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기도에 관하여
주기도문에는 하느님께 드려야 할 모든 말이 담겨 있고 어떤 경우에나 아주 적합함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내가 늘 하는 유일한 기도이며 문구를 변경하기보다는 반복해 올리는 유일한 기도이다. 그래서 그 기도만큼 잘 기억하는 기도도 없다.(554쪽)
그런데 대체 무언가! 치명적인 죄인 줄 알면서 그 죄의 열매와 이익 위에 온 생애를 얹어 놓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악한데도 세상의 인정을 받는 직업과 일거리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리고 내게 고백하기를, 직책상 신용과 명예를 잃지 않으려고, 자기 생각엔 비난받아 마땅하며 자기 마음속 종교와 상반되는 종교를 표방하며 실천해 왔다고 말한 사람, 그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어떤 언어로 정의의 하느님과 대화할까? 그들의 회개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개선으로 드러나야 하느니만큼, 그들은 하느님에게나 우리에게나 그것을 입증할 도리가 없다. 속죄도 회개도 없이 용서를 구할 만큼 그들은 그렇게 뻔뻔한가?(556~557쪽)
57장 나이에 관하여
그래서 나는 차제에 법에 대해 좀 투덜거려야겠다. 너무 늦도록 우리를 일하게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서야 일하게 하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 삶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암초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인생의 너무 큰 몫을 출생이며 빈둥거리기, 수련 과정 따위에 할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573쪽)
감격스럽습니다. 드디어 10주 간의 <에세1> 낭송을 마쳤습니다! 월, 수, 금 아침 7시, 줌으로 모여서 함께하는 30분 동안의 읽기가 이런 결실을 가져다 주네요. 누군가는 가족들의 식사를 챙겨준 후에, 누군가는 조금 더 일찍 출근해서, 누군가는 비몽사몽 일어나서 <에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함께 읽을 준비가 된 선생님들이 화면에 모여 계셨죠. 각자의 소중한 아침을 뒤로하고, 아니 정확히는 특별하게 만들어내면서 '몽테뉴의 시간'으로 접속했습니다. 그 시간은 은퇴 후 몽테뉴가 차디찬 '자기만의 방'에서 멜랑콜리와 싸우며 자신의 가면들을 적어간 시간인 동시에,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우리들 각자의 시간들이자, 그것들이 겹쳐져서 새로 만들어지는 독특한 강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백일, 이 시간을 서른 번 오가는 동안 우리의 신체 역시 독특한 리듬에 들어선 것도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에게도 작지만 귀중한 시도-에세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가장 바쁘거나 가장 늘어지는 아침을 몽테뉴의 구절들을 한 자 한 자 입으로 따라가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시도-실험이 아니었을까요?
마지막 시간에는 '옮긴이의 말'을 낭소하며 몽테뉴의 '쓰기'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원칙들은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에세2>에서는 그 동기가 본격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글을 써 볼까 하는 망상을 내 머릿속에 처음 넣어 준 것은 몇 년 전 나 스스로 몸담은 고독의 울적함에서 비롯된 멜랑콜리, 그러니까 나의 타고난 기질과는 상극인 심정이었다."(<에세2> 8장) 이 문장이 제게 깊이 남았는데요. 거칠게 제 말로 바꿔본다면, 몽테뉴를 쓰도록 한 것은 그를 통과한 사건들로부터 비롯된 깊은 고독감과 우울함이었지만 더 결정적으로는 그 멜랑콜리 안에서 그것을 넘어가기 위해 부단히 소리쳤던 유쾌하고자 하는 천성이었습니다. 내리 누르는 공허함과 그것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의지. 이것이 그를 쓰게 했고, 그렇게 쓰는 동안, 그 시도를 계속하는 동안 그는 서서히 다른 몸과 다른 정신이 되어갔던 것 같습니다. 아래는 미영샘께서 남겨주신 필사입니다.
