 수학적 시간으로 지속하지 않습니다. 측정이야 알맞게 나오겠지만, 측정되지 않는 수준의 비동일성과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그것이 녹는 동안 지구 자체가, 우주 자체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설탕물 비유에서 나의 조바심은 하나의 참여자의 예시일 뿐입니다.
장마철 레이더 구름을 보면, 날씨는 절대 수치로 환원되는 현상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날씨의 변화는 기온이나 습도나 풍속 같은 측정 데이터로 그 그림자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무궁무진합니다. 예측은 번번히 빗나갑니다. 어떤 물질적 지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거기에 우주 전체가 참여해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례적으로 비가 쏟아지는 현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과 조바심, 그리고 인류가 200년간 뿜어 올린 온실가스, 알 수 없는 지구의 운동 등 온갖 지속이 함께 얽혀 있습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이따가 7시에 뵙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이런 알찬 후기를...!! 지난 시간에 가장 문제적이었던 두 부분을 명료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세미나 시간에 꼭 정리된 질문만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샘의 질문으로 별 생각없이 지나갔던 부분을 다시 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샘이 정리한 것처럼, 설탕물 비유는 '나의 조바심으로 물들어 있는 시간이야말로 설탕물이 녹는 시간'이라는 것, 그 시간은 '온갖 지속들이 뒤섞이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쏟아진 비로 여기저기서 난리를 겪고 있는 중이라 마지막 문장이 더 마음에 남네요...
저도 이 설탕물 비유가 이해가 잘 안됐는데, 샘의 정리를 보니 그렇다!! 이해가 확 되네요.
우리는 마음을 낸다는 것을 정말 상징적 차원, 혹은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걸 당연하다 여기는 것 같아요.
불교에서는 신 구 의 삼업을 말하죠. 마음으로 짓는 업 , 의업 말입니다. 베르그손에게서 듣는 불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