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87)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 du fluide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비록 불분명하고 희미하지만 가장자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철학자에게는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빛나는 핵보다 더 많은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핵을 핵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가장자리가 현존하기 때문이며, 순수한 지성은 더욱 광대한 힘이 응축에 의해 줄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막연한 직관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동, 즉 실재의 표면에 완벽하게 국재화된 localisee 행동을 인도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직관이 단지 표면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층에서 작용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먼저 87쪽 ‘핵과 가장자리’라고 표현된 구절에서 가장자리의 의미를 들뢰즈의 ‘사이’ 개념으로 이해해 본 주영샘의 해석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핵’은 고체화된 관념과 이성을 말하고 ‘가장자리’는 잠재적인 것,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A와 B’가 만날 때 우리는 A, B 그리고 그 둘로부터 도출되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결과(핵), 지금의 유용성에 필요한 중심만을 보지만 결코 그 사이의 ‘와’에 주목하지 않죠. 가장자리는 우리가 놓치는 ‘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베르그손은 가장자리를 보려면 우리에게 직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직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지성의 오작동 지점
이에 대해 순이샘께선 생명 전체는 지속이라는 흐름 속에 놓여 있는데 직관은 이 운동성과 관련되고 우리가 이 흐름의 운동성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란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지난 강독 시간에 채운샘께선 직관은 우리의 지성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꾸로 우리 지성이 오작동되는 지점을 주목해서 보고 거기서 시작해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갑작스럽게 마주한 사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방식으로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고 나조차도 낯선 나의 어떤 면이 불쑥하고 튀어나올 때도 있죠. 이런 경우는 우리가 유용성에 기반한 지성의 고리가 약해지며 다른 힘을 사유해 볼 소중한 기회이지만, 대개 우리는 이런 상황 자체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곧바로 이들을 기존 우리의 관념 체계에 어떻게든 끼워 맞춰 해석해 보려 합니다. 우리의 직관이 희미하게라도 작동할 절호의 기회임에도 우리는 이와 만나기 쉽지 않죠.
민호샘께선 이와 관련해서 직관은 지성을 흉내 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덧붙여 주셨는데요. 베르그손은 이러한 직관은 생명 전체의 연결성을 사유하는 것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할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1-92) 게다가 우리는 어쩌면 여기서 명백한 표상, 즉 지적인 표상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자리의 모호한 표상에 의해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무용한 가장자리는 실제로 우리의 유기조직의 특수한 형태로 수축되지 않은, 그리고 몰래 숨어들어온, 진화하는 원리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무엇이 되겠는가? 따라서 우리 사유의 지적 형식을 확장하기 위한 정보를 찾으러 가야 할 곳은 바로 거기이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약동élan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베르그손이 이 책에서 진화 과정을 고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지점으로부터 생명 전체와 연결된 전체성을 이해하여 생명 자체를 사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더욱 포괄적인 실재’(96)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체성: 체험
난희샘께서는, 우리가 직관과 만날 수 있는 문으로 생각해 본, 예측 불가능한 것을 구체적으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란 질문을 하시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단순한 것이며 또 그렇기에 놓치고 있는 신체성의 문제가 아닐까란 의견을 주셨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베르그손도 ’우리는 실재적 사건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87)라고 말하였죠. 크크랩에서도 올해의 화두가 ’감각체험‘이라 감각과 신체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정아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문제는 우리가 체험하지만 그걸 잘 모르지 않나?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채운샘께서도 크크랩 시간에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의 모든 경험이 체험은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다른 곳을 가도 같은 방식대로 감각하고 익숙한 관념으로 새로운 감각을 환원합니다. 순이샘께선 경험과 체험의 차이가 변용에 있다고 보충해 주셨는데요. 다시 그럼 이 변용을 어떻게 우리가 느낄 수 있나 직관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민호샘은 우리가 진화를 베르그손 식으로 이해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지성이 아닌 우리에게 내재된 직관의 힘에 좀 더 가깝게 가는 것 아닐까? 란 생각을 더해주시면서, 우리가 넘어설 수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교만한 경솔함‘이 아닌지 생각해 보자고 의견 주셨습니다.
-제작과 유기화
이 문제는, 제작과 유기화의 문제로 논의가 넘어가면서, 난희샘께서 좀 더 덧붙여주셨는데요. 우리 모두 생명의 유기화 방식을 제작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어떤 면에선 선천적으로 플라톤주의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넘어설 수 있는 힘으로 베르그손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사심한 예술과 순수한 사변‘(86) 즉 예술과 철학에 있지 않을까 말씀해 주셨어요. 예술에서 우리가 기존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의 변용을 배운다면, 철학에서는 연합하고 축적하는 제작의 방식이 아닌, 분열과 분리의 유기화의 사유를 시도해 보는 것이죠.
제작과 유기화의 차이에 대해, 제작은 이미 재료가 갖춰진 가운데 그것이 연합하고 축적되며 전체를 이루며 부분의 합이 전체와 같다는 입장이지만, 유기화는 최소한의 재료와 가장 작은 장소의 아주 소박한 부분들에 내재된 폭발적 힘이 분해와 분열에 의해 분기하는 방식입니다. 즉 ‘생명의 도약(Elan vital)’(144)이라고 부르는 근원적 약동의 폭발적 힘이 분해와 분열에 의하여 생명 전체의 연결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화가 우연한 요소들의 연합과 첨가에 의해 일어났다고 보는 제작적 방식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죠.
끝으로 반디샘께서 그런데 이 근원적 힘이 그렇다면 ‘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란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는데, 신이 초월적인 것이라면 베르그손이 말하는 엘랑비탈은 초월이 아니라 생명 부분에게 모두 내재된 것으로써 얘기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채운 샘의 강독 노트에 힘입어 머리로는 이해했습니다만 ^^ 앞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 지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음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주제들을 깨알처럼 정리해주셨네요!^^ 핵과 가장자리의 문제를 '사이' 개념으로 생각해보고, 직관의 문제를 신체성의 문제와 연결시켜보고, 생명의 약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혼자 읽을 때보다 훨씬 풍성한 읽기가 되어서 매 시간 흥미진진합니다. 2장도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기대되네요~!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주제들을 깨알처럼 정리해주셨네요!^^ 핵과 가장자리의 문제를 '사이' 개념으로 생각해보고, 직관의 문제를 신체성의 문제와 연결시켜보고, 생명의 약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혼자 읽을 때보다 훨씬 풍성한 읽기가 되어서 매 시간 흥미진진합니다. 2장도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