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정성을 삽입한다는 것
“유기체가 살아야 할 조건들에 대한 적응에 대해 말할 경우, 자신의 물질을 기다리는 형태가 어디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가? 조건들은 생명이 삽입되고 자신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는 틀이 아니다. 그와 같이 추론할 때 사람들은 은유에 속게 된다. 형태는 아직 없으며 자신에게 만들어진 조건들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은 생명의 몫이다. 생명은 이 조건들을 이용해서 그 단점은 중화시키고 장점은 취해야 하며, 결국 외적 작용에 대해 그것들과 아무런 닮은 점도 없는 기계를 만듦으로써 반응해야만 할 것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여기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것이다.”(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1907),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104쪽)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지성이라는 것이 진화의 과정 중에 생겨난 것이라면 그 지성으로 전체 진화의 과정을 통찰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아마도 우리는 지성의 능력을 잘못 표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지성의 노력으로 전체를 통찰할 수 있다는 기획이 지금까지의 지성사의 무의식적 전제가 아니었을까. 베르그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별생각 없이 쓰고 있는 개념들 –설마 이것까지?- 이 전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에 우선 놀란다. 수없이 많다. 퍼뜩 떠오르는 것을 추려보면, 인과성에 대한 개념이 그렇다. 1장에서 나온 당구공, 화약, 테엽이 풀리면서 돌아가는 축음기의 예를 기억해보라.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개념, 나는 이 ‘생각 없이 쓰고 있다’는 이 사실이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베르그손은 자동화된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를 단 하나의 용법으로만 쓰고 있는 것을 자동화된 사고라고 짚는다.
또 하나만 더 짚자면, 진화론자들이 쓰고 있는 ‘적응’이라는 개념을 헤집을 때, 정말 감탄했다. 생각나시는가? 물과 포도주의 예시 말이다.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가. 진화론자가 말하는 ‘적응’은 생명체의 진화를 환경에 단순 삽입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적자생존,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로 그것을 달리 번역하면서. 그러나 생명체의 ‘적응’은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다. 이때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환경, 즉 “조건은 생명이 삽입되고 자신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는 단순한 틀이 아니다.”이어지는 아름답고도 웅장한 문장, 나는 외울 것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반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것이다”(104p)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베르그손은 또 한번 홈런을 친다. 연설가와 청중의 예를 든 부분, 환경과 생명체의 상호작용이 기계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앞의 사례와 맥을 같이 한다. “연설가가 우선 청중의 열정을 받아들인 다음에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고 해서
따른다는 것이
이끈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122p) 요지는 환경이라는 틀과 생명체 각각의 실체를 전제하고 그것의 상호작용을 논하고 있는 관점, 기계론과 목적론을 조목조목 해부하는 베르그손의 메스는 아름다움의 극한이다. 나는 베르그손에게 ‘생명’은 혹시 ‘신성(神性)’이 아닐까, 퍼뜩 연상했다가 금방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탐구의 열기를 식히는 데 최적화된 행동은 아전인수(我田引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앞의 두 예는 새발의 피다. 통째로 외우고 싶을 만큼 빛나는 문장들과 예시들. 정말 나는 책 한권을 다 베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빨리 후기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 쫓긴다. 하지만 “생명이 슬그머니 침투함으로써 행동을 개시하는 것처럼”나는 뻣뻣한 강박을 내 식으로 구부릴 것이다. 맞서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줄 한줄 써가면서 결국 장악할 것이다.