오히려 그[몽테뉴]가 자기 안에서 발견한 것은 그 혼란된 정신 이외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게 달리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나 자신을 재료와 주제로 제시했다.”(<에세2> 8장) 그리고 그 나답지 않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 즉 “정신의 어리석음과 기이함을”(<에세1> 8장) 관찰하기 위해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면으로 돌려진 그의 의식은 자기 안에서 인간 정신의 잡다함과 유동성을, 인간 감각과 이성의 허술함과 편파성을 발견하고, 그 한계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인식한다.(옮긴이의 말, 14~15쪽)
몽테뉴의 귀중한 시도의 3분의 1을 읽고, 몽테뉴의 쓰기에 대해 공명하게 된 이상, 나머지 시도를 따라가 보지 않을 수 없겠죠? 그리하여 몽테뉴적 아침을 만드는 우리들의 '에세' , 그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공지는 규문 홈페이지 강좌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1권을 다 읽어낸 감격을 함께 나눠야겠죠? 에세를 함께한 샘들께서 남겨주신 후기를 나누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새로운 책 <에세2>로 만나요!
<에세1>을 읽는 즐거움이 아침 30분 동안 만나 함께 읽는 목소리로 배가 되었습니다. 낭랑하고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아침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어요. 일찍 출근하여 책을 읽는 쏠쏠한 재미와 근거 없는 만족감으로 충만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한 <에세>였습니다!!!
‘에세이’의 유래인 <에세>를 읽게 되어 영광입니다! 온갖 주제들 속에서 자신을 탐구하고 있는 몽테뉴 덕분에 저도 스스로를 탐구해 갈 힘을 얻었습니다.
아마 저 혼자 읽었다면 눈에 띄는 제목만 찾아서 골라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차근차근, 저를 포함한 샘들의 목소리에 의지하여 들으면서 읽어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고대철학을 레퍼런스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내려간 몽테뉴의 독특한 글쓰기, 참! 매력적입니다.
함께 읽는 낭송의 에너지로 <에세>를 읽어내고, 필사를 즐기고, 더불어 일찍 일어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일석삼조의 기쁨을 준 시간입니다. “덕은 삶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움을, 영광을, 건강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덕의 고유하고 특별한 기능은 그런 복을 절도 있게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복을 잃어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301쪽)
낭송 덕분에 습관 하나 만들게 되어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큰소리로 번갈아 읽는 체험은 뭔가 다른 신체성을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몽테뉴가 자신을 시험하듯이 글을 써내려 간 것처럼 저도 저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함 따라가 보겠습니다~ 담 시즌에 뵈어요^^
스승께서 순하고 정겹게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그 속에 담긴 뜻을 음미하며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하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편안하기 바랍니다.~~^^
에 : <에세>를 만나는 시간!
세 :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만남과 명랑함, 뿌듯함을 나에게 선사하는 시간입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 <에세> 덕분에 일찍 일어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몽테뉴의 진솔하고, 유쾌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선생님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어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맞춰 조금씩 함께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것을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계속 여운이 남네요.
아침을 에세로 연다면 일상에서 고삐 풀린 말이 되는 잡다한 상념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역시나 입니다. ㅋㅋ 그러나! 온라인이지만 몽테뉴의 어록을 다른 샘들의 목소리와 함께 듣고 있노라면 상념이 순간이나마 잠시 멈출 때도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직설에 뜨끔하고 위트에 실실 웃기도 했고, 때론 아무 느낌 없이 멍할 때도 있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습니다.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말할 기회도 많지 않아 자꾸 목이 잠겨요. 그나마 낭송이라도 하면서 뚫어뻥합니다.
에세 애독자로서 한 말씀. 반장은 ‘소중한 아침을 뒤로하고’ 에세를 낭송했다 하시만, 올라온 소감을 보니 ‘소중한 아침이기 때문에’ 에세를 낭송하신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기획자로서 뿌듯합니다. 음하하. 에세를 다 읽으신 후에 ‘이대로 몽테뉴를 떠나 보낼 순 없어!’라고 생각하실 분이 반드시 있을 것이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한 후속&심화 세미나도 제 마음속에 있으니, 안심(!)하시고 거침없이 세 권을 독파해내시길 기원합니다. 합장~
-채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