진화, 제자리걸음과 이탈과 퇴행의 이야기를 품은 ‘진보’
“진화는 유일한 길을 그리지는 않으며 여러 방향에 참여하지만 목표를 겨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적응에 있어서까지도 창의적으로 남아 있다.”(같은 책165p)
베르그손의 진화에 따른 이미지는 불꽃놀이 같은 것이다. 생명의 유기화 과정은 ‘폭발’이다. 생명이 개체들과 종으로 분기되는 과정은 대포에서 포탄이 쏘아 올려질 때 그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않고 그 방향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최초의 폭발! 과 동시에 파열되는 조각 조각들이 팡팡 터지는 유탄이 되어 다시 파편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끝없는 분산 가운데 “그것들이 통일될 수 있는 길”도 획득하는데 생명은 “작업 분담이라는 끈으로 그 요소들을 풀리지 않도록” 묶어 놓는다. 우리가 종이라 부르는 것들은 이러한 진화의 현장에 대한 지성적 분류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품고 있었던 그간의 진화에 대한 진부한 상식은 식물과 동물의 분류, 동물과 인간의 위계, 아랫 것들은 위의 것들을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미천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 무지의 책임을 어느 한 개인한테만 묻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 그럴 것이 이 사고틀은 역사가 깊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계승되어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에게 해악을 끼친 중대한 오류는 식물적 삶, 동물적 삶 그리고 이성적 삶 속에서 경향의 연속적 발달 단계를 보는 것이다.”그것들(식물 동물 이성)이 원래 있어 각기 연속적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활동성- 생명은 운동이다-이 분산되는 세 방향들이며, 성장하면서 분리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등한 동물이 점점 발달해 고등한 동물이 된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진화의 현장에는 그런 위계가 없다. 생명의 형태들 중에서는 초보적이거나 잠재적인 상태로 다른 대부분의 형태들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없다. 차이는 비율이다. 말하자면 “집단은 일정한 특성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들을 강화하는 경향에 의해 정의된다.”(170p) 생명체는 자연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향해 기울도록 되어 있으며 식물과 동물은 쌍방이 각각 자신에게 필요한 탄소와 질소를 얻는 방식에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유용성을 선택했을 뿐이다.
진보는 목적론자들이 표상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목표를 향한 전진만은 아니다. 즉 목적론은 생명계 전체를 우리의 유기체와 같은 이미지로 표상하고 각 부분은 전체 유기체를 위한 가능을 목적으로 배열된다. 각 부분들의 조화로운 전체를 위해 나아간다. 외적인 불협화음은 근본적인 조화음을 강조하기 위한 구실이라고 해석하면서. 진화는 마치 한 천재의 제작품처럼 제작 대상과 제작 작업의 완벽한 합치를 이루어야 한다. 전진할수록 점점 더 조화로운 전체로 나아간다는 것이 목적론의 구상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에게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제자리걸음과 이탈과 퇴행의 이야기를 품은 ‘진보’이다. 다시 말하면 베르그손에게는 ‘완성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껍질, 딱지, 갑옷, 셀룰로오스막
제자리걸음과 이탈과 퇴행의 이야기를 품은 ‘진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품고 있던 진화에 대한 단선적인 표상이 얼마나 딱딱하고 평평한 것인지를 되묻게 한다. 우리는‘의식’을 인간 고유의 사유의 도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베르그손에에 따르면 식물과 동물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단순 분리해 파악하려는 경향은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의식은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식물은 양분을 취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써 고착성을 택함으로써 운동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의식은 잠들어 있다. “어떤 동물이 뇌가 없다는 이유로 의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위가 없다는 이유로 양분을 섭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합리하다”(175p) 달리 말하자면 신경계가 발달한 동물들에게 그 신경계란 무엇을 명령함인가? 이동 운동을 위한 에너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다. “더 많이 움직일수록 아마 더욱 탐욕스럽게 되고 서로에 대해 더 위험하게 된다.” 식물들이 말하고 식물들이 깨어나는 세계는 에니메이션 작가의 특유의 상상물만은 아닌 것이다. 최근 실험 결과에 따르면 ‘돌연변이’의 시기가 오면 식물은 어떤 방향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성공과 실패를 말할 때 그 이야기의 뿌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같은 문장은 일반적인 성공과 실패의 표상을 어느 정도 뒤집는 면이 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동일한 진화 선상에서 한 종이 다른 종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하고 단순하 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성공의 표지를 제시하자면 생명체의 성공은 다양한 환경에서 있을 수 있는 극히 다양한 장애물을 통해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지구상의 승자는 식물이 아니던가.
베르그손에게 생명은 항구적인 증대 운동이다. 이 과정에서 “그 노력들이 갑자기 중단되며 때로는 대립되는 힘들에 의해 마비되고, 때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 때문에 해야 할 일에 부주의하기도 하고, 자신이 취하려고 몰두하는 형태에 빠져 거울을 보듯이 그 모습에 도취되기도 한다”(198p) 진화는 일관된 진보가 아니라 삐거덕거린다. 그 삐거덕거림의 과정 속에서 형태들이 남긴 후속 이야기들의 해석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예컨대 극피, 연체, 절지, 척추동물의 근원적 형태는 구더기였다. 아, 놀라워라. 하마터면 동물적 삶의 도약을 멈출 뻔한 장애물이 바로 딱닥한 껍질이었다는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의 딱딱한 삼엽충 같은 고생물들을 상기해보시라. 껍질은 적대적 종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종들의 노력을 공통의 기원으로 한다. 연체동물의 껍질, 갑각류의 딱지, 고어류의 경린으로 된 갑옷 같은 것들.식물이 셀룰로오스막으로 감싸이면서 의식을 포기하게 되었다면 , 성곽이나 갑옷 속에 갇힌 동물은 반수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피신처로 삼은 이 갑옷이 동물의 운동을 방해하고 때로는 그것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진화에 성공한 것들은 모두 자신의 선조를 보호하고 있던 갑옷을 벗어 던진 것들이다. “인간이 무장(武裝)을 발달시키는 것도 같은 종류의 진보이다. 최초의 운동은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두 번째가 더 나은데 이것은 도망과 특히 공격을 위해 가능한 한 몸을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공격은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같은 책204p)
베르그손은 여기서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전투를 예화로 가져온다. “철갑옷을 입은 기사는 운동이 자유로운 보병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전투는 1415년 헨리 5세의 저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를 말한다. 티모시 살라메 주연의 ‘더 킹’에 소상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람하시길. 정말 프랑스의 막강 갑옷 부대가 풍뎅이처럼 뒤집어져 버둥거린다. “일반적으로 생명 전체의 진화에서도 인간 사회와 개인의 운명의 전개와 마찬가지로 최대의 성공은 최대의 위험을 무릅쓴 것들의 몫이었다.” 빛나는 예시 하나를 다시 들여오자. “내 손이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대신에 내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압축되고 저항하는 쇳가루더미를 관통한다고 상상해 보자”(153p) 기력이 다해 손이 거기서 멈추어서는 순간 쇳가루낟알들도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우리는 가시적인 것이 왜 그렇게 있는가를 알려고 할 때 가시적인 것의 형태와 배열을 붙잡는다. 그러나 쉿가루더미의 배열과 형태는 손이 나아가려고 방향과 그 애씀이 지나간 잔해로 남은 길이다. “기계의 부분들은 그 작업의 부분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기계의 물질성은 더 이상 사용된 수단들의 전체가 아니라 극복된 장애물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실재라기 보다는 부정(negation)이기 때문이다. “ 쇳가루의 배열의 근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 근거가 쇳가루 자체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과 쉿가루의 위치를 그 옆의 것들이 그것에 행사하는 작용과 관련해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 지성의 두 가지 언어인 목적론과 기계론적 사고에 묶여 있다. 목적론과 기계론적 사고는 도처에 있다. 아마도 지성의 작업은 그 둘을 넘어서는 싸움이지 않을까.
베르그손의 책들에는 정말 "통째로 외우고 싶을 만큼 빛나는 문장들과 예시들"이 가득하죠. 창조적 진화는 더더욱... 그런 만큼 세미나에서도 각자 주목한 부분들이 달라서 더 재밌기도 한 거 같아요.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베르그손은 우리가 '생각 없이' 쓰고 있는 많은 개념들을 너무나 새롭게 다시 풀어주어서 매번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도 베르그손처럼 지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길~^